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 김지원 역, 다산책방, 2019년, e-pub

sns에서 본 글. 어떤 가정폭력 피해자의 경험담. 대로변에서 맞는데도, 지나가는 사람 하나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 여자가 얼마나 나쁜지, 어떤 맞을짓을 했는지 확인 할 수 없는 가해자 남편의 말들에 주변 사람들은 동조했고, 방치했다. 맞아서 아픈 것보다, 주위를 둘러싼 그 사람들이 내뿜는 공기 - 맞을짓을 한 여자-가 자신을 더 고통스럽게 했다고, 아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어느 날에는 그렇게 맞는데, 왠 20대 여자가 남편을 막아서더란다. 대단히 용기있는, 남자 하나 쯤 맞서 싸워서 이길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휴대폰을 들고는 경찰서에 신고하겠다며 울기 직전의 목소리로 소리치던 호기에, 남편은 욕을 하고는 물러섰다고 했다. 그렇게 남편이 가고 난 뒤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던 그 여자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그렇게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했다.

그렇게 겁을 내면서도 어떻게든 버텨내는 여자들이 나오는, 놀랍게도 논픽션이다. 가정폭력의 가해자였던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은 오빠는 폭력의 선을 넘어 납치와 살인까지 저지른다. 오빠는 증거를 남기지 않을만큼 똑똑한 사람이고 혼자힘으로 변호사까지 된 주인공은 그런 오빠에게는 놓칠 수 없는 중요한 도구이고, 주인공은 그런 오빠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오빠는 자신을 죽일수도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자신 뿐만 아니라 딸과 손녀까지 위험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약간의 애정도 있었을,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상태에서 유일한 울타리였을 가정에 함께 묶인 오빠와의 삶속에서 그를 고발하는 주인공을 보며, 그 20대여자를 떠올렸다. 겁이나고 무섭고, 눈물도 나고 다리도 떨리지만 그래도 멈출 수는 없는 일. 내 옆에 있는 사람-여기서는 더 절실했을, 내 혈육들-의 생명을 짊어지고 덜덜 떨며 전진해나가는 삶이 그대로 쏟아져 나온다. 저자와,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오빠의 전 애인. 그들은 살기위해서, 자신의 혈육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나선다. 그 약자들의 연대가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다른 오빠 한 명은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며 참여하지 않았다) 잠시 논픽션인걸 잊을 정도였다.

녹취록은 제출되었고,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재판에서 증언까지 한 저자의 삶은 결국 한 구석이 부서졌다. 그는 보복 살인의 위협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주변을 경계하며, 온 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의 삶이 평화롭게 이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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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이의 독서기록이란, 뻔하고 혹은 지루하기 쉽다. 나는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의 줄거리란 영화보다 복잡하고, 그래서 제대로 쓰려다보면 어느샌가 엄숙한, 혹은 자신의 지적 수준을 자랑하는 비평이 되어버린다. 휴식을 위해 손을 내밀만한 에세이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칼럼으로만 접한 정희진은, 대체로 내가 이해하고 공감하고 더 나아가서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던 작가이기에 한편 궁금하기도 했다. 책을 어떻게 읽을까. 무엇으로 읽을까. 게다가 짧은글들을 모았다니 그만큼 부담도 덜했다. 
















여느 독서기록자들과는 달리 다독자가 아님을 처음부터 말하고 들어가지만, 집에 문학사상이나 삼중당 같은 도서류가 없었던 내가 보기엔 굉장한 다독자다. 나는 이와나미 문고의 존재도 몇 년 전에야 알았다. 


정희진은 책을 그저 많이 읽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지식을 얻고 사고하고 실천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보여주는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 다독자가 아니라는 것은, 그저 읽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으로 나 혼자 해석했다. 


시간이 나는대로 한 번 더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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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갈 수 있는가, 가 소위 '아싸'력을 측정하는 질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둘 이상이 모여서 같은 스크린을 바라본다고 해도, 영화는 혼자 볼 수 밖에 없는 행위다. 

거실에서 먹을거리를 쌓아두고 영화를 보는 것과 수다를 떠는 것을 섞어 즐기는게 아니라면, 영화를 '함께'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이 꺼지기 전과 자막이 올라간 뒤에 일행과 말을 나누는 것은, 사실 영화를 보는 행위와는 무관하다. 
















그래서 '혼자서 본 영화'라고 했을 때, 무슨 말인가 했다. 정희진의 영화보기란 좀 특별하다. 둘이 가더라도,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져 앉는다. 오롯이 영화를 즐기기 위해서. 그러고보니 생각난다. 자막이 올라간 뒤엔, 언제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일행과 말을 시작했다. 저 배우가 어땠는지, 밥은 뭘 먹을지. 여운이 끝까지 남는 영화는 나에게도 혼자 본 영화였다. 만추가 그랬고, 그을린 사랑이 그랬고, 퍼햅스러브가 그랬다. 


오랫동안 쌓인 메모를 바탕으로 다시 써내려간 에세이는, 영화 얘기를 하면서도 세상을 말하고, 그러면서도 영화를 벗어나지 않는다. 때때로 영화는 그저 시작점일 뿐, 이내 영화에서 벗어나거나 심지어는 영화 본래의 주제와 별 상관없는 글들이 많은데, 그런 것은 따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언정 영화에 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정희진의 글들은 딱 적당하다. 


본 적 없는, 심지어는 모르는 영화가 많지만, 당연히 문제는 되지 않는다. 나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간단하게나마 메모를 해두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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