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2 민음사 모던 클래식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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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화가는 자신의 그림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종국에 가서는 우리 마음속의 풍경까지 바꿔 놓는다는 것을 밀이야. 어떤 화가의 예술 작품이 이렇게 한번 우리 영혼 속에 자리 잡으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잣대가 되고 말지."(1권, p.289)

 

다른 사람들의 내면 풍경을 바꾸는 예술가 그 자신의 내면 풍경은 그가 남긴 예술작품만큼이나 아름다울까? 적어도 이스탄불의 세밀화가들은 아니다.

 

"여기서 등불 아래 이 그림을 보던 밤바다 신이 나를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악마가 내게 친구가 되어 주었다는 걸 느꼈지. 내가 정말로 세상의 중심에 있어도, 그림을 볼 때마다 더욱 그걸 원했네. 내가 사랑하는 주위의 모든 것들, 아름다운 세큐레를 닮은 여자와 방랑승 친구들, 그림에 지배적으로 사용된 빨간색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욱 외로워졌네. 내가 개성과 특징을 갖고 있는 것, 다른 사람이 나를 숭배하는 것은 두렵지 않네. 그건 내가 원하는 바야. …… 두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나의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에 나 자신을 악마처럼 느낀다네. 이 그림을 그리려고 그 두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외로움이 날 두렵게 해 …"(2권, p.329)

 

오르한 파묵은 작가가 된다는 것이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제2의 존재와 그 존재를 만들어낸 세상을 인내심을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노력하여 발견하는 것"이라 했다.(『아버지의 여행가방 』) "사람들, 친구들, 그리고 평범한 일상 내지 자질구레한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방에 가두고자 하는 자극"이 작가를 만드는 기본적인 자극이다.

 

"소설가들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 공동체의 기본적인 본능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있는 문화와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일단 그의 의식이 속한 공동체의 의식과 달라지면 그는 국외자, 외로운 사람이 됩니다. 텍스트의 풍요로움은 국외자의 관음증적인 시선으로부터 옵니다."(『작가란 무엇인가』)

 

그런데 국외자의 작품이 어떻게 국내자의 마음의 풍경을 바꿀 수 있는가. 오르한 파묵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쓴 것들이 읽히고 이해될 거라는,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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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따라 살기 - 유리 로트만과 러시아 문화 현대의 지성 157
김수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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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은 아무도 '책에 따라' 살려 하지 않지만" 책에 따라 살려고 해도, 책에 쓰여진 텍스트를 그대로 실현시킨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오늘날 유토피아의 가능성 자체를 더이상 믿지 않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유토피아를 지상에 실현시키는 것 또한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유토피아utopia는 그 어원상 이 세상에 없는 곳"이다. 유토피아가 실현되는 순간 그곳은 더이상 유토피아가 아니다.

 

유토피아는 "현존하는 삶의 질서를 대신할 다른 종류의 사회를 상상하는 사고의 작용"이자 결과다. 유토피아가 "현존재의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다른 곳에 투사하는 기능"으로서 그 존재의의가 있다면, '책에 따라 살기' 또한 책을 그대로 실현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기 보다 지금의 삶을 반대하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따르는 삶이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끔직한 것이 될 것임"(p.50)은 동의하지만 끔직한 것이라 판단하기 이전에 실현이 불가능한 삶이다. 그런데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따르는 삶은 그 실현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없는 삶이 도덕적, 정신적으로 빈곤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이래저래 책을 읽는다는 건 미쳐버리는 일이다. 책에 따라 살 수도 없고, 지금 이대로 살 수도 없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대로 책을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어리석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책에 따라 살지 못하면서, 이미 읽어버린 이상 더 이상 이전처럼 살 수도 없다.

 

이 진퇴양난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념에 따라 살 것'을 지향하는 러시아의 '극단적인 원칙주의'가 갖는 의의란 무엇일까. 이사야 벌린은 '삶과 예술을 가르는 경계를 고의로 뚜렷하게 긋지 않는' 그들의 태도가 윤리적이라고 했다.(p.20) 미하일 바흐친의 말대로 "인간은 예술 속에 있을 때는 삶 속에 있지 않고, 삶 속에 있을 때는 예술 속에 있지 않지만" 러시아인은 자신 안에서 그것들을 하나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19세기 러시아의 법과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는 '범인들의 도덕률을 초월할 수 있는 초인들은 가능하다'라는 니체식의 명제를 현실속에서 '실험'하기 위해 직접 도끼를 손에 쥐었다. (p.18)

 

