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의 지성 생명체를 처음으로 발견했다는 흥분감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무리인들에게는 낯선 생명체와의 조우가 놀랍지 않은 일인 걸까? 희진이 다른 행성에서 왔을 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그들에게도 있을까?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광대한 우주에서 고독한 스스로의 위치를 인식하고, 타자와의 조우를 갈망하는 그 자체가 고도의 자기 인지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일까. 무리인들은 아직 그 정도의 철학과 자아 개념을 발명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점점 회의감이 생겼다. 희진은 문자 언어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협곡을 몰래 살펴보았지만, 문자로 보이는 것은 찾지 못했다.
낮에는 무리인들을 따라 다니며 셔틀의 신호를 찾고 밤에는 아무런 소득 없이 잠드는 날이 계속되었다. 놀라운 발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발견의 의미조차 제대로 알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희진은 학자였다. 알아내고 분석하는 것이 본래의 업이었다. 그러나 지금 어떤 도구도 없는 이곳에서 희진은 너무나 무력했다. 만약 일이 제대로 풀렸다면 희진은 탐사선의 수많은 장비들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언어 분석프로그램은 가청주파수를 넘어서는 음파들로부터 반복되는 패턴을 읽고 무리인들의 언어를 분석해줄 것이다. 무리인들이 오늘의 사냥과 열매들의 위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지, 그들의 거주지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생명체에 대해서는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지금 희진에게 있는 것은 희진의 신체와 감각뿐이었다.
몇 주 뒤에 희진은 황무지에서 부품 하나를 주웠다. 아주 작은 금속 부품이었다. 탈출 셔틀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서였다. 황무지에 부는 강한 바람에 휩쓸려 굴러온 것일 테니 셔틀이 근처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행성 어딘가에 아직 셔틀이 있다면, 분명 언젠가는그 셔틀을 찾아낼 수도 있다.
"루이, 나 드디어 찾았어."
희진은 부품을 손에 잡고 흔들며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괜히 루이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루이는 희진을 응시하며 무언가 긴 소리를 냈지만 희진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뒤에 루이는 다시 바위 위의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말이 통할 리가 없지. 부품에 호기심이라도 가져주면 좋을 텐데. 낯선 기계 부품을 보여주면 루이가 궁금해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희진은 내심 실망했다.
그날 저녁 루이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열매를 가지고 나타났다. 희진이 놀란 표정을 짓자, 루이는 희진이 부품을 숨겨놓은 주머니를 가리켰다. 마치 희진에게 좋은 일이생겼음을 축하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의미가 조금이나마 전달된 것일까? 희진은 무척 기뻐서 루이를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루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희진은 무리인들에게도 비언어적 표현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체적인 의미 전달은 어려웠지만 그들의 표정과 동작을 통해서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을 구분할 수 있었다. 루이 역시 희진을 처음보다 더 능숙하게 대했다. 처음에는 루이의 손에 붙잡히는 것만으로도 멍이 들었다. 단단한 피부를 가진 그들에 비해 희진이 쉽게 다친다는것을 루이가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이제 루이는 훨씬 약한힘으로 희진을 잡았다. 루이 외의 다른 무리인들도 더는 처음처럼 희진을 위협하지 않았고, 때로는 채집 중에 나타난 다른 생물로부터 보호해주기도 했다. 친절함, 배려, 상냥함. 인간이 갖는 긍정적 특성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무리인들도 갖고 있었다.
무리인과 인간 사이의 공통점만큼 이 행성과 지구의 생태에도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행성에서의 생명체 진화가 지구와 독립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공통점들은 매우 놀라웠다. 무엇보다도 희진이 행성에 있는 열매들과 사냥의 산물들을 섭취하면서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행성과 지구 생물들의 생화학적 기본 요소들이 일치한다는 증거였다. 어쩌면 이 행성은 미 생물-외계생명 씨앗 가설을 증명하는 현장일지도 모른다. 우주먼지를 통해 퍼져나간 지구의 고대 미생물이 다른 행성에서 생명의 근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행성의 생명체들과 인간은 공통 조상을 지니게 된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수록 가슴이 벅찼다. 더 많은 것을 알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은 탈출 셔틀을 먼저 찾아야했다. 희진의 신변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행성에 관해 아무리 많은 사실을 알아내더라도 소용이 없다. 그 사실을 전달받을 사람이 없을 테니까.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먼저찾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기술의 도움을 받아서 이 행성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좌절과 결심을 반복하며 희진은 셔틀의 신호를 추적했다. 무리인들이 쓰는 잎종이를 얻어 동굴 거주지 근처의 지도를 그렸다. 무리인들은 매번 다른 곳을 향해 사냥과 채집을 떠났고 덕분에 지도의 영역은 점점 더 확장되었다. 신호는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두 번째 흔적을 찾기까지는 몇 달이 더 걸렸다. 셔틀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는 아니었다. 황무지에서 발견한 두 번째 부품이었다. 아마도 첫 번째 부품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곳에 도달했을 부품, 하지만 그건 불길한 암시에 가까웠다. 강한 바람에 탈출셔틀이 부서지는 중이라면 셔틀을 늦게 찾아낼수록 구조 가능성은 낮아질 것이다. 희진은 부품을 꽉 쥐었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믿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없는 모래 위를 더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두 번째 부품을 들고 방에 돌아온 희진은 동굴 안의 한기를 느꼈다. 루이가 바위 앞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희진은 루이가 그렇게 잠든 모습을 처음 보았다. 작업중이던 그림이 루이의 상체 아래에 깔려 있었다. 도구들은 엉망진창으로 흩어져 있고, 염료는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희진은 그 자리에 굳었다. 루이는 잠든 것이 아니었다.
