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러 나가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작가들을 나름의 기준에서 분류를 하다보면 글을 잘써서 좋아하는 작가가 있기도 하고, 나의 감성을 마구 건드려주어서 좋아하는 작가기 있기도 하며, 그 작가의 사상과 삶, 생각이 너무도 좋아서 좋아하는 작가가 있기도 하다. 나에게 조지오웰은 세번째 경우, 즉 그의 생각과 사상, 삶이 너무도 멋져서 좋아하는 작가였다. 그리고 은연중 그러한 마음 속에는 조지 오웰과 감수성은 조금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오해를 나 혼자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깨달았는가? 바로 <숨쉬러 나가다>를 읽으면 그 미안한 오해를 멋지게 깨버릴 수 있다.

 

<숨쉬러 나가다>는 2차대전이 벌어지기 얼마전 영국에 사는 한 평범한 가장의 소소한 일상 탈출기를 담고 있다. 친구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한 내기에서 이겨 17파운드를 번 조지 볼링은 그 돈으로 무얼할까 고민하던 중, 바람도 쐴겸, 예전의 공기를 마쉬기 위해 자신이 자란 고향을 방문한다. 그러나 지금만큼이나 엄청난 속도로 변화를 하는, 오히려 사상과 생각,가치관과 패러다임의 차이로 치자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급변기를 맞고 있는 20세기 초의 유럽사회에서, 20년의 세월은 그가 숨쉴 공기마저도 빼앗아가버렸다.

 

숨쉬러 나갈 공간이 없다.

조지오웰은 쉼쉬러 나갈, 잠깐 바람좀 쐬고 올 공간과 시간, 정치적인 것과 지극히 개인적인 것의 네가지를 모두 한 작품 안에 아울렀다. 이미 조지 볼링의 고향은 그가 생각한 한적한 농촌 마을이 아니었다. 마을에는 큰 공장지대가 있고 그에 따라 그가 살았던 마을에는 무려 2만명이 산다! 더이상 볼링가문의 조지라는 이름으로는 누구를 찾을 수 없는. 그런 도시가 되어버렸다. 도시와 시골을 비교함에 있어서 가장 큰 대비는 바로 밀도의 차이일 것이다. 오밀조밀 모여사는 도시와 띄엄띄엄 살아도 되는 시골의 차이. 그 차이의 간극을 가장 확실히 메워버린 것은 바로 조지 볼링만의 연못이다. 이미 연못은 마을 주민의 60%가 채식을 하는 주민들의 쓰레기장이 되어버렸다. 더이상 주인공이 숨을 쉬러 갈 공간은 연못의 물이 마르듯 말라 버렸다.

 

숨쉬러 나갈 시간도 없다.

곡물 종자상의 아들 조지. 그가 자동차를 끌고 다니고 욕실이 있는 집에서 사는 모습을 그의 아버지가 봤다면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무척 대견스러워했을 것이다. 그런 조지 볼링이 아이들과 부인과 함께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도시의 여느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쉴새없이 일해야 한다. 그에게는 더이상 엘시의 남편과 같은 티타임이 허락되지 않는다. 물론 그 역시 회사에서 잠깐 짬을 낼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그의 공식 일정에 티타임이 있는건 아니지 않은가. 더이상 자영업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 내가 주인이 아닌 사회에서는 점점 숨쉬러 나갈 시간이 없다. 나갈 시간은 있을지언정, 내 마음대로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한가지 더. 조지 볼링의 아버지가 일을 할 때에는 그의 일과 그의 수입에 대해서 그의 어머니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신경자체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한세대를 건너자 조지 볼링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 즉 숨쉬러 나갈 시간은 이제 없다. 매순간 볼링은 부인의 잔소리에 신경을 써야한다. 물론 여기서 남여차별을 주장하고, 어디 남자가 하는 일에 여자가 참견이야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볼링의 아버지 세대에는 아버지의 일과 어머니의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두가지는 모두 노터치였으며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한세대를 지나자 서로의 일에 서로를 간섭하게 되었다. 이 간섭자체를 문제시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간섭과 참여가 어쩌면 더욱 신경쓸 것이 많아진다는 의미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자는 말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서로에 대한 걱정의 증폭속에서 스스로에게 숨쉴 여유와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비단 조지 볼링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의 아내 힐다 역시 점점 스스로에게 숨쉴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것. 모든 시간에 돈걱정, 아이걱정, 남편 걱정을 해야만 하는 그녀 역시, 어느 순간 그의 남편처럼 잠깐 틀니를 새로 하다가 숨을 쉬고 싶어졌을 때, 그녀 역시 숨쉴 시간이 없다는 것을 느낄 것이라는 이야기다.

