지킬 박사와 하이드 (반양장) 펭귄클래식 3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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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두운 달밤 체구가 작고 지팡이를 든 남자


  최근에 개봉했던 영화 23 아이덴티티(Split)을 아시나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제임스 맥어보이 주연인 영화로, 23개의 인격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죠. ‘23개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실제 다중인격의 사례인 빌리 모리건이라는 사람은 24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그리고 법정에서 다중인격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은 최초의 사람이라고도 하네요사실 이중인격 혹은 다중인격이라는 소재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소재는 아닙니다영화소설 등에서 흔한 단골 소재이기도 하죠그래서 마치 이런 경우가 흔한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중인격은 전혀 흔한 경우가 아닙니다정식 명칭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이고실제 세계적으로 350명 정도의 증례만 보고되었을 정도로 희귀한 경우라고 합니다또한 환자마다 워낙 경우가 다양하여 구체화된 자아를 따로 가진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을뿐더러진단 자체도 아주 어렵다고 합니다이러한 해리성 정체감 장애’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작품이 있지요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는 같은 소재를 사용한 수많은 작품들을 보게 됩니다바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입니다.

 

 

  사실 이제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따로 설명도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쓰입니다워낙 유명하기에 우리는 그 말만 들어도 이중인격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죠국내에서는 뮤지컬로 재탄생하여 엄청난 흥행을 이끌기도 했습니다이중인격이라고는 하지만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완전히 다릅니다둘은 같은 신체를 공유하면서도 실제 모습과 성격그에 따른 행동까지 판이하게 다르지요지킬 박사의 지인 변호사 어터슨은 지킬 박사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쉰 살의 건장하고 균형 잡힌 체형에 수염을 기르지 않은 얼굴이었다무언가 숨기는 듯한 인상도 주었지만 포용력과 친절함이 풍겼고그가 어터슨을 바라보는 표정에서는 진정이 담긴 따뜻한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책에서 묘사되는 지킬 박사는 사회적으로 평판도 좋고 재산도 많으며 잘생긴 인물입니다지킬 박사의 주변 인물들 역시 선하고 평판이 좋은 인물들임은 당연하지요그런 지킬이 나쁜 일을 저지른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런 지킬이 하이드를이미 대부분 아시겠지만 하이드는 지킬이 만들어낸 약물로 나타나게 되는 존재입니다선한 지킬이 그런 약물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이해가지 않으실 수도 있겠습니다그러나 언제나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지킬에게도 결점은 있고지킬은 스스로의 결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의 큰 단점은 쾌락을 탐하는 성향이었다쾌락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만고고한 자긍심으로 대중들 앞에서 철저하게 근엄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오만한 욕망을 가진 내게 쾌락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지킬은 스스로의 성향을 잘 알고 있고상당히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그는 자신이 정한 고귀한 가치관에 따라 거의 병적인 수치심으로 내 부조리를 감추었다.’고 고백합니다지킬에게 이러한 상충되는 욕망은 매우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그래서 그는 두 욕망의 분리를 생각하지요.

 

나는 생각했다만약 각각의 본성을 별개의 개체에 담을 수 있다면참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일이 가능해지지 않을까부조리한 존재는 그의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그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그는 선행을 하는 가운데 기쁨을 느낄 것이며더 이상 이질적인 악마가 행하는 불명예 탓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이들 모순되는 한 쌍이 함께 묶였다는 것은고뇌하는 의식이라는 자궁 속에 이렇게 극과 극인 쌍둥이가 계속 갈등하며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은 인류가 받은 저주였다.

 

  지킬이 생각하기에 인간은 그 내면에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있는 존재입니다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면의 상충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운 부분은 아닙니다언제나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만무의식적으로 간혹 차오르는 증오와 욕망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니라고온전히 선하기만 한 사람도 있다고 주장하실 수도 있겠습니다정말 그렇다면 지킬 박사와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제 생각이 틀린 것이겠지요그리고 저 역시 진심으로 그러길 바랍니다만역시 아무래도 아직은 지킬 박사의 손을 들어주게 되네요.

 

 

  결과적으로 지킬 박사는 성공합니다훗날 밝혀지지만 지킬이 처음 구매했던 염료는 불순물이 섞여있었고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실험은 성공하죠철저히 우연의 산물이랄까요신체가 변형되는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지킬은 결과에 만족합니다자신이 원하던 대로 지킬은 내재되어 있던 욕망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지고모든 악은 순수하게 하이드가 담당하게 되지요.