라스콜리니코프는 윤리적인가? 그는 결국 니체의 가설을 실현한 것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실험'을 했고, 그 실험에 충실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말들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정신적 뿌리'를 자기 바깥에 두고 있다는 이 불가피한 조건을 "원초적 결여와 공백을 낳는 비극적 사태"로 해석한 것은 라캉이다. 러시아의 이론가들은 같은 사태를 두고 변형과 생성을 낳는 카니발의 무대로 보고자 했다. (p.230)주어진 "말들의 세계"속에서, 그 제약과 한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며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바꾸는' 삶의 창조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실험도 결국 어떤 창조적 결과를 낳았느냐에 그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아감벤이 '동시대인'이라 명명한 사람들, 이 "자신의 시대와 완벽히 어울리지 않는 자, 하지만 바로 그 간극과 시대착오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시대를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는 자"들이 바로 책에 따라 살려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아감벤은 동시대인의 시선이 과거의 불발된 가능성을 향해 있다고 했다. 책에 따라 살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있다.) 방향은 반대이지만 동시대와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더 동시대에 속하게 되는 역설은 같다고 우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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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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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도 아니고 각하가 읽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보좌관들이 준비한 보고서를 읽는데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인데 그 틈에서도 읽어야 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문학은 도대체 얼마만큼의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그러나 얀 마텔은 그러한 취지로 문학을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에서 유용한 것들만을 생각하는 시간을 줄이라고 말한다.

 

"스티븐 하퍼 수상에게도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혼자서 빈둥대는 시간이 있어야 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이 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라는 기능적인 문제보다, '이것은 왜 이렇고, 저것은 왜 저럴까?'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했다." (p.27)

 

얀 마텔은 하퍼 수상에게 조용한 시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문학을 권한다. 하퍼 수상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바쁘게 하는 것일수록 더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며 달리고 또 달리지만, 얀 마텔은 삶은 본래 조용한 것이며, 정신없이 달리는건 우리뿐이라고 말한다.

 

물론 정신없이 달리는 동안 문학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나 추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과 세계와 삶에 대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각하에게는 문제가 된다. 얀 마텔은 각하가 문학 작품을 전혀 읽지 않았다면, 도대체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력을 어디에서 얻었겠으며, 인간다운 감성을 어떻게 구축했을지" 우려스럽다고 개탄한다. 그런데 이런 개탄을 옆에서 듣고 있자니, 문학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 각하에게만 추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식은땀이 흐른다.

 

"(존재론적으로) 문학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 여기서 무지는 가장 나쁜 무지로서 자기 기만을 겨냥한다. 문학은 무디게 갇혀 있는 일상인의 의식이 하나의 코미디, 혹은 거짓된 삶이라는 것을 드러나게 한다."

"(의미론적으로) 또한 몽상의 소산으로서의 문학은 인간의 실현될 수 없는 꿈과 현실사이의 거리를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드러냄으로써, 그 거리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억압되어 있는 가를 나타낸다." (『한국문학의 위상 』, 김현)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써먹을 수 없다는 특징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바로 그것이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힘에 대해 감시체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 것은 김현이다. 인간을 억압하는 힘들에 대한 감시 속에서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므로 인간의 자기 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고 했다. 얀 마텔 역시 문학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모순되게 들리겠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 대해 읽어갈 때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해 읽는 것입니다. 이런 부지불식간의 자기점검에서 때때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으며 인정하게 됩니다. … 때로는 불안감에 싸여 부인하고 싶은 마음에 몸서리를 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는 우리는 더 현명해지고 존재론적으로 더 단단해집니다."(p.43)

 

그런데 이러한 말은 마치 각하 자신을 위해 문학을 읽으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통치자가 더 현명한 사림이 되는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녕 중요한 일일까?

 

"결과적으로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은 고깃덩어리와 천사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만든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한국문학의 위상 』, 김현)

 

각하를 비롯한 모든 정치인이, 그리고 시민이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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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애니멀 -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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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새해 첫날 영국에서는 860만명의 시청자가 셜록 시즌4 에피소드1을 '본방사수'했다고 한다. 영국만이 아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극장 개봉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혹자는 배급사의 농간이라고 했다.) 사정이 어찌되었든 세계는 다시 한 번 셜록홈즈 증후군에 빠졌다.

 

조너선 갓셜에 따르면 우리가 셜록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건 우리의 뇌에 작은 셜록 홈스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의 홈즈는 "삶이 지독하고 소란스러운 혼란에 머물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일관되고 질서 정연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이런 작업이 쉽게 이뤄질리는 없다. 우리는 아서 코난 도일이 아니다.

 

셜록 홈스의 인기 비결이자 아서 코난 도일의 작업 비결은 "가장 애매모호한 단서를 가장 그럴듯하고 완벽하게 설명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다."(p.132) 우리가 스스로 완벽한 이야기를 지어낼 수 없을때, 우리의 이야기하는 마음은 이미 만들어진 신화로 향한다. 신화의 대표적인 두 버전이 종교와 음모론이다.

