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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ㅣ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평점 :
동명의 드라마가 있는 건 알았지만 원작이 책이라길래 책부터 보려고 미뤄두었다. 1권만 봐서인지 도대체 왜 소설의 제목이 '파친코'인가는 아직까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2권을 꼭 읽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소설 '파친코' 속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다. 일본은 한창 전쟁중이며 조선은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멸시받고, 수탈이 일상이며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마음을 졸이고 사는 게 일상이다. 그런 시대에 부산의 끄트머리 영도, 그곳에도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한 늙은 어부와 아내는 영도에서 하숙을 치며 아들을 셋 낳았으나 가장 몸이 약한 큰아들 훈이만 살아남았다. 훈이는 윗입술이 세로로 갈라졌고 다리를 저는 장애가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훈이는 근성이 있었고 일을 잘해 가난한 살림에도 아내를 맞을 수 있었다. 아내 양진과 훈이는 여러 아이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끝에 네번째로 딸아이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선자를 낳았다. 그리고 선자가 열세 살이 되던 해 훈이가 결핵으로 죽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설 파친코의 주인공 '선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영도가 고향인 선자의 출생부터 성장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이야기까지가 1권에 수록되어 있었다. 아마 2권은 아이들이 성장하며 겪는 문제와 선자의 말년까지 그려지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은 선자 주변의 다양한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그린다. 선자가 처음 겪었던 상실은 아버지다. 일제강점기인데 왜 첫번째 상실이 나라이자 조국이 아닌가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의 도입부는 이렇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첫문장부터 우리는 역사의 일부지만 나라와 상관없이 그럼에도 살아가야한다는 의지가 잔뜩 드러나있어서 몹시 강렬한 느낌이었다. 때문에 선자에게 첫번째 상실은 아버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외에 선자는 다른 사람들과 헤어지기도 또 다른 죽음을 경험하기도 한다.
주인공인 선자는 약자다. 가난하면서 나라를 잃었고, 어린 여자아이였다. 때문인지 주위의 인물들은 약자인 선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 시대 사람같지 않게 몹시 다정한 아버지와 든든한 어머니, 함께 하숙집을 이끌어가는 식모 자매들이 있었던 따뜻한 보금자리는 시간이 갈 수록 가난에 허물어져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굳세게 살아가는 젊은 과부인 양진은 딸 선자와 하숙집 식구들이 그저 배만 곯지 않기를 바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꼬박꼬박 밀리지 않고 들어오는 하숙비와 채소를 가꿀 텃밭이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선자가 어느 유부남의 꼬임에 빠져 임신을 하게 되며 엄청난 변화가 생긴다.
분명히 말해두건데 소설을 보면 화나는 포인트가 상당히 많다. 만약 독자가 여성이라면 더욱 더 그럴 가능성이 높다. 아무런 정보 없이 보다가 선자를 임신시킨 놈이 유부남이라는 걸 알았을 때 육성으로 욕이 나올뻔 했다. 그럼에도 뻔뻔하게 너는 조선의 아내고, 일본인인 아내는 따로 있을거라며 말하는 부분에서는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화가나서 책을 한 번 덮었었다. 그 밖에 조선인이기 때문에 받았던 차별, 조선인이면서 여자이기에 희생당하고 억압당했던 삶, 아무리 노력해도 올라갈 수 없는 사다리, 부당한 구속 등등 화나는 포인트들이 많아서 대체 그 시절은 어떻게 삶을 살아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지독한 삶에서도 한 줄기 빛이 있었다면 선자에게는 그것이 남편인 이삭이었을 것이다. 이삭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해 이제 밑바닥으로 내려갈 일만 남았던 선자를 구원해줌과 동시에 좋은 아버지이자 남편이 되어주었다. 기적같이 나타난 이삭을 따라 선자는 일본 오사카로 향하고 그곳에서 조선인 마을에 가게된다. 조선인 마을은 집 안에서 돼지를 키우고 음습하며 냄새나는 곳이었으나 선자에게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물론 여기서도 선자의 고난이 끝나지 않는다. 아이를 임신해 온 선자를 반기지않았던 남편의 형 요셉은 경제력은 턱없이 부족하면서 아내의 일자리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고 수틀리면 소리를 치며 기분나쁜 티를 팍팍 내는 남자였다. 같은 부모아래 자란 형제임에도 너무 달랐던 모습이었는데, 결국 선자는 요셉의 아내인 경희와 힘을 합쳐 일을 하고 가정의 어려움을 꿋꿋하게 이겨나간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업적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사람들이 살아가지 않는 건 아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나라를 잃어도 사람들은 살아가야하며, 누군가 나라를 팔아먹었다해도 당장 먹고 사는데 문제가 있다면 그런 점은 신경쓸 겨를이 없다. 먹여살릴 아이가 있다면 더더욱. 일본이 조선을 할퀴고 지나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으나 그럼에도 살아갔다. 죽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저 살아야했기에 살았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가족이 있고, 아이가 있으며, 허울 뿐이라해도 자신이 속한 곳이 있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그저 버텼던 기록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소설을 더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암울함만 가득한 소설이지 않나 싶겠지만, 잘 읽혔고 재밌게 볼 수 있는 소설이기도 했다. 당분간 잡곡하나 없는 흰 쌀밥을 보면 어쩐지 선자와 그녀를 떠나보내야했던 엄마 양진이 떠오를 것 같다.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는 애국자들이나 일본 편에 선 재수 없는 조선 놈들이 있는가 하면, 이곳에서나 또 다른 곳에서 그저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수많은 동포가 있었다. 결국 배고픔 앞에 장사 없는 법이었다. - 27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