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 신화와 전설
찰스 스콰이어 지음, 나영균.전수용 옮김 / 황소자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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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에서 나온 켈트 북구의 신들보다 더 내용이 상세하고 방대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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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arthaginians 6th–2nd Century BC (Paperback)
Andrea Salimbeti / Osprey Pub Co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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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 군대에 대한 좋은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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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World Atlas (Hardcover)
Inc. Dorling Kindersley / Dk Pub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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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크기의 두께와 압박... 세계 지도 좋아하는 나한테는 더없이 훌륭한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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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부' 이승만 평전 -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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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신명기 13장 6~9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여러분의 형제나 자녀나 사랑하는 아내나 여러분의 가장 친한 친구가 이방 민족의 신들을 섬기자고 은근히 유혹하여도, 여러분은 그런 자를 사정없이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1950년 9월 22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공식 기자회견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공산당이었다면 부모 형제라도 용서하지 말고 처단해야 할 것이다."

 

시대순으로 본다면 저 구약성경이 쓰여진 때와 이승만의 발언은 약 3천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두 지문에 담긴 핵심적인 뜻은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타자에 대한 지독한 불관용과 배타성, 그리고 "내 편이 아니면 적이니까, 모두 죽여라!"는 극단적인 잔인함과 인명경시.

 

구약성경과 이승만이 무슨 상관이냐고? 당연히 상관이 있다.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종교가 기독교고, 이승만은 평생동안 독실한 기독교인(개신교인)이었거든. 그리고 지금 이승만을 국부라고 추앙하려 하는 뉴라이트 구성 인사들도 대부분 개신교인이거나, 아니면 개신교 교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구약성경의 저 구절을 신의 가르침이라고 믿은 유대인들은 이방 신을 섬기는 다른 부족들에게 잔인한 학살을 자행했고, 유대인들처럼 구약에 담긴 배타성과 폭력성을 숭배했던 이승만도 평생에 걸쳐 자신을 편들지 않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지독한 보복과 폭력으로 일관했으니까.

 

이승만의 배타성과 폭력성은 그의 일생에 걸쳐 일관되게 반복된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인 독립운동가 시절에도, 참여하는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마다 다음과 같은 일을 저질렀다.

 

1. 그가 최고 지도자가 되거나

2. 아니면 그 독립운동 단체는 내분으로 갈기갈기 와해되던가.

 

쉽게 말해 이승만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대상은 폭력으로 보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그가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 신생 독립 국가인 한국의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승만은 결코 좌익 계열 인사만 탄압한 것이 아니었다. 반공 성향의 우익 인사들도 이승만에게 반대하거나 밉보이면 결코 무사하지 못했다. 좌익 인사들을 색출해 구속시키는 일로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던 검사인 선우종원도 이승만의 정적인 장면의 비서실장을 지냈다고 황당하게도 공산당으로 몰려, 일본으로 밀항해 8년 동안 숨어 살아야 했다. 엄연한 우익 인사인 조병옥은 이승만이 추진한 반공 포로 석방 작업에 반대하자, 심야에 쇠뭉치로 머리를 맞고 실신하는 테러를 당했다. 이 사건으로 조병옥은 기억력을 거의 상실해 폐인이 될 지경에 이르렀고, 육군형무소에 갇혀야 했다. 덧붙여 이승만이 이정재 같은 정치 깡패들을 총애하고 그들이 마음껏 서울 한복판에서 설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이처럼 이승만은 자신의 눈에 거슬리면 고위 정치인이라고 해도, 서슴치 않고 테러를 자행했던 것이다. 오늘날 이승만을 숭배하는 뉴라이트들은 이승만이야말로 정치 깡패를 동원한 테러를 즐겼다는 사실에 대해선 뭐라고 말할까.

 

그렇다면 이런 이승만을 한국인들은 진심으로 존경하고 숭상했을까? 그렇지 않다.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이승만이 소속된 여당은 완전히 참패를 당했다. 전체 국회의원 당선자들 중 60%가 무소속이었고, 전체 당선자의 80%가 반 이승만 성향의 중도 인사들이었다. 1948년 8월 15일에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출범한지 고작 2년 만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미 진작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승만으로부터 등을 돌렸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승만을 보는 대다수 국민들의 눈은 곱지 않았다. 1954년 10월 11일 한국일보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무려 78.8%가 이승만이 연임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 여론조사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우리는 더 이상 이승만 당신이 대통령 하는 것을 원치 않으니, 대통령 더 해볼 생각 말고 임기 끝나면 바로 물러가라고. 만약 뉴라이트가 말하는 대로 이승만이 훌륭한 지도자였거나 혹은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면, 왜 78.8%의 반대가 나왔을까? 오히려 이승만이 대통령 한 번 더 해달라고 찬성을 해야 할텐데.  

 

이처럼 이승만은 민심을 얻지 못했고, 그래서 지지 기반이 불안정했다. 흔히 이승만은 강력한 독재자라고 여겨지지만, 그는 이후에 들어선 박정희나 전두환과는 전혀 달랐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비교적 안정적인 집권 기간을 보냈던 것에 반해, 이승만은 그렇지 못했다. 한 예로 박정희와 전두환은 집권 기간 도중, 공권력을 동원해 조폭이나 깡패들을 철저하게 소탕해 버렸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렇지 못했다. 소탕은커녕 오히려 조폭과 깡패들을 지원하고 옹호하면서,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일개 깡패인 이정재가 이승만이 속한 여당의 지원을 받고 국회의원이 되어 보겠다며 선거에 출마할 정도였으니까.

