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빛깔들의 밤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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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망각이 아니라, 마주함으로써 견디고 그로써 월경할 수 있다. 김인숙 작가의 <모든 빛깔들의 밤>은 슬픔에 대한 어떤 태도를 견지하게 하는 소설이 아닐까. 아이를 잃은 희중과 조안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미스테리는 흥미를 넘어, 우리 안에 고인 눈물에 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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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문학동네 청소년 27
유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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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중심, 변두리에게

 소설을 펼치니 내지에 들어 있는 이 한 문장. 으레, 사랑하는 연인 혹은 가족에게 바치는 문장이 놓이는 이 자리에 "내 삶의 중심, 변두리에게" 글을 바치는 이 작가는 누구인가. 표지의 날개를 보니, 그 어느 작가의 약력보다도 간략하지만 강렬한 약력. "1974년생. 서울 변두리에서 자랐다." 유은실.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일수의 탄생> 등 우리에겐 동화 작가로 친근한 그 이름. 그녀가 첫 청소년 소설을 냈다. 게다가 작가 유은실의 근간을 이루는 자전적 경험이 투영된 소설.

 80년대 초 도살장이 있던 서울의 변두리 황룡동을 배경으로,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 수원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란 어떠할까. 평론가 유영진의 말처럼, "이 소설은 이쯤에서 멈추겠지 싶은 순간 예상을 깨고 수면 밑으로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간다. 깊고 어둡고 황량한 심연을 마주하기 두려워 제발 이 정도에서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에도 작가는 고도의 수압을 감내하며 더 깊이 침잠한다." 유년기의 어둠을 있는 그대로 눈 앞에서 대면하고자 하는 작가의 힘에 이끌려 <변두리>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 근래 이처럼 강렬하고 서글픈 도입부를 보지 못했다.


 동생 꿈은 카우보이였다. 도살장 초원을 누비면서 새끼 돼지랑 송아지를 돌봐 줄 거라고, 눈을 반짝이며 말하곤 했다. 소랑 돼지가 늙어서 죽으면 도살장으로 실려 와. 죽을 때가 된 소랑 돼지도 도살장에 와서 평화롭게 눈을 감지. 그러면 도살장 카우보이들이 죽은 동물에게 묵념을 해. 그러고 나서 부위별로 나눠 파는 거야. 죽은 동물도 기쁠 거야.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니까. 아빠가 밥상머리에서 동생에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엄마랑 나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중략)

 "누나. 같이 가."
 뒤쪽에서 수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못 들은 척 계속 뛰었다.
 "같이 가자니까!"
 수길은 소리를 지르며 뒤쫓아 오더니 들통 손잡이를 확 잡아 당겼다.
 "앗!"
 나는 들통이랑 같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횡단보도 위로 선지 덩어리가 널브러지고, 그 위에 내가 널브러졌다. 덤으로 받은 양은 길 한복판에 빈대떡처럼 달라붙었다. 간 덩어리는 급정거한 차바퀴에 깔려 피를 튀기며 으깨지고 있었다.
 "어어 뭐여? 아침부터 재수 없게."
 "애들이 저런 걸 사다 먹나 봐, 불쌍해라."
 "동네가 후지니까 출근길에 별걸 다 보네."
 사람들은 선지, 양, 부서진 간 덩어리, 들통, 그리고 나를 피해 바삐 길을 건넜다.
 "선, 선지, 내 선지."
 나는 널브러져 있을 새가 없었다. 양에다 간까지, 일 년에 한 번도 얻기 힘든 귀한 덤이었다. 나는 흙 범벅이 된 선지 덩어리들을 그러모아 들통에 담았다. 바닥에 빈대떡처럼 달라붙은 양도 떼어 담았다.
 "수원아, 다친 데 없니?"
 영미는 들통 뚜껑을 주워 들고 뛰어왔다. 나는 영미 손에서 뚜껑을 뺏어 들고는, 흙 묻은 선지 덩이처럼 주저앉은 동생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켰다.
 "에이 썅!"
 나는 동생 머리채를 잡고 길을 건넜다. 수길은 도축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버르적댔다. 그럴수록 내 손아귀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병신 새끼가 뛰지도 못해!"
 나는 길을 건너자마자 동생 뺨에 따귀를 날렸다. 동생 얼굴은 금세 피범벅이 되었다.
 "씨발 새끼, 이 좆같은 놈! 야이 거지발싸개 같은 세상 빌어먹을 개자식아!"
 내 입에선 아빠가 술김에 뱉어 내던 지긋지긋한 욕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말을 더듬어 보지 않은 사람처럼 빠르게 터져 나왔다. 
 "신발이 커서 그랬어."
 수길이 울음보를 터뜨렸다. 동생 입에서 침에 섞인 풀빵 조각이 나와 발께로 떨어졌다. 나는 동생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작년까지 내가 신던 오로라 공주 운동화였다. 후룩후룩. 교통경찰이 저벅저벅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테두리만 남은 오로라 공주의 왕관 위로 선홍빛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떤 유년의 기억은 그저 순진하고 아름답기만 할 지 모르나, 유은실이 <변두리>에서 이끌어내고자 하는, 아니 돌파하고자 하는 기억들은 피냄새와 구린내로 가득한 도살장과 부속시장을 매일같이 오가던 수원과 그만그만한 살림살이를 한 이웃들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시인 김진경이 말하듯 "창작자는 세상과의 근원적인 불화 관계의 경험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이다." 창작자는 이른바 '원체험'이라 하는 자신과 세계 간의 불화의 기억을, 회귀를 통해 다시 대면하고 끊임없이 넘어서는 지난한 창작의 과정을 통해 이야기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다. 변두리, 이것은 80년대 초 황룡동에 살았던 수원이라는 아이 개별의 삶이나 창작자가 불화를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끌어안는 회귀를 감행할 때, 독자는 누구나 수원이 되고 수원의 어미와 아비가 되며 친구가 된다. 저 들통을 쥐느라 빨개진 손아귀가 아려 가만히 내 손을 쥐었다 펴보게 된다.

