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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평점 :
얼마만의 신간인가. 꼭 필요한 책을 사는 김에 넣었다. 처음에 한 문장을 본 이후로 계속 기억에 남아 있어서 장바구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 문장이었다.
전쟁의 비극은 철로 된 무기나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죽은 연인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 젊은 여성의 젖은 눈동자 같은 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전쟁이 없었다면 당신이나 나만큼만 울었을 평범한 사람들이 전쟁 그 자체니까. (13쪽)
자꾸 눈길이 가는 소설이다. 뭔가 <아무도 아닌>을 봤을 때와 비슷하고도 또 다른 느낌이랄까. 특별한 재능은 있는 사람이, 소위 말하는 영웅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는 이야기다. 어쩌면 얼핏 지나가며 들어본 적 있을 법한. 여러 작품 중에서 ‘빛의 호위’, ‘사물과의 작별’, ‘잘 가, 언니’가 마음에 들었다. 소곤소곤 조용히 누군가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이다. 올해의 책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 예감이 맞았다. 2017년이 다 가기 전에 또 어떤 책을 읽게 될 지 기대가 크다.
사라졌으므로 부재하지만 기억하기에 현존하는 그 투명한 테두리의 공간 바깥으로는 바람이 일었다. (69)
엄밀히 말하면 그 이야기는 유실물을 사용한 누군가의 손때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누군가를 잃어버린 유실물은 선반의 고정된 자리에서 과거의 왕국을 홀로 지켜가는 것이다. (73)
우리는 그 문장이 빠진 그들의 결여된 이야기를 지붕 위로 펼쳐지는 별들의 수신호처럼 상상의 영역에서 해독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신념은 나의 것이기도 하다. 개인은 세계에 앞서고,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억압할 수 없다. (111)
용서할 수 없었던 그 무력한 시절은 어느날엔 단 하나의 진실처럼, 또 다른 날엔 악의적인 거짓말처럼 끊임없이 그에게 되돌아왔을 것이다. (113)
생존은 스스로 해결하되 세상이 인정하고 우대해주는 직업에 연연하지 말라고, 눈 가린 말들처럼 정해진 트랙을 달릴 필요 없다고, 종강 즈음이면 한 학기를 정리하며 그녀는 학생들에게 말하곤 했다. 속된 세계로의 편입을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지키는 한 어떤 형태의 가난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다고도 했다.(124)
훗날 백발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에 이른 할머니의 큰언니는 다행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고 해요. 늙어서, 잊어가고 있어서,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126)
한 사람은 죽었고 그 사람이 있던 자리는 머리카락 한올 남지 않은 공백뿐인데, 왜 나는 아직 살아남았고 계속해서 살아야 하는가. (127)
동질감을 느꼈다. 아니, 느끼고 싶었다. 악의적인 운명에 단 하나였던 우주를 빼앗긴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는 믿음이, 그것이 공동의 현상이라는 증거가, 그때는 위로가 됐다. (128)
서른살 이후로 당신은 더이상 나이 들지 않고 있으니 서른여덟살의 저는 이제 당신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되어버린 셈이군요. 그렇다면 당신의 사라진 미래는 저 차창 안에 있는 건가요, 저토록 좁고 어둡고 고독한 곳이 당신이 있는 곳인가요, 말해주세요. 그곳에선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내리지 않는다고, 그래서 비에 젖어 추워할 일도 없으며 발이 사라지지도 않다고, 그곳은 그런 곳이라고…… (156)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랄지 존재감이 거주하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여긴 뭐든지 너무 빨리 잊고,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 (202)
상처는 영혼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강박적인 성실함으로 영혼을 좀먹는다. 상처를 이겨내면서 성숙해졌다는 말은 균이 살아온 세계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239-240)
어떤 이야기도 한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생애에는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 표현되는 순간보다 더 훨씬 더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다.(작가의 말,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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