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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평점 :
시간마저 멈추고 싶은 순간,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건가요?
가끔 그런 상상을 합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혹은 미래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후회와 슬픔을 피할 수 있을까?
마치 낡은 영화 필름처럼, 멈춰버린 과거의 장면들을 되감기하고, 다가올 미래의 불안한 흑백 사진을 컬러로 바꿔보고 싶은 욕망.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의 데뷔작, '시간의 계곡'은 바로 그 아찔한 상상을 현실로 끌어들여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진 슬픔과 마주하게 하는 소설입니다.
출판사의 소개처럼 "예견된 상실을 마주한 인간의 딜레마"를 이토록 섬세하고 먹먹하게 그려낼 줄은 몰랐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 테드 창, 무라카미 하루키... 이 이름들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읽는 내내,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속에 조용히 잠겨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시간의 틈새, 그 기묘하고 매혹적인 설정
동쪽으로는 20년 후의 미래, 서쪽으로는 20년 전의 과거가 흐르는 마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반복되는 듯한 시간 속에서, 마을은 철책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는 그 경계를 넘기 위한 조건은 오직 하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진심으로 슬퍼하는 마음. '애도'라는 명목으로만 허락되는 시간 여행은 마치 달콤한 독약처럼 매혹적이지만 동시에 위험해 보입니다.
SF나 판타지를 넘어 인간의 깊은 감정과 윤리적 딜레마를 파고드는 이 이야기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블랙 미러'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특히 "애도 여행"이라는 개념은 슬픔마저 통제하려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며 씁쓸함을 자아냅니다. 누가, 언제, 얼마나 슬퍼할 수 있는지를 국가가 결정한다니, 숨 막히는 설정입니다.
숨 막히는 설정, 묘하게 불안한 분위기
책을 펼치자마자 느껴지는 건 묘한 불안감이었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 시간이 분리된 마을이라는 설정은 신선했지만, 동시에 '무언가 잘못될 거야'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마치 꿈속을 헤매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와, 주인공 오딜의 무덤덤한 듯 냉소적인 태도는 더욱 그 불안감을 증폭시켰습니다. 마치 방독면을 쓴 채 걸어가는 듯, 숨 쉬기조차 어려운 답답함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정된 이별을 겪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암 투병 중이셨던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언젠가 닥쳐올 슬픔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했던 제 모습이 오딜에게 투영되는 듯했습니다. 마치 모래밭에 발을 묻고 파도 소리를 외면하려는 아이처럼, 불안한 미래를 애써 외면했던 거죠. 그래서인지, 오딜이 느끼는 감정들을 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차가운 겉모습 뒤에 숨겨진 슬픔과 고독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오딜, 슬픔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
주인공 오딜은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에 길들여진 인물입니다. 감정을 억누르고, 슬픔을 외면하며, 자문관이라는 안정적인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마치 로봇처럼 감정 없이 업무를 처리하는 그의 모습은 현대 사회의 획일화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초상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에드메의 예정된 죽음을 알게 되면서 오딜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마치 굳게 닫힌 문이 열리는 것처럼, 억눌렸던 감정들이 폭발하기 시작합니다.
오딜은 처음에는 에드메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무력감을 느끼고 좌절합니다.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작은 배처럼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딜은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사회가 강요하는 틀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찾아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오딜의 변화는 우리 역시 상실과 슬픔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듯 헤매던 그가 마침내 자신만의 빛을 발견하는 순간을 보는 듯했습니다.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철학자의 시선으로 빚어낸 상실과 희망의 이야기
이 책의 작가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는 철학자이자 소설가입니다. 토론토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후과정 펠로우십을 지냈을 정도로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인간의 존재와 의미를 탐구해 온 그는,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소설 속에 녹여냈습니다. 특히, 그가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어린 시절 절친한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는 사실은 작품 속 깊은 슬픔과 애도의 감정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듯 그는 솔직하고 진솔하게 상실의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철학적 배경이 '시간의 계곡'에 깊이를 더합니다.
기억, 감정, 문학의 관계를 탐구해 온 그의 연구가 소설 속 인물들의 심리 묘사와 윤리적 딜레마를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어줍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넘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 것이죠. 데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억대 선인세를 기록하고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영상화가 결정된 것은 그의 잠재력과 작품의 가치를 입증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소설가로서 두 번째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니 앞으로 그의 행보가 더욱 기대됩니다. 마치 거장의 탄생을 예감하게 하는 듯, 그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감상 포인트: 시간을 초월한 질문,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이 소설은 시간을 초월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오래된 철학 책을 펼쳐든 것처럼 묵직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운명과 자유의지: 예정된 운명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마치 덫에 걸린 새처럼, 우리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딜은 에드메의 죽음을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딜은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새로운 길을 선택하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나갑니다.
상실과 애도: 우리는 어떻게 상실을 극복하고 애도해야 할까요? 상실은 우리 마음속에 깨진 유리 조각같이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오딜은 오랫동안 아버지의 죽음을 외면해왔지만 에드메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슬픔을 마주하고 애도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슬픔은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처럼 그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줍니다.
사회와 개인: 우리는 사회의 질서에 순응해야 할까요, 아니면 개인의 자유를 추구해야 할까요? 톱니바퀴처럼 사회의 부품으로서 살아갈까요, 아니면 자신만의 엔진을 장착하고 앞으로 나아갈까요?
오딜은 사회가 강요하는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면서 진정한 자유를 얻습니다. 마치 좁은 새장에서 벗어나 드넓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새처럼, 그는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펼쳐나갑니다.
아쉬운 점: 깊이 있는 주제 의식,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초반부의 몰입감에 비해 후반부의 전개가 다소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힘차게 달리던 기차가 마지막 역에서 속도를 줄이는 것처럼 이야기의 마무리가 조금 부족했습니다. 오딜의 선택과 그 결과가 좀 더 극적으로 그려졌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복잡한 설정에 비해 이야기의 깊이가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마치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속이 텅 빈 보석상자처럼, 깊이 있는 주제 의식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가즈오 이시구로, 테드 창,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를 좋아하시는 분 (몽환적인 분위기와 깊이 있는 주제 의식을 즐기는 분이라면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시간 여행, 평행우주 등 SF적 상상력을 즐기는 분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발한 설정에 푹 빠지실 수 있을 겁니다!)
삶과 죽음,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을 찾는 분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깊이 있는 질문들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예정된 이별, 상실의 아픔을 겪어본 경험이 있는 분 (상실의 고통을 위로받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혼탁한 시대, 희망을 발견하게 해주는 소설
'시간의 계곡'은 깊은 여운과 함께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질문을 던지는 소설입니다.
예정된 상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는 혼탁한 시대 속에서 우리에게 작은 희망의 빛을 선물합니다. 곽아람 기자의 말처럼, "혼탁한 시대, 희망이 필요한 모든 이를 위한 소설"입니다. 이 책을 덮고 나면, 마치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 겁니다.
시간의 틈새를 넘나드는 오딜의 여정을 통해 저는 제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우리의 현재는 어떤 색깔로 채워져 있나?
'시간의 계곡'을 읽고 당신의 현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시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삶에도 새로운 빛이 깃들게 될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