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eee 사랑하고 싶다
타오 린 지음, 윤미연 옮김 / 푸른숲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타오 린의 『Eeeee 사랑하고 싶다』는 오랜만에 나를 당황시킨 소설이다. 무기력한 청춘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파괴적인 망상은 고작 200여 쪽에 불과한 소설 한 편을 오래도 끌게 했다. 이럴 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소설과 진득하게 놀아주기’ 신공뿐이다. “아무리 괴상망측하고 이해 불가능해 보여도 상대의 세계에 들어가 재미있게 즐길 것”을 다짐하고 나니 내 머릿속에서 ‘공감 불능’ 주의보가 조금은 해제되는 듯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도미노 피자 배달원으로 일하는 앤드류의 나날은 따분하고 우울하기만 하다. 그가 별 볼일 없는 자신의 청춘을 탈출시키는 방법은 틈나는 대로 날리는 썩소, 옛 여자친구 새러를 추억하는 일, 말로는 수십 번도 더 밴드를 결성한 입버릇뿐이다. 당연히 최저임금을 받기 위해 피자 박스나 접어대는 현실은 그런 것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미 절망과 무기력증과 권태에 짓눌린 앤드류가 현실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을 향해 욱하여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걸리는 대로 두들겨 패고, 나 자신도 죽여가며 광란의 살인극을 한 판 푸지게 벌이는 상상을 할 수 있을 뿐. 그런데 무턱대고 치솟는 자조적인 망념이 낯설지만은 않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깨달은 삶의 방법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릿속을 터뜨리는 생각을 멈추고 무슨 행동이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내 앞에 떨어진 현실이 아무리 버겁고 남루해도 어떻게든 안간힘을 다해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 행동 없는 생각만으로는 현실의 먼지 한 톨 흩어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진리를 그때는 몰랐다.


돌이켜보면 좀더 어렸을 때는, 꿈은 더없이 찬란하게 반짝거리는데 현실은 끝없이 비루하고 너절해 보여서 내 머릿속은 현실을 뛰어넘어 꿈에 가닿기 위해 온갖 관념과 이상들로 부풀어 올라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렇다 한들 행동이 없는 꿈과 현실의 간극이 고스란하니 절망스러워지고, 그 절망이 깊어지면 무기력증이 엄습하고, 끝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도록 권태의 무게가 가중된다. 사지가 권태에 꽁꽁 묶인 채 머릿속으로 번잡하게 오가는 생각들이 헝클어진 털실 뭉치처럼 얽히고설키면, 뭔가에 스치기만 해도 눈물이 툭 비어져 나오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미친 듯이 화내게 된다. 세상을 향해, 자신을 향해 맥락 없는 야유와 조소와 욕설을 퍼붓는 것이다. 거기에 이성적인 이유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냥 모든 게 화나는 것이다.


앤드류는 이미 이 단계도 뛰어넘었다. 이제 그는 자기 처지라고는 믿고 싶지 않을 만큼 꿈과 멀어진 현실에서 자신을 유리시킨다. 실제 현실이 어떠하든 자기와 무관하다는 양 무의미한 인생에 대해 농담하고 미래까지 낭비하며 그런 일들로 자신이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일 따위는 없다고 쿨한 척한다. 어차피 한 인간의 삶이란 게 무가치하고 보잘것없으니까. 진정성 같은 것은 아무래도 소용없으니까. 아무리 작가가 되고 싶었어도 앤드류는 도미노 피자 배달원으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죽이고 있으니까. 작가가 되고 싶었던 꿈은 그의 옹색한 현실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그는 자기 꿈에 대해서도 별다르지 않은 태도를 취한다. 유독 ‘줌파 라히리’가 끊임없이 언급되는데, 타오 린은 왜 그녀를 콕 집었을까? 사실 이 소설 자체에 완벽하게 집중하지 못했던 것은 앤드류의 단조로운 하루에 예고 없이 시시때때로 끼어드는 염세적인 몽상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데 한눈을 팔았기 때문일 수 있다.


어린 시절 침실에서 기타와 드럼 반주에 가사를 붙인 슬픈 노래를 인터넷에 올렸어야 했다. 노래 제목은 ‘줌파 라히리’로 붙이고. 그녀가 받은 퓰리처상은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면서 차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28p)


 

"줌파 라히리는 대왕고래나 뭐 그런 걸 죽이고 싶게 만들어. () 그 여자 이름은 꼭 총기 난사극 같은 느낌이야.”
“우리가 그 여자를 쏴 죽이자.” 스티브가 말한다. “쥐도 새도 모르게.”
“그 여자는 퓰리처상을 받고 다이아몬드 보트에 살고 있다지. 아마.” (55p)

 

쇠파이프를 들고 TV에 나온 스티브 : 난 저년을 죽일 거야.
기자들 :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스티브 : 줌파 라히리 (65p)

 

줌파 라히리가 그를 사랑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 딱 잘라 거절할까? 줌파 라히리는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크루즈에서 산다. 그녀가 받은 퓰리처상이 그녀를 두려워한다. (74p)

줌파 라히리, <뉴요커>지. 줌파 라히리의 소설 중에 <섹시>라는 작품이 있다. 섹시. 새러는 섹시하다. 섹시하게 웃는 새러. (76p)

 

등등.

 

“줌파 라히리의 얼굴에 생식기 그려 넣던 새러”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미래가 없어진 앤드류 같은 청춘들은 <나는 내가 싫다>라는 노래를 듣고, 차창 밖으로 “이 개새끼들아!”라고 고함치며 세상을 엿 먹이고, “어떻게 해야 즐겁니?”를 공허하게 내뱉는다. 청춘은 어찌어찌 그 시절을 통과하여 뒤돌아볼 때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그러나 그 시절의 한가운데에서는 청춘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해 버릴 것만 같다. 그 시절을 호되게 앓으면서 숨이 턱에 닿도록 운동장을 돌고 또 돌던 친구는 이제 편안해 보인다. ‘그때는 그렇게도 절실했니? 미래 따위는 오지 않을 것처럼 자신을 학대할 만큼’이라는 물음에도 빙긋 웃을 여유를 찾은 걸 보면 말이다. 『Eeeee 사랑하고 싶다』는 하고 싶은 열망만큼 할 수 없다는 한계가 고압적으로 다가오는, 그리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에서 더더욱 무기력해지는 청춘의 호된 신고식을 아직도 치르고 있는 사람이 부르짖는 영혼의 소리로 가득 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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