 

감각이 뭔가 낯설었다뭔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웠고그 새로움 때문인지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내 육체는 더 젊어지고 더 가벼워지고 더 행복해졌다나는 그 육체 안에서 마치 환상 속에서 물방아에 물이 흐르듯 무모한 무분별과 무질서한 관능적 이미지의 물결이 흐르는 것을 의식했다책임감이 녹아 사라지고알려지지 않은그러나 결코 순수하지 않은 영혼의 자유로움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로써 지킬과 하이드는 철저히 다르면서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시작합니다하이드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요하이드는 지킬과 분명 다르게 생겼습니다체구도 훨씬 작고하이드의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기형이라는 단어를 자동적으로 떠올립니다사실 이런 설정은 우리에게 지극히 익숙합니다좋은 사람주인공은 언제나 수려한 외모에 기분 좋은 에너지를 내뿜죠그리고 반대로 악한 사람범인은 흉측한 외모 혹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을 가지고 있죠이러한 공식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도 똑같이 적용되어 있죠여담입니다만이러한 설정은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것도 사실입니다외모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선과 악에 대응하는 그릇된 이미지를 받아들이곤 하는 것 같습니다저번에 보았던 프랑켄슈타인이 생각나기도 합니다물론 하이드의 경우는 프랑켄슈타인의 크리처와는 다른 경우긴 하지요하이드는 태생부터 지킬의 욕망을 대변하는 순수한 악의 결정체니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하이드는 점차 지킬의 통제를 벗어납니다하이드의 ()’이 지킬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날뛰기 시작하죠대표적으로 두 가지 사건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첫 번째는 넘어진 아이를 무참히 발로 밟고 지나갔던 일두 번째는 평판이 좋은 노신사 커루 경을 야심한 밤에 지팡이로 때려죽인 사건이지요분명 두 사건 모두 하이드가 저지른 일입니다그러니 하이드가 책임을 져야겠죠그렇다면 지킬은 이에 대해 무고한 것일까요이 부분에서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저는 지킬에게도 질타의 시선을 보내려 합니다하이드가 범죄를 저지를 때에는 지킬이 관여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하지만 그 모든 뒤처리를 하는 것도하이드가 살아갈 수 있게 돕는 것도 지킬이니까요지킬은 자신의 악의 결정체인 하이드를 버리지 못합니다결국 하이드 역시 자신이니까요.

 

그리하여 지킬 박사로서의 내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재정적인 손실 없이 에드워드 하이드로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그렇게 내가 생각했던 대로 모든 면에 대비를 끝내자 나는 내 상황의 기이한 면책에서 오는 득을 보기 시작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됩니다약물 없이 제멋대로 지킬과 하이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지경에 이르죠그리고 모든 진실이 밝혀지려는 순간결국 파국에 이릅니다어터슨이 집사와 함께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보게 된 것은 체구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하이드의 시체였지요의아한 구석도 있는 결말이지만어떤 면에서는 쉬운 결말이기도 합니다실제로 하이드를 잡는다 하여도지킬과 하이드를 오가는 이 존재를 과연 처벌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남으니까요어렵지만 생각해 볼 주제입니다.

 

 

  1886년 출간된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이고 무서운 작품이었습니다이중인격이라는 소재도 흔하지 않았을뿐더러 인간 내면에 자리 잡은 악함에 대한 조명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죠두려움의 대상이 인간 외부의 존재에서 인간 내면의 존재까지 포함하게 되었으니까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읽고 나면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의 자아인가?’, ‘사실은 여러 가지 내면에 존재하는 자아의 가능성들 중 상황에 따라 유력한 것들이 튀어나오는 복합적인 존재는 아닐까?’ 간혹 나 자신이 너무나 낯선 행동을 하거나 이전과는 크게 다른 생각을 할 때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앞서 말했듯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극히 드문 사례입니다그러니 우리와 우리 주변 대부분이 이에 해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가끔 아무리 친구나 지인이 이상하게 보인다고 해도 말이지요.

 

  유독 하나의 이미지가 마음에 남습니다달빛이 환히 비추는 어두운 밤 골목지팡이로 노인을 때리는 사악한 하이드의 모습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나의 시선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지켜보는 입장에서 지켜봄을 당하는 입장으로 변해서는 안 되겠지요언제고 사라지지 않고떼어낼 수도 없는 관계의 공포지킬 박사와 하이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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