 

무엇이 이런 차이를 불렀을까? 우선 이승만은 오랫동안 조선을 떠나 미국에 살아서, 국내에 인맥이나 세력 기반이 없었다. 이승만이 국내의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친일파 처벌 기관인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친일파들과 손잡고 그들을 기용해 준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의 권력 기반이 약하니, 당시 국내에서 많은 부와 권력을 지닌 친일파의 힘을 빌어서, 그들의 지지를 받고 권력을 다지겠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또한 박정희나 전두환은 군부를 확실히 장악했고, 그래서 깡패들을 소탕할 수 있었지만 이승만은 그조차도 못했다. 이승만은 군인들에 대한 처우를 형편없이 해주었다. 군인들이 월급이 너무 적다며 올려달라고 해도, 군인은 국가에 봉사하는 직업이라며 거부했다. 그래서 수많은 군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일반 병사들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고위 장교들도 생활고에 찌들어 봉급만 받아서는 가족들을 굶기기에 딱 좋았다. 한국전쟁에서 부상을 당하고 제대한 상이군인들도 국가로부터 푸대접을 받았고, 거지 신세로 전락했다. 그로 인해 한국 군부에는 자신들을 냉대하는 이승만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가득했다. 박정희가 주동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 배경에도 바로 이런 요소가 깔려 있었다. 아, 참고로 박정희는 원래 장면의 민주당 정권이 아니라,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을 몰아내려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박정희가 이승만을 뭐라고 평가했는지 보자.

 

 

"해방 직후 이 땅에 무려 수십여 개나 되는 정당이 비 내린 뒤에 돋아나는 참대 순처럼 어지럽게 돋아나 결국 겨레를 갈기갈기 찢어나누고 파당 의식만 키워 놓은 것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지난날 이승만 씨가 꾸며 놓았던 자유당이야말로 자기 파派만의 수지타산을 제일로 치는 정당의 본보기였으며, 세계 선거 역사 가운데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부정과 불법의 흉계를 꾸미고 이를 국민에게 강요했던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국민의 기본 권리가 나라법에 규정되긴 했지만 그것은 한갓 종이 위에 적어놓은 글귀에 지나지 않았을 뿐, 자유당 정부는 그것을 지키고 실현시키기는커녕 도리어 그러한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기 일쑤였다. 이리하여 정부에 의해서 자유를 짓밟히고 시달려게 된 온 국민은 정부의 억눌림에서부터 다시 자유를 되찾으려는 자유 투쟁의 운동을 벌였고 그것이 이른 바 자유당 정치하의 우리 형편이었다.

 

남한에서는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이 12년 동안 기간 산업의 토대가 되는 전력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짓지 못하는 사치스런 소비경제로 말미암아 농촌은 메말라 갔으며, 메마른 농촌의 피와 살을 깎아서 도시만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썩고 그릇된 일만이 극심해져 갔다.

 

자유당 독재 12년에 농촌의 경제는 파탄되고 관기는 문란해졌으며, 부정축재자들은 건전한 국가 경제의 성장은 제쳐 놓고, 그릇되고 썩어빠지기만 했다. 해방 16년에, 남한에서는 이승만 노인의 어두운 독재와 썩어빠진 자유당과 관의 권리를 중심으로 한 '해방 귀족'들이 날뛰어 겨레의 장래는 어려워만 갔던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배 형태인 카리스마적인 1인 정치는 이승만 독재로 끝났다."

 

- 박정희가 1962년에 발표한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서 발췌.

 

 

이승만 시대를 직접 온 몸으로 경험하고 산 장본인, 그것도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직접 남긴 글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승만에게 불만을 품은 군부는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분노한 국민들이 4.19를 일으키자, 이승만으로부터 발포 명령을 받고도 끝내 이를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결코 국민들의 생명을 아껴서가 아니었다. 한국 전쟁 이전이나 와중에 국군이 얼마나 잔혹하게 무수한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는데. 다만, 그동안 자신들을 홀대해온 이승만이 밉고 이제 곧 망할 운명의 이승만에 따라봤자 득이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해서였으리라.

 

물론 이승만 본인도 이런 군부의 속사정을 잘 알았고, 불만을 품은 그들이 행여 자신을 몰아내려 쿠데타를 꾸미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미 쿠데타 준비는 진행 중이었고, 만약 4.19가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났다면 그 전에 쿠데타가 일어나 이승만은 틀림없이 축출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이정재 같은 정치깡패들을 총애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독부 이승만>이다. 독부는 외로운 신세가 된 권력자를 뜻하는데, 그처럼 이승만도 결국에는 모두로부터 버림과 외면을 받아, 영락없는 독부가 되고 말았다. 국민들이 반발하고 군부도 등을 돌렸으며, 그의 후원자이던 미국조차 그의 오만과 독선과 무능에 질려 더 이상 지켜주지 않았다. 그로 인해 독부가 된 이승만은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권력을 모두 잃고서, 하와이로 달아나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해의 민심을 잃어 독부가 된 자의 말로였다. 그나마 아프리카 나라들에서처럼, 쿠데타군에게 붙잡혀 온갖 고문을 당하고 끔찍하게 죽어가지 않았던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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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부' 이승만 평전 -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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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남긴 어록 두 가지만 소개해 본다. ˝공산당이라면 부모 형제라도 용서하지 말고 처단해야 한다.˝, ˝내가 당나라 덕종이야? 난 사과 못해. 사과할려면 국회의원 당신들이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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