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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책
폴 서루 지음, 이용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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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우리는 전혀 모르는 곳에 대해 향수병을 앓는다." p.23

 

모르는 곳에 대한 향수라는 이 넌센스같은 말을 한 카슨 매컬러스에 따르면 우리는 익숙한 것에 대한 향수와 낯설고 이국적인 것에 대한 욕구 사이에서 방황한다. 이 방황은 경험상 여행지에서도 끝날 줄 모른다. 저 낯선 골목길로 들어가볼지, 아니면 여기서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이렇게 끝나지 않는 방황의 한 가운에서 어떻게 정반대의 마음은 하나로 합쳐져 모르는 곳에 대한 향수가 되는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크든 작든 두 힘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하나는 은밀한 자유에 대한 갈망이고 다른 하나는 넓은 장소로 나아가려는 충동이다. 하나는 내향성, 다시 말해 왕성한 사고의 환상의 내면세계로 향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외향성, 다시 말해 사람들과 구체적인 가치들이 존재하는 바깥 세계로 향한 관심이다.p.23(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러시아 문학 강의>)

 

나보코프식으로 설명하자면 모르는 곳에 대한 향수는 넓은 장소에서 찾는 은밀한 자유와 같다. 서로 모순된 충동이 동시에 발현되는 이 기묘한 병은 여행으로만 앓을 수 있는 질환이다.

 

알베르 카뮈는 "여행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두려움이다"라고 썼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나라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순간......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오랜 습관을 지키려는 본능적인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것이야말로 여행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사소한 접촉조차도 우리의 존재를 깊이 전율케 한다. 우리는 빛의 폭포와 조우하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영원함이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가 즐거움을 위해 여행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여행에 즐거움은 없다." p.462

 

감히 한 마디로 "존재하기 위해 떠난다"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면 "떠나야만 존재할 수 있다"일지도. 폴 서루는 이 감동적인 발언이 무색하게 카뮈는 결코 멀리 여행한 적이 없는 소심한 여행자였다고 말한다.

 

소심하기로는 누구 못지 않기에 폴 서루가 제안하는 '당신만의 여행을 위한' 열 가지 팁에서는 한 가지만 실천해보기로 한다.

여덟. 지금 있는 곳과 아무 관계가 없는 소설을 읽어라. p.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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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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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작은 영화제에서 어느 비평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당신은 죽음과 기억의 작가라고 자주 소개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늘 '뒤에 남겨진 사람'을 그리고 있다. 스스로도 그것을 의식하는가?" p.21

 

히로카즈는 비평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자신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허나 당사자의 깨달음과 무관하게 그런 성향이 그의 본질임은 관객들은 이미 눈치챘을 듯 싶다. 깨달음이 찾아오기 전이었는지, 그 다음이었는지 히로카즈가 제목에 이끌려 샀다는 책에는 그의 이상형이라고 부를만한 이런 철학이 담겨 있었다.

 

"단가는 기본적으로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감상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독자가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단가 형식의 기본이다. 따라서 짧은 단어에서 그 느낌을 해석해내는 독자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 시형이기도 하다."p.19

 

가능하면 영화에서도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 표현해보고 싶다던 히로카즈의 신작  <바닷마을 다이어리> 또한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였다.

 

바닷마을에 건너온 소녀 스즈의 언뜻 행복해보이는 일기 속 행간에는 표현되지 못한 말들과 감정들이 있었다. 세 언니들 또한 말하지 않는 것들의 주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결국 '뒤에 남겨진 사람들'이 사라진 것의 주변에 남아 서로를 받아들이게 된 건 무얼 직접 털어놓아서가 아니었다.

 

말하지 않고 있는게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 그러니까 어떤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털어놓아도 된다는 환대의 형식이 그들을 가족으로 묶어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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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 일기 1986~1989, 개정판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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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무엇을 왜 욕망하는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그 앎에 대한 욕망은 남의 글을 읽게 만든다. 남의 이야기나 감정 토로는 하나의 전범으로 그에게 작용하여, 그는 거기에 저항하거나 순응하게 된다. 저항할 때 전범은 희화되어 패러디의 대상이 되며, 순응할 때 전범은 우상화되어 숭배의 대상이 된다. 나는 누구처럼 되겠다가 아니면, 내가 왜 그렇게 돼가 된다. 그 마음가짐은 그의 이름 붙이기 힘은 욕망을 달래고, 거기에 일시적인 이름을 붙이게 한다. 왜 일시적인가 하면, 전범은 수도 없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구조는 그렇게 많지 않겠지만. p.105 <1987년 2월 11일>

누군가 왜 일을 하고 사냐고 묻는다면 당분간은 다음과 같은 답을 일시적인 전범으로 제시해야겠다.

"가장 서글픈 사실 중의 하나는, 사람이 하루에 여덟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여덟 시간씩 계속 밥을 먹을 수도 없으며, 또 여덟 시간씩 술을 마실 수도 없으며, 섹스를 할 수도 없지요. 여덟 시간씩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밖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토록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이지요" p. 43 <1986년 6월 29일, 김욱동 편의 [윌리엄 포크너](문지, 1986) p.255>

그런데 김현은 왜 이 문장에 "과연!" 하며 무릎을 쳤는가. 행복한 책읽기는 하루에 여덟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일이 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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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비행 - 생계독서가 금정연 매문기
금정연 지음 / 마티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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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책에 밑줄을 긋는 자는 하나의 질문과 대면하게 된다. "왜 하필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가?" 참으로 심플하고도 당연한 질문이지만 막상 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왜 살아가느냐/사랑하느냐'에 맞먹을 정도로 한없이 존재론적인 질문이니까. 마음에 들어서? 멋진 문장이라서? 그건 마치 밥을 먹으니까 살고, 예쁘니까 사랑한다는 대답과 비슷하다. 물론 딱 떨어지는 대답이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책을 읽고 또 밑줄을 긋는다.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며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것이다.

p.20

그러니까 왜 하필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다른 책을 펴들고, 또 밑줄을 긋고, 다시 다른 책을 읽고. 그렇게 끊임없이 독서는 연장된다. 비행은 끝날 줄 모르고 착륙을 위한 바퀴 따윈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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