 

"음모론은 이야기하는 마음이 의미를 강박적으로 추구한 결과이다. 음모론은 인간 조건의 거대한 미스터리, 이틀테면 '세상에는 왜 이토록 나쁜 일만 일어나는가?'같은 물음에 궁극적 해답을 제시한다."(p.146)

 

"우리가 종교를 가진 이유는 설명의 공백을 질색하는 천성 때문이다. 성스러운 픽션에서 우리는 이야기하는 마음이 구사하는 말 짓기의 최고봉을 본다."(p.152)

 

도대체 왜 뇌 속의 셜록 홈즈는 강박적으로 의미를 추구하고, 설명의 공백을 질색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설명하는 '개인 신화' 없이는 살 수가 없기 떄문이다.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라면 차라리 배우를 때려치우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연기자와 같다. (그러므로 마틴 프리먼은 얼마나 훌륭한 배우인가.)

 

우리는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왜곡해서라도 주인공의 자리를 지키려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과거를 잘못 기억하는 이유는 삶 이야기에서 주인공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일인칭 드라마에 나오는 결함이 있을지언정 고귀한 주인공으로 둔갑시키는 이야기를 평생 만들어 낸다. 삶 이야기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즉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해서 지금의 자리에 왔으며 이 모든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설명하는 '개인 신화'이다. 삶 이야기는 곧 우리 자신이자 우리 정체성이다. 하지만 삶 이야기는 객관적 서술이 아니다. 전략적 망각과 교묘하게 빚어낸 의미로 가득한 정교한 서사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독일의 유대인 작가 하인리히 하이네의 희곡 『알만소르』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예사로운 예언이 아닌 것이다.

 

"책이 소각되는 곳에서는 결국 인간도 소각되고 말 것이다."(p.189)

이야기하는 마음은 이야기에 의해 빚어진다. "픽션은 정말로 마음을 빚는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우리를 만지작거리고 주물럭거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동의도 받지 않고서 우리의 마음을 빚어낸다."(p.183) 그러므로 문제는 이야기의 영향력이 아닌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빚어내는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가이다.

 

앞서 말했듯 삶 이야기는 "전략적 망각과 교묘하게 빚어낸 의미로 가득한 정교한 서사이다." 《뉴욕 타임스》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카가 말했듯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느냐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기억을 더 간직한다." 그런데 여기서 새삼 이런 의문이 든다. 진실은 무엇떄문에 중요한가? 진실이 그 자체로 가치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철학자 윌리어 허스타인 말마따나 "진실은 우울하다." 진실에 따르면 우리는 죽을 것이고, 대개는 앓다가 죽을 것이며, 친구들도 모두 비슷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 우리는 작은 행성 위의 작고 보잘것 없는 점일 뿐이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이러한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 이런. 결국 도돌이표처럼 '의미'의 강박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인가. 이야기든 진실이든 우리는 "삶이 지독하고 소란스러운 혼란에 머물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나보다.

 

세상을 혼란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진실을 찾으려했던 한 남자의 몰락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비극으로 남았다. 이상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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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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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솔닛의 경험을 빌리지 않아도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남자들은 자꾸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들며, 이는 명백히 젠더적 현상이다. "많이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p.15)

 

이런 남자들을 상대로 여자들은 이중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하나는 무엇이 되었든 문제의 주제에 관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사실과 진실을 안다고 인정받을 권리, 가치를 지닐 권리, 인간이 될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우는 전선이다." (p.25)

 

레베카 솔닛의 생에에서는 끝나지 않을, 인류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을 상대로 벌이는 이 전쟁에서 나머지 절반은 반드시 져야만 한다. 문제는 어떻게 질 것인가이다. 그냥 전쟁을 포기해서도, 무조건적인 항복을 해서도 안 된다. 상대에게 확실한 승리를 안겨주어야만 한다. 이 확실한 승패에 따라 모두가 자유로워질 것인지, 아니면 노예가 될 것인지의 여부가 달려있다.

 

모두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한쪽이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 단순히 "남자들이 수행하는 제도적 활동의 일부를 여자들이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수준이 아니다. "지리적 차원에서든 상상력의 차원에서든 자유롭게 쏘다닐 수 있도록" "여러 실제적인 형태의 자유와 힘이" 주어져야 한다고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고만 말하지 않았다. 『자기만의 방』에는 "여성에게는 또한 대학과 전세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담겨 있다."

 

"술집에서의 식사, 한밤중의 거리 산책, 도시의 자유로움은 우리의 자유에 결정적인 요소들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체성을 잃기 위해서다."(p.144)

전쟁에서 지는 것. 그것은 젠더차이가 차별과 동일시 되는 고리를 끊는 것이다. 어떻게?

 

"오늘날 우리 중에 존재하는 현실의 카산드라들에게는 우리가 그 저주를 걷어줄 수 있다. 누구의 말을, 왜 믿을 것인가 하는 선택을 우리가 스스로 내림으로써"(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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