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바 마을 이야기
베르나르도 아차가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곧 읽어야 책으로 분류하여 서랍장 위에 쌓아둔 책 더미 사이에서 『오바바 마을 이야기』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낯선 이름을 가진 작가 베르나르도 아차가의 『오바바 마을 이야기』가 궁금했던 것은 ‘오바바’라는 상상의 공간을 둘러싼 연작소설이라는 점, 또 소수민족인 바스크족이 사용하는 ‘바스크어’라는 생소한 문자로 쓰였다는 점, 무엇보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집 자체가 독서의 세 단계를 암시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문학에서는 상상의 장소를 공간적인 배경으로 삼는 일이 드물지 않으므로 특별히 매혹적인 장치로 내세우기가 다소 빈약할지 모르지만, 『오바바 마을 이야기』에서 ‘오바바’는 단지 인물들을 수식하는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상징으로 생동한다. 『오바바 마을 이야기』는 모두 3부 26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외지인의 생경한 시선으로 오바바를 바라본다. 오바바에 대한 애정이 깃들지 않은 이방인의 눈길은 편견과 몰이해로 코팅된 색안경을 거친다. 그들에게 오바바는 거칠고 원시적이고 비상식적인, 그리하여 춥고 외롭고 위험한 오지 지역일 뿐이다. 그들은 오바바에 살고 있으면서도 오바바를 벗어날 기회만 노리면서 오바바를 이해하고 사랑할 기회조차 갖지 않으려 한다. 그래선지 1부에서는 좀처럼 소설에 몰입하기 힘들다. 아름다운 꽃노래도 한두 번이면 시들해지는데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그려졌으니 오죽할까. 이것은 아직 소설의 매력을 제대로 깨닫기 전에 낯선 시선으로 탐색하는 독서의 1단계와 마찬가지이다.

2부는 오바바 인근의 마을인 비야메디아나를 1부처럼 외지인의 시선으로 들여다보지만 1부와 달리 그 시선에는 호의적인 애정이 배어 있다. 황량하고 쓸쓸하고 공허한 첫인상은 점차 마을 곳곳에서 추운 겨울날을 견디는 사람들의 정겨운 수런거림으로 채워진다. 투박하고 무지하고 촌스럽지만 따스한 사람 냄새 나는 그들은 오만한 지식이 아니라 인생의 깊이와 세월의 연륜으로 다져진 지혜로 우정과 사랑과 질투와 연민과 자부심을 나눈다. 2부에는 ‘비야메디아나 마을을 기리는 아홉 마디의 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아주 흥미롭다. 베르나르도 아차가의 분신으로 짐작되는 ‘나’는 비야메디아나를 ‘기억’하는 데 “많지도 않게 적지도 않게 아홉 단어”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여기에 ‘논리’ 같은 것은 끼어들지 못한다고 서두를 뗀다. 그리고 그 아홉 단어를 포함한 아홉 가지 에피소드를 하나씩 이야기해 나간다. 아홉 단어는 ‘나’의 기억 속으로 여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티켓이나 다름없지만, 작가는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단어 아홉 개를 콕 짚어주지는 않는다. 에피소드 속에 보물찾기처럼 아홉 단어를 숨겨두었으니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 행간을 읽어내어 직접 찾아보라고 독자를 부추기는 듯하다. 작가와의 보물찾기를 하려면 독서의 2단계로 진입하여 소설에 좀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낯설기만 했던 이야기가 친밀해지기 시작하면 ‘공감’이라는 매혹적인 마법이 일어나 소설에 빠져들게 된다.

3부에서는 좀더 직접적으로 문학, 혹은 이야기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면서 독서의 3단계에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친숙하지 않은 것(소설이든 무엇이든)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을 풀고 애정과 이해와 공감으로 친밀해지고 난 다음 그 과정에서 새로이 알게 된 단편적인 진실들을 통합하여 그것의 본질에 투명하게 가닿는다. 3부는 마치 문학 강의라도 하듯이 오바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와 친구, 그리고 오바바에 사는 몬테비데오의 아저씨를 등장시켜 ‘훌륭한 이야기’의 기준은 무엇인지, 표절이 문학적인 유산을 쌓아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떻게 바스크 문학의 빈약한 현실을 디디고 풍성한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안톤 체호프, 기 드 모파상, 이블린 워 등의 단편소설과 바스크 문학의 대가들을 예시하면서, 그리고 ‘나’와 친구와 아저씨가 썼다는(그러나 베르나르도 아차가가 의도적으로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썼음이 분명한) 짧은 작품들을 퍼즐처럼 제시하면서 이야기한다.