결국 한세대를 건너자 우리는 조지 볼링도, 힐다도, 숨쉴 시간을 빼앗겨 버렸다는 것. 숨쉴 시간이 사라졌다.

 

숨쉴 시간이 없어진 것은 '나' 때문인가 '너희' 때문인가

이 책의 소개에서부터 시작해서 흔히 이 책을 조지 오웰이 1984와 동물농장을 쓰기 전, 그의 작가의식이 이미 그것에 거의 근접한 나머지 숨쉴 공간과 시간이 없어진 것에 대한 정치적인 견해에 대한 표현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전, 영국의 하늘에는 폭격기가 날아다니고-심지어 오폭사고까지!- 조만간 파시즘과의 전쟁이 일어날 것은 기정사실화 되며, 많은 반파시스트들이 이에 대한 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고 있는 그 시절. 시골마을에까지 대기업의 체인 슈퍼마켓이 들어오고 어느 가게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은 익명성으로 전환되어버린 시절. 모두가 바삐 돌아다니고 서로에 대한 관심은 이제 남들과 내가 같은가 다른가에만 맞춰진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이 소설의 중심축인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처음 조지오웰을 다시 봤다고 얘기했듯이 이 소설을 그런 정치적인 소설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1984나 동물농장의 경우는 누가 머라고 부인할수 없는 정치적인 소설이다. 그리고 나는 조지 오웰이 그 위대한 소설들을 쓴 사상에는 무한한 경의를 보내지만 그 소설을 보고 잘썼다라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었다. -그 사상의 거대함에 짓눌려 그러한 생각은 아예 해볼 엄두조차 못냈으니까-. 그런데 이 소설 <숨쉬러 나가다>에는 평상시의 조지 오웰을, 인간적인 조지 오웰을 유감없이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인간적일 것 같은 조지 오웰 속에서 나는 이사람이 이토록 감수성이 충만하며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새로이 체감할 수 있었다.

조지 볼링이 숨을 쉬기 위해 그의 머리속에 떠올린 생각. 그날 유난히 기분이 좋은 이유는 아주 사소한, 그러나 매우 중요한 새로운 틀니를 했다는 것. 그를 시골 마을로 데려간 것은 흘러가는 신문의 조그왕이라는 한단어 뿐이라는 것. 그 한단어를 통해 주인공을 40년전 꼬꼬마 시절로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조지볼링, 그리고 조지 오웰의 감수성. 그 곳에서 나는 숨쉴수 있는 시공간의 지나감은 비단 2차세계대전 직전의 세기말적 분위기 뿐 아니라, 단순히 시간의 흐름과 인생의 낙화를 바라보는, 그 흘러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부여잡기 위한 한 인간을 바라본다. 인간은 점점 절대적으로 숨쉬러 나갈 시간을 빼앗겨버린다는 거대한 진리. 

숨쉴 공간을 없애버린 것은 너희이지만, 숨 쉴 시간을 빼앗아가 버린 것은 너희 와 나 라는 사실.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수십년 전의 나를 찾아가는, 그러나 그 잡을 수 없는 세월의 거대한 벽 앞에서 소소한,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패배를 당하고 다시 현실로, 힐다의 앞으로 순간이동 해버린 조지 볼링. 당신. 나.

 

멀게만 느껴졌던 조지오웰이 이상하게 친숙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