루이는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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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을 마시면 늘 그렇듯이 입가가 기분 좋게 무감각해졌고, 이대로 가다가는 술김에 너무 많이 떠들어댈 위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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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는 델피와 함께 지구에 남았어. 그리고 델피와 분리주의에 저항했지. 그녀의 어머니, 릴리가 지구에 남긴 흔적을 조금이라도 바꾸어보려고 애썼던 거야.
어쩌면 지구로 떠나기 전, 올리브가 마을에 남긴 마지막 흔적이 바로 이 순례의 관습인지도 몰라. 우리는 자라면서 바깥세계에 관한 호기심을 느끼고 이 평화로운 마을 외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기를 갈망하게 돼. 그리고 마침내 순례의 길에 오르지.
올리브는 그렇게 우리가 반드시 한 번은 이 세계를 떠나도록 만들었어.
지구에서 그 모든 것을 보고 우리가 무엇을 외면해왔는지, 우리가 우리만의 아름다운 마을에서 살아가는 동안 저 행성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고 오라는 의미였겠지.
그럼 이제 한 가지 질문만이 남았어.
정말로 지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곳이라면, 우리가 그 곳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 오직 삶의 불행한 이면이라면, 왜 떠난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을까?
그들은 왜 지구에 남을까? 이 아름다운 마을을 떠나 보호와 평화를 벗어나, 그렇게 끔찍하고 외롭고 쓸쓸한 풍경을 보고도 왜 여기가 아닌 그 세계를 선택할까?
소피, 우리가 왜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지를 생각해 본 적 있어? 시초지의 역사를 배우며 그렇게 많은 과거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이 마을에서 자란 이들이 서로 연인이 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같은 자궁에서 태어나 자매처럼 자란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낭만적 감정도 성애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단지 우연이기만 할까?
지구에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수없이 많겠지.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이 모든 이야기들을 믿을 수 있어?
진실을 알아내고 나서부터 나는 매일 밤을 새워 지구를, 순례자들의 생애를 상상했어.
순례자들은 누구를 사랑했을까. 그들은 남미에, 서부 미국에, 인도에, 모두 흩어져서 살겠지. 그들은 아주 다채로운 모습으로 여러 방식의 삶을 살겠지. 하지만 그들이 어떤 모습이건 순례자들은 그들에게서 단 하나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찾아냈겠지.
그리고 그들이 맞서는 세계를 보겠지. 우리의 원죄. 우리를 너무 사랑했던 릴리가 만든 또 다른 세계. 가장 아름다운 마을과 가장 비참한 시초지의 간극. 그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함께 완전한 행복을 찾을 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순례자들은 알게 되겠지.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편지를 쓰는 지금도 나는 계속 생각해. 우리 이전의 순례자들은 지구를 조금이라도 바꾸어놓았을까? 그곳은 올리브가 갔던 수백 년 전만큼이나 여전히 비탄과 고통으로가득 차 있을까? 분명 세계 곳곳에는 순례자들의 흔적이남아 있을 텐데, 그들은, 릴리와 올리브의 후손들은 세계를 바꾸기 위해 무엇을 했을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직접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어. 궁금해서 더 기다릴 수가 없었지.
소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할 것이 남았어. 내가 처음으로 마을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던 계기, 그 오두막 뒤에 있던 귀환자 말야. 정해진 성년식보다 조금 더 빨리 지구에 가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그 남자에게 몰래 찾아가 물었어. 혹시 지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그는 슬픈 진실을 말해주었지. 지구에서 그가 사랑했던 사람과 그의 쓸쓸한 죽음에 관해. 그가 남겼던, 행복해지라는 유언에 관해.
나는 말했어. 당신의 마지막 연인을 위해 당신이 할 수있는 일이 있지 않겠냐고. 나는 그에게 지구로 다시 함께가겠냐고 물었어.
떠나겠다고 대답할 때 그는 내가 보았던 그의 수많은 불행의 얼굴들 중 가장 나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소피, 이제 내가 먼저 떠나는 이유를 이해해줄 거라고 믿어.
그럼 언젠가 지구에서 만나자.
그날을 고대하며.
데이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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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슬픔을 알지만 그럼에도 지속적인 갈등과 고통, 불행은 왜 항상 상상의 개념으로만 남아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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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릴리가 지구에서 사라지기 전 남겼던 마지막록이자, 혼란과 고통에 관한 기록이었다.