 어쩌면 문학에서 절실한 공감이란 오히려 아주 개별적이고 진솔한 개인 서사의 환기를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닐까. 나는 선지와 덤으로 얻은 내장을 담은 들통을 쏟은 수원 남매의 저 장면을, 무릎이 깨진지도 모르고 땅에 뒹구는 양을 허겁지겁 들통에 다시 넣는 수원의 모습을 선연히 떠올리며 내 가슴이 깨진 마냥, 한참 숨을 골라야했다. 불현듯 안녕을 고했다고 믿었던 나의 옛동네들이 되살아났고, 숨죽여 울어야 했던 밤들도 떠올렸던 것 같다. 유년의 기억이 양분을 삼는 것은 가족과 이웃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안온함이 아니라 그 테두리 밖에서 그들이 대면해야했던 세계의 흉포함이 아니었을까. 그 흉포함을 그들이 대신 막아주었다면 어린 내가 감당했어야 하는 것은 그네들이 세계와 대면하느라 미처 추리지 못한 수치심들이 아니었을까. 돌이켜 보니 따뜻하다 생각했던 내 유년의 기억은 부끄러움과 욕됨으로 번져 있다.

 넘어져 피범벅이 된 수원의 이야기는 이제 수길과 함께 하는 이산가족놀이, 초경과 몽정을 하지 않은 아이들이 첫 아카시아꽃을 따먹는 첫꽃날 행사로 이어지면서 황룡동 곳곳을 함께 따라 걷듯 생생하게 펼쳐진다. 작가 유은실이 대면하고 응시하고 있는 변두리는 비록 넉넉하지 못하고 상처로 가득한 남루한 기억일지 모르나, 그 안에서 말 그대로 지지고 볶으며 살아갔던 생들은 결코 남루하지 않다. 그들이 '없이 사는 사람', '피를 먹는 사람'이란 비난을 받는다해도, 그들이 갖고 있는 끈끈한 연대감은 적어도 사람, 적어도 우리는 사람이라는 그 별것아닌 마음이 있기에, 그들은 인면수심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보기 드문 고귀한 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손쉽게 '따뜻한 이야기'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문득 돌이켜보건데, 따뜻한 이야기란 무엇일까. 그저 이야기를 통해 안심하고 위로 받고 마는 것이라면, 그것을 정말 따뜻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변두리>를 따뜻한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야기가 아무리 따뜻한 무엇을 표명하고 떠들어 댄다 한들, 그 온도의 전이는 오롯이 읽는 이의 몫일 것이다. 아프게, 정말 아프게 변두리의 생을 응시하는 이 소설은 섣부른 위로나 석연치 않은 안심을 주고자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책장을 덮었을 때 몸에 마음에 감도는 이 따뜻한 온도를, 피가 도는 온도를 무엇이라 말하면 좋을까. 나 역시 변두리에서 자랐고 지금 내 삶의 중심이 변두리이기에, 사람, 적어도 우리는 사람이라는 그 마음 때문에 이토록 뜨거운 것은 아닌지.


