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 P7
한 연구자는 자신의 책에서 그 짧은 묘비명이 ‘서슬 퍼런 상징‘이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 식 글쓰기 사이에 가로놓인칼- 믿었던 그와는 달리, 나는 그것을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 P7
그 ‘서슬 퍼런‘ 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失明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 P8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ㅡ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 P14
그녀의 삶이 격렬하게 양분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녀 자신뿐이었다. 일기장 뒤에 적어가던 단어들은 스스로 꿈틀거리며 낯선 문장을 만들었다. 꼬챙이 같은 언어들이 시시로 잠을 뚫고 들어와, 그녀는 한밤에도 몇 번씩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잠이 부족해질수록 신경은 위태롭게 예민해졌고,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때로 달궈진 쇠처럼 명치를 눌렀다. - P15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P15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침묵은 예전처럼 따스하지도, 농밀하지도, 밝지도 않다. 처음의 침묵이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예전에는 물속에서 어른어른한물 밖의 세계를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딱딱한 벽과 땅을 타고 다니는 그림자가 되어 거대한 수조에 담긴 삶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것 같다. 모든 언어가 낱낱이 들리고 읽히는데, 입술을 열어 소리를 낼 수 없다. 육체를 잃은 그림자처럼, 죽은 나무의 텅 빈 속처럼, 운석과 운석 사이의 어두운 공간처럼 차고 희박한 침묵이다. - P19
‘세상은 환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 - P26
질끈 묶은 검은 머리채와 다갈색 피부도 보기 좋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이었습니다. 고독한 노동으로 단련된 사람의 눈. 진지함과 장난스러움, 따스함과 슬픔이 부드럽게 뒤섞인 눈. 무엇이든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일단 들여다보겠다는 듯, 커다랗게 열린 채무심히 일렁이는 검은 눈. - P35
무거운 안경을 벗어들고,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흐릿한 세계를 둘러봅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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