이쯤에서 ‘바스크 문학’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오바바 마을 이야기』는 번역본이라 작가나 책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고 ‘옮긴이의 말’도 미리 훑어보지 않는다면 이 소설이 ‘바스크어’라는 소수민족의 비주류 언어로 쓰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어차피 바스크어라는 언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고, 설혹 그런 언어가 지구의 어디에선가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도 번역본으로밖에 읽을 수 없다면 무슨 언어로 쓰였던 그게 왜 중요하냐고 시큰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어는 민족의 얼과 정서와 정체성을 대변한다. 민족의 정신적인 유산이 오롯이 언어에 배어 있는 것이다. 한 언어에 어떤 표현이 유난히 풍요로운지, 어떤 단어가 눈에 띄게 반복적으로 사용되는지, 어떤 말이 무슨 말로 대체되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이해하는 데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이다.

게다가 스페인 북부의 바스크 지방에서만 고립되어 쓰인다는 바스크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의 한글도 분명 소수 언어이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다룬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보면서 지금 내가 당연하게 쓰고 있는 이 글자가 얼마나 고귀한 뜻을 품고 뼈아픈 진통을 감내하며 탄생했는지 절감할수록 가슴이 어찌나 저릿저릿한지. 베르나르도 아차가는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언어(바스크어)로 쓰는 것을 배울 수 있는, 바스크어로 쓰인 책을 읽는 독서 습관을 형성할 만한 선례가 부족하기 때문에’ 바스크어로 문학 활동을 한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내 가슴을 두드렸다. 한글이 풍성해지고 우리 문학이 탄탄해지려면 이 고백의 의미를 끊임없이 떠올려야 할 것이다.

나는 독서의 3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스물여섯 편의 이야기들이 여전히 연결 고리를 찾지 못한 채 조각조각 나뉘어져 단편적으로 머릿속을 배회한다. 다만 오바바에 도착하려면 탐스러운 눈이 흩날리는 것처럼 수많은 흰나비 떼들이 날아다니고 박하 향이 진동하는 나비 도로를 지나 울창한 숲속의 굽잇길을 127개나 지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베르나르도 아차가는 오바바의 본질에 다다르는 과정을 ‘마지막 단어’를 찾는 여정에 비유한다. 물론 그 단어도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도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고 의뭉을 떤다. 어쩌면 그 단어는 각자 자신이 찾아야 할 몫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독서의 3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미련도, ‘마지막 단어’에 대한 답답함도 한 켠에 밀쳐두게 만드는 도마뱀의 미스터리는 어찌할 것인가.

3부에서 ‘나’는 우연히 어린 시절의 오래된 단체 사진 속에서 이스마엘의 손에 쥐인 도마뱀을 발견한다. 그런 이스마엘 앞에는 가장 똑똑‘했던’ 알비노 마리아가 서 있다. ‘했던’이라고 과거형을 쓴 이유는 알비노 마리아가 어느 날 갑자기 가장 멍청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이 풀밭에서 함부로 잠자지 않도록 ‘도마뱀이 귓속으로 들어가 사람의 뇌를 파먹는다’고 겁준 엄마들의 지어낸 이야기가 어쩌면 알비노 마리아에게 실제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에 사로잡힌다. 이 의구심은 잔혹한 악동 이스마엘이 개과천선하여 도마뱀을 구조하는 환경보호운동가가 됐다는 것으로 어느 정도 풀리는 듯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핵심을 흐리게 만드는 장치일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스마엘의 수상쩍은 도마뱀 임시 보호소에 갇힌 이후 ‘나’도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다. 도마뱀 이야기가 무엇을 암시하는지, 이스마엘과 도마뱀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나’의 변화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하지만, 뭐랄까, 방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듯한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