 "천하장사 강수원, 빨리 가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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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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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 시절 전공이 국문학이었던 까닭에 종종 일어나는 해프닝이 있다.

 "그럼 내가 쓴 소설 좀 읽어볼래?"
 
 나는 보통 이럴 경우 "그럼..."을 들었을 때부터 있는 힘껏 표정을 밝게 한 채로 어떻게 그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할 것인지 떠올리는데('내가 무슨 자격으로...' 같은 걸로 쉽게 포기할 그들이 아니다) 꽤 애써 거절했음에도 그들의 글(원고)을 집어들고 오고야 마는 경우가 생긴다. 나는 정말이지 '내가 뭐라도 된다고 나한테 왜'라고 면전에서 쏘아붙이고 싶지만, 그들의 절박함을 보고 있자면 그마저도 쑥 들어가 버린다. 대체 소설을 쓴다는 게 뭐길래, 소설이 뭐길래, 소설가들은 이미 포화상태인 것 같은데 이렇게 모두가 소설가가 되고싶어 안달인 것일까?

 그런데 이젠 적어도 완곡한 거절을 하느라 진땀 빼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소설가 김연수가 쓴 <소설가의 일>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습작 상태의 소설 원고를 받을 때 이 책을 내밀면 되겠다.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소설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먼저 뭔가를 써야만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소설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리에 따라 먼저 뭔가를 쓰고 좌절하고 다시 쓰고 또 좌절하고 그럼에도 다시 쓰는 그 과정을 반복하다가 죽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_106쪽

 이 산문은 그래, 말 그대로 소설가가 쓴 '소설가의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목차부터 남다르다.

■ 제1부 열정, 동기, 핍진성
재능은 원자력 발전에 쓰는 건가요?
욕망에서 동기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 가장 힘들게 한다
플롯과 캐릭터보다 중요한 한 가지: 핍진성

■ 제2부 플롯과 캐릭터
다리가 불탔으니 이로써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
욕망의 말에 불타지 않는 방법은 조삼모사뿐
절망보다 중요한 건 절망의 표정 및 몸짓, 그리고 절망 이후의 행동

■ 제3부 문장과 시점
문장, 사랑하지 않으면 뻔해지고 뻔해지면 추잡해지는 것
펄펄 끓는 얼음에 이르기 위한 5단계
전지적 작가가 될 때까지 최대한 느리게 소설 쓰기

■ 마치는 글
그럼에도, 계속 소설을 써야만 하는 이유

 오해말라, 이 에세이가 '소설창작론'인 것만은 아니니. 작가 김연수의 위트있는 문장과 깊이 있는 통찰과 더불어 소설을 쓰는 일, 그 '자세'를 이야기하는 이 산문은 결국 어떻게 삶을 써내려갈(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까지로 뻗어나간다. 
 
인생 역시 이야기라면 마찬가지리라. 이 인생은 나의 성공과 실패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에 얼마나 대단한 걸 원했는가, 그래서 얼마만큼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느꼈으며 또 무엇을 배웠는가,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가, 다만 그런질문만이 중요할 것이다. 인생이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이 이야기가 계속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 질문에 대답해야만 하리라.
-43쪽
 
이 삶이 멋진 이야기가 되려면 우리는 무기력에 젖은 세상에 맞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단순히 다른 삶을 꿈꾸는 욕망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한다. 불안을 떠안고 타자를 견디고 실패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지금 초고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은 소설가에게 필요한 말은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하자는 것이다.
_55쪽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 하고 싶다면, 일단 해보자. 해보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달라져 있을 테니까. 결과가 아니라 그 변화에 집중하는 것, 여기에 핵심이 있다.
_98쪽