릴리는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증오한 것으로 보인다. 릴리에게는 나와 같은 질환, 얼굴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흉측한 얼룩을 남기는 유전병이 있었다. 마을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릴리의 얼룩이 특별한 정보값을 갖지 않는 하나의 특성일 뿐이었지만 지구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릴리를 마음껏 멸시하고 혐오할 수 있는 하나의 낙인이었다.

이민자의 딸, 그리고 흉측한 외모를 가진 음침하고 삐쩍마른 소녀. 릴리는 생애 초반기에 어느 누구와도 제대로된 관계를 맺지 못한 듯했다.
릴리는 스스로를 괴물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병을 가지고도 그대로 태어난 것은 부모의 잘못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릴리의 부모는 가난했고 병원에서 권유하는 유전병 사전 진단을 전혀 받지 않았다. 사전 진단 에서 해당 질환이 정말로 발견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릴리는 모든 문제가 자신이 태어나기로 결정된 그 순간에 있다고 생각했다.

릴리가 하필 인간배아 디자인에 손을 대게 된 계기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이유를 짐작할 수는 있다. 릴리는 태어나는 아이에게 아름다움을, 아무런 병도갖지 않고 오직 뛰어난 특성들로만 구성된 삶을 선물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종의 선행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릴리의 배아 디자인 연구는 세상을 배제의 층계로 나누었을 뿐이나, 릴리는 어느 시점까지는 자신의 일에 관해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다. 릴리는 자신이 하는일이 옳은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릴리는 ‘처음으로 아이를 갖고 싶어졌다‘라고 쓰고 있다. 그 전까지 누구와도 연인 관계를 맺은 흔적이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았던 릴리가 왜 갑자기 아이를 원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릴리의 심경 변화로 보아 그녀는 오직 혼자서만 도망치는 삶에 싫증이 난 것으로 보인다. 바이오해킹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모은 릴리는 부유했고, 뛰어난 해커인 그녀를 단지 외모만으로 멸시할 사람들은 이제 주위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녀의 삶은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릴리에게 아이를 만드는 일은 아주 쉬웠다. 릴리는 먼저 자신의 클론 배아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릴리가 그녀 자신에게 주고 싶었던 가장 좋은 특성들, 아름다움과 지성, 호기심과 매력을 모두 유전자에 새겨 넣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인공 자궁에 조심스럽게 옮겼고 발생 과정의 모든 유전학적 노이즈를 섬세하게 통제했다.
그리고 내가 생겨났다.

릴리가 나의 ‘결함‘을 눈치챈 것은 발생 초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디자인이 예정대로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는 전체 프로세스에 항상 포함되는 과정이었다. 실수는 늘 일정 비율로 일어났고 그것을 처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배아는 배아일 뿐이다. 폐기하고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인간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존재를 폐기하는 것은 릴리에게 어떤 종류의 죄책감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릴리는 내가 그녀와 똑같은 유전병을 가진 것을 알았을 때 나를 즉시 폐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릴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릴리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나의 결함을 발견한 순간 이후에 남아 있는 릴리의 기록은 제대로 해독하기가 어렵다.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은 단한 줄이었다.
릴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로써 나는 태어날 가치가 없었던 삶임을 증명하는가?‘
릴리는 나에게서 스스로를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원치 않았던 존재로 태어난 릴리, 세계에서 배제된 릴리. 그러나 악착같이 살아남아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가 능성을 입증한 릴리 다우드나.
그녀의 결정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도 나는 모르겠다. 릴리는 자신의 삶을 증오했지만, 자신의 존재를 증오하지는 못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릴리가 발생 과정 중에 있었던 나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릴리가 나를 폐기해지 않은 것은 내가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성의 문제였다. 어떤 존재에게 살아갈 권리가 부여되는가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결국 릴리는 나에게 태어날 가치가 없다는 낙인을 찍지 못했다. 그건 릴리 자신의 문제이 기도 했기 때문이다.
‘바이오해커 디엔이 활동을 그만두고 완전히 잠적한 것은 그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다음의 일은 아주 막연한 기록들로만 추측할 수 있을뿐이다. 릴리는 기계 속에서 성장 중인 나를 냉동시켰다. 계획이 성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것이다. 릴리는 그 전까지의 배아 디자인 연구들을 모두폐기했다. 이미 미국 전역에 퍼진 신인류들의 탄생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 자신이 만들어낸 연구 결과의 원본은 모두 사라졌다. 릴리는 대신 새로운 유전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굴에 흉측한 얼룩을 가지고 태어나도, 질병이 있어도, 팔 하나가 없어도 불행하지 않은 세계를 찾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세계를 나에게, 그녀 자신의 분신에게 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신인류가 아니라,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지 않는 신인류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로만 구성된 세계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지구 밖에 ‘마을‘이 존재하는 것은 그녀의 연구가 성공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내가 마을에 살았을 때, 나는 사람들이 나의 얼룩에 관해 무어라고 흉보는 것을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 나는 나의 독특한 얼룩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마을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결점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마을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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