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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내면이 아이의 세상이 된다 - 소아정신과 최고 권위자 대니얼 J. 시겔의 40년 연구 결실을 담은 9가지 육아 법칙
대니얼 J. 시겔.메리 하첼 지음, 신유희 옮김 / 페이지2(page2) / 2025년 4월
평점 :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부모의 내면이 아이의 세상이 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부모는 단순히 '부모'라는 이름만으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아이와 함께 배우고 성장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육아는 본능이 아닌 배움의 연속이며, 특히 이 책에서 강조한 “공감하며 듣고 소통하는 법”은 그 핵심이자 출발점이다.
『부모의 내면이 아이의 세상이 된다』 이 책 속 문장을 마주하는 순간, 지난 몇 년간의 내 삶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워킹맘이다. 어쩌다 보니 아이가 세 살이 되던 시점부터 떨어져 지내게 되었고, 아이가 일곱 살이 되어서야 다시 곁에서 함께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아이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일곱 살이지만 언어 발달은 네 살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다. 세 살 때만 해도 나를 보면 까르르 웃으며 사진 찍을 때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던 그 아이는 더 이상 없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제 와 돌이켜보면, 엄마의 부재 속에서 자란 우리 아이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공감’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를 이해하고 교감하며 상호작용해야 할 시점에, 아이 곁에는 텔레비전과 핸드폰만이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도 부족했고, 하필 코로나 시기까지 겹쳐 어린이집 생활도 충분하지 못했다. 아이의 발달 문제를 인식한 후, 각종 기관과 센터를 전전하며 바로잡으려 노력했고, 지금은 많이 좋아지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에게는 친구에 대한 과도한 질투심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다. 놀이터에서 자주 어울리는 친구 두 명이 자신을 빼놓고 논다는 얘기만 들어도 집을 뛰쳐나가 “날 왕따 시키지 마!”라며 큰소리로 항의하곤 한다. 또 친구를 집에 초대하면 자신이 아끼는 장난감과 간식까지 모두 내어주며 비위를 맞추려 애쓴다. 이 같은 아이의 태도는 늘 나를 고민하게 만든다. 심리 상담도 여러 번 받아봤지만, 결국 부모가 일상 속에서 자주 조언하고 가르치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들을 뿐이었다. 말로 쉽게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던 중 이 책의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챕터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저자는 아이의 문제 행동이 단순한 고집이나 반항이 아니라, 반복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치유되고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접근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나의 아이에게 대입해보니, 친구라는 존재 자체가 아이에게 일종의 트라우마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기의 대부분을 친구 없이 지낸 아이에게, ‘친구’라는 존재는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을 수 있다.
『부모의 내면이 아이의 세상이 된다』 이 책에서는 아이에게 일관된 정서적 안정과 생리적 균형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다소 추상적인 개념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결국은 아이의 감정을 인정하고, 부모가 그 감정에 조율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혼란스럽고 두려운 경험을 할 때, 이를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 바로 그것이 부모의 몫이다. 아이의 속상한 마음을 충분히 들어주고, 그 감정을 스스로 이해하고 다룰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공감해줘도, 같은 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아이가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것은, 그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의 분노와 질투, 경직된 행동은 본능적인 반응에서 비롯되며, 이는 부모의 조율 없이는 개선되기 어렵다.



『부모의 내면이 아이의 세상이 된다』 이 이 책은 단순히 육아 방법을 지시하거나 조언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이의 발달과 감정, 뇌 발달에 이르기까지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매우 설득력 있다. 덕분에 나 스스로도 내 아이를 더 깊이 이해하고, 보다 효과적이고 따뜻한 접근법을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육아에 있어 정답은 없지만, 방향을 제시해주는 이 책은 분명히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지침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