 기묘한 일이다. 소설을 쓰는 일이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일과 맞닿아 있다는 것. 아니 사실 기묘할 것 까지 없는 일이다.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편협한 시선을 가진 이가 좋은 소설을 쓸 수 없을 거란 우리의 확신(우리가 그렇게도 손사래를 치며 읽고 싶지 않았던 습작 소설의 주인들을 떠올려라)과 마찬가지로, 삶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적절한 객관화(자신과 타인을 염두하는)의 습관을 가진 이가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란 예상은, 우리가 이미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좋은(나쁘다의 반대로서 좋다가 아닌) 삶을 위시하며 그곳으로 나아간다'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소설가의 일>이란 비밀로 가득 찬 연금술의 정수 같은 것이 아닌, 열정을 성실성이란 주형에 붓고 오래도록 담금질한다는 범상한(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모르고 또 모를, 그래서 이러한 산문이 필요할 그 범상한) 삶의 진리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소설을 쓰고 싶다던 이들의 그 갈망에는 지금의 삶을 끊임없이 쇄신하고 더 나아가고 싶은 삶의 갈망이 담겨있던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이 문장처럼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하려고, 가 닿으려고 노력할 때, 그때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_262쪽

 그러니 매일 글을 쓰는 것으로 한순간 작가가 되고, 이 사이에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는 '소설가' 김연수의 말은 과장이나 허풍이 아니다. 삶을 진실되게 그리고 무엇보다 성실하게 성찰해 온 '사람' 김연수의 오랫 담금질이 얻어낸 깨달음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단한 광채로 빛나는 소설과 삶에 대한 깨달음. 

 그러니 누군가의 습작 소설을 거절할 때만 이 책을 건네주는 건 너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바로 나와 당신에게 필요한 책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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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시간 문학동네 청소년 26
김진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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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나 청소년 소설 <숲의 시간>은 '시간'을 소재로 펼쳐지는 판타지 소설이다. 빈부격차가 극도로 심화된 한 도시 크룽에서 시간이 부족한 부자들과 시간이 남는 빈자들 간에 '시간을 사고 팔 수 있다'는 상상이 더해지면서 소설은 우리의 현실을 투영한다.

 시간을 사고 판다는 상상이야 꽤 여러번 반복된 소재인지라 식상할 법도 한데, <숲의 시간>은 묘하게 흡입력이 있다. 시간이 은유하는 부의 격차가 빚는 비극을 서정적으로 아우르면서 솜씨좋게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오히려 나이든 어른 입장에서 울컥한 소설이다. 아이들을 잠시 가르친 경험과 무엇보다 나도 아이였던 경험에 비춰볼 때, 빈부격차의 그늘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드리운다. 세상의 더러운 꼴을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늦게 깨달았으면 하는 어른들의 마음과 달리, 아이들의 사회화는 체념과 함께 이뤄진다.
 <숲의 시간>에는 '크로노스 시간'이라 하여 빈자들이 판 시간을 부자들이 하루를 더 길게 쓰는 25시간, 26시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시간에 존재하는 자와 존재하지 않는 자들 간의 벽이 생기고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을 위한 가게, 문화들이 생겨난다.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판 빈자들은 유령이 되며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부자들은 또 다른 의미의 유령이 되는 세계, 그 세계는 디스토피아의 소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아이들과 어른들이 직면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그리고 우리 어른들이) 얼마나 상처받고 있는지, 그 비극을 선연하게 알리는 이 아름다운 소설, <숲의 시간> 연말이 가기전에 아이어른, 어른아이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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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 문학동네 동시집 32
서정홍 지음, 정가애 그림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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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를 바라보는 가장 고질적이고도 (정말) 나쁜 시선은 동시에서 '천진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읽을 것이기에 혹은 아이들이 쓰기에, 어른의 눈(마음)으로는 바라보지 못하는 의미들을 찾아낸 것이 동시의 가치라 말하는 시선들은 미안하지만, 진심으로 나쁘다.

 
 어른이 바라보지 못하는 무엇을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본, '티없는', '무구한'  동시로 인해 감화되는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어른'이라 분류된 당신들의 오만함이 세계를 그토록 순진하게 재단하는 것이 아닐까. '티없이 순진하고 무구한' 동시의 세계를 이야기할 수록, 그 시선은 아이들의 세계를 어른의 방식으로, 폭력적으로 재단할 뿐이다. 아이들이 알 것을 제한하고 느껴야 할 것을 강제하는 것이다. 착한 아이란 어른 입맛에 맞춰진 허구의 모델을 강요하고, 아이의 잠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눈에 맞춰 바라본 세상은 동화 속 세상이 아닌, 어른이 공유하고 있는 그 세계와 같다. 아이들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천진한 동시라는 표현은 문제의식이 결여된, 분리된 세계관을 주입하는 정치적인 제스쳐일 뿐이다. 과장이 아니다.
 
