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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의 여행 ㅣ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빛소굴 / 2022년 8월
평점 :
이 책에는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과거로의 여행>과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
두 작품 모두 주요 등장인물은 나이가 지긋해지는 중년의 부인과 젊은(어린) 남성인데, <과거로의 여행>은 남자의 입장에서,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은 여자의 입장에서 심리묘사가 전개되고 있다.
그리 길지 않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 난 그안의 인물들이 된다. 얼마나 자세한 심리가 그려져 있는지, 내가 오글거리고, 부끄러워지고, 허탈해지고, 허망해지고, 심지어 시원해지기까지 한다.
중년의 나는, 두 여주인공 사이에서 참 힘들었다. 표출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은 여자로의 욕구. 그러나 결국은 과거의 그림자일 뿐일지도 모르는, 어쩌면 그림자의 역할조차 되지 못했던 두 여인이, 나에게는 참 아픈 존재였다.
📌 p. 180~181 (원당희-역자해설 중에서)
이 책에 수록된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 <과거로의 여행>...두 작품 모두 독일어권 문학에서는 노벨레라는 장르에 속하며, 이야기 방식은 기억이나 회상를 극적으로 서술하기 위한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한다. 여기서 노벨레는 대체로 중·단편 소설에 해당하지만, 내용에서는 길이보다 그 특성에 주목해야만 한다. 노벨레는 주로 기이하고 괴상한 사건, 일상성에서 벗어나는 특수하고 비정상적인 관계나 사례, 병적인 행위와 개인의 일탈 등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 만큼 모든 사건도 -거리와 객관성의 예술인 장편소설과는 달리- 주관적 감흥에 따라 빠른 진행을 보여주며 사건의 결말 역시 돌발적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다.
📒 p. 29~30
그렇지만 이런 흐름의 깊은 곳엔 본질적으로 돌덩이처럼 뭔가 저항하는 것, 혼탁한 어떤 것, 제거되지 않은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 그의 감정이 아주 자유롭게 분출되려면 이런 마음의 찌꺼기 같은 것이 제거되어야 했다. 그는 감정의 저변에 드리워진 어둠을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더듬어 내려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감히 손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감정의 흐름은 언제나 그가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지점으로 그를 몰아갔다.(그가 차마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그녀의 모든 사소한 관심 속 호감은 그를 살피고 감싸는 부드러운 감정일 뿐인 것은 아닐까? 그안에 열정은 없었던 것이 아닐까?
📒 p. 42~43
그는 스스스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지내다보니 그의 내부에 있는 치밀한 열정의 그물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추억만으로 살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색이 바래지 않고 꽃이 시들지 않으려면 땅의 영양분은 물론, 하늘의 새로운 빛이 늘 필요하다. 식물이나 모든 구성물이 그렇듯, 우리가 꾸는 꿈도 마찬가지이다. 얼핏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꿈조차도 모종의 감각적 양분이 필요하다. 섬세하고 구체적인 감각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본연의 특징과 광채도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 p. 74
두 그림자는 과거를 찾아 헤매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더는 현실이 아닌 과거를 향해 애매모호한 질문을 던지던 그림자, 살아남으려고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는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그녀와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과거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발아래 드리워진 저 검은 유령처럼 그들은 헛된 노력에 힘을 탕진하며, 달아나고 멈추는 유희를 계속한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