 그렇다면 좋은 동시는 무엇일까? 그 좋은 예로 기형도의 <엄마 생각>이 있다. 그것이 동시를 표명하고 있지 않다해도, 채소장사 하는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나날을 기다리며 자란 아이의 상처받은 마음을 이야기하는 이 시는. 아이의 시선에서 빈곤에 대해, 소외된 이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서정홍의 동시 <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

드라마 보조  출연자를 엑스트라라고 해.
어떤 사람들은 노가다라고도 해.
그냥 일용직 노동자야
날마다 일거리가 있는 게 아니거든.
 
(...)
 
우리는 하도 추워서
슬쩍 자리를 옮기려다 들켰어.
"캇!"하는 소리와 함께
욕설이 화살처럼 막 날아와.
"이 새끼들아, 지금 촬영하고 있는데
송장이 움직이면 어쩌자는 거야!"
이런 말 한번 듣고 나면
하루 내내 살맛이 안 나.
 
(...)
 
"야, 주인공은 아니래도
텔레비전에 나오니까 기분은 좋다야."
"이 사람아, 영화고 드라마고
무어 주인공이 따로 있나.
나오는 사람이 모두 주인공이지."

_서정홍, <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 드라마 보조 출연자 진수 삼촌>
 
 단역배우라는 직업을 조망함과 동시에 '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라며 이 세상을 바라보는, 아니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이 동시를 두고 천진함만이 동시의 미덕이라 말할 수 있을까. 길게 말할 것 없이, 좋은 동시는 아이들에게 문제의식과 넓은 세계관을 건네준다.
 
 서정홍 시인은 동시집만 이번이 다섯권째이다. 그의 동시가 유독 좋은 것은 아이들의 세계가 아닌 우리가 함께 사는 세계를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시가 회복해야할 것은 천진성이 아닌 동시대성이지 않을까. 
 
택배 기사 삼 년째야.
일거리가 많을 때는
하루 백오십 군데나 배달을 가야해.
말이 쉬워 백오십 군데지
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파김치가 되어 발 씻기도 귀찮아
그냥 곯아떨어질 때도 많아.

얼마 전에는 산골에 사는 할아버지가
도시에 사는 딸한테 보내는 홍시 상자에서
물이 줄줄 흘러나와 전화를 걸었어.

"할아버지, 상자 안에서 홍시가 터져 엉망이에요.
어쩌면 좋겠어요?"
"허어, 그라모 자네가 드시게.
다시 한 상자 보내지 뭐."
"이렇게 귀한 홍시를 제가 어떻게 먹어요?
상자 열어 보고 안 터진 홍시만 골라
따님한테 전해 드릴까요?"
"아이구우, 그래만 주모 얼마나 고맙겠노."
 
바쁜 시간을 쪼개어 홍시를 가려
다른 상자에 담아 배달하러 갓찌.
할아버지 따님이 아파트 문을 조금 열고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문 앞에 두고 사라는 거야.
하기야 고맙다는 말 듣자고 
한 짓이 아니니 서운할 것도 없지.
 
택배 기사 삼 년 하다 보니
가끔 좋은 사람을 만날 때도 있어.
 
어제는 쌀 다섯 포대를
승강기도 없는 옛날 아파트 5층까지
갖다 드렸는데 말이야,
할머니가 생강차를 주시는 거야.
몸에 좋다고 주시는데
아무리 바빠도 그냥 갈 순 없잖아.
날씨는 덥지 생강차는 뜨겁지,
다 마시고 났더니 온몸에 열이 푹푹 나는 거야.
 
오늘은 텃밭 넓은 집 할머니가
아무리 바빠도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라며
한사코 밥 한 그릇 먹고 가라 하시고,
주공 아파트 아주머니는 
밤늦은 시간까지 얼마나 고생하느냐며
박카스를 주기도 하시고.......
 
이런 분을 만난 날에는
하루 종일 쌓인 피로가 싹 가시고
몸이 가벼워지지.
세상에 마음이 얼음장 같은 사람보다
봄날처럼 따뜻한 사람이 많구나 싶어.
 

_서정홍, <따뜻한 사람들 - 택배 시사 효민이 아저씨>


서정홍,주인공이무어,따로있나,문학동네,동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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