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 디 아더스 The Others 8
에두아르도 라고 지음, 고인경 옮김 / 푸른숲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에두아르도 라고의 『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라는 총체를 이루는 것은 모든 기록들의 편린이다. 전부 실제 작가인 에두아르도 라고가 창조하긴 했지만 일기, 편지, 신문 기사, 메모, (소설 속 인물이 쓴) 단편소설 등 단편적인 기록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긴밀하게 맞물리고 엮어져 총체적인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 때문에 독자가 단숨에 읽어 내리기에는 꽤나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에두아르도 라고는 전혀 친절하지 않다. 번역본에는 따옴표만 없을 뿐 마침표와 쉼표가 문장이나마 구분하게 해주지만 원문에는 “모든 문장부호들을 생략했다”니, 독자로서 최대한의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실험 정신’이 강하다고 하겠다. 이야기도 시간순으로 전개되지 않고 시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뒤섞는다. 하지만 시간 죽이기용으로 딱 좋은 엔터테인먼트 일본소설처럼 ‘술술’ 읽히지는 않아도 소설 전체에는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묘하게 스며들어 있다. 처음에는 다소 어지럽게 여겨지는 기록들의 편린도 미스터리의 단서로 집중하다 보면 호기심이 배가되고 흥미가 증폭된다.

『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에는 실제 작가 에두아르도 라고를 제외하고 두 명의 작가가 더 등장한다. 그중에 한 사람은 갈 애커먼으로, 그 모든 기록들을 남긴 인물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네스터 올리버 채프먼으로, 그 기록들을 바탕으로 갈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책을 대신 완성하는 인물이다. 갈이 자신의 생애를 바치고 네스터가 자신의 인생이 뒤흔들리는 줄도 모른 채 완성하려 했던 책은 바로 『브루클린』, 즉 『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 자체이다. 이 책은 오직 한 여인, 나디아 오를로프를 위해 쓰였다. 갈은 고백한다. “예전에는 내가 왜 글을 쓰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당신 때문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 오로지 당신을 위해 『브루클린』을 쓸 거야. 『브루클린』은 당신 덕분에, 당신 때문에 태어나는 거야.” 그렇다면 왜 하필 ‘브루클린’일까? ‘브루클린’은 갈과 나디아의 사랑이 시작되고 무르익고 끝나는 곳이다. ‘브루클린’은 갈이 자신을 사랑하긴 하느냐면서 “나와 결혼해 줄래?”라고 애타게 묻고, 나디아가 “제발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질문은 하지 말아요.”라고 어떤 대답도 회피할 때, 갈이 나디아와 딸아이를 낳으면 지어주고 싶어 한 이름이다. 그리하여 ‘브루클린’은 갈이 나디아만을 위해 남긴 책 제목이다.

『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는 구체적인 날짜와 함께 페너스포인트의 외진 해안, 검은 암초에 걸려 배가 무수히 난파된 바다를 바라보는 덴마크 선원들의 묘지 한쪽에서 갈의 장례식이 조촐하게 치러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처음부터 주인공의 고독한 죽음을 들이밀었으니 독자는 갈이 죽음에 이른 사연이 궁금해진다. 급기야 이 년 뒤에는 네스터가 갈의 무덤을 찾아와 『브루클린』을 바치면서 당신 대신 소설을 완성하는 동안 자신의 전 존재가 완전히 바뀌고 말았노라고 고백한다. 갈의 죽음과 『브루클린』 사이에 또렷한 연관성을 찾기 어렵지만, 독자는 뭔가 수상한 내막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때부터 독자는 갈이 남긴 모든 기록들을 네스터가 가려서 재구성하는 대로 『브루클린』을 함께 읽는다. 『브루클린』에는 갈의 인생, 갈과 나디아의 첫 만남과 사랑과 영원한 이별, 술집 오클랜드와 그곳의 언저리를 맴도는 군상들, 그리고 네스터와 이 모든 인물들이 살았던 브루클린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치맛자락이 말려 올라가는 바람에 속옷조차 입지 않아 훤히 드러난 맨살의 음부를 우연히 들여다본 나디아와의 강렬한 첫 만남 이후 갈은 그녀에게 한눈에 매혹당한다. 나디아에게 송두리째 사로잡힌 갈의 영혼은, 갈이 나디아를 사랑하듯 나디아는 갈은 물론 세상의 어떤 남자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도 나디아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심지어 감히 나디아의 사랑을 요구하지 못하는 갈에게 달콤한 위안이 되어준 그런 믿음마저 산산이 부순 채 나디아가 다른 남자들과 사랑하고 결혼할 때도 갈의 영혼은 나디아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갈은 자기 영혼이 괴로움으로 피폐해져도 나디아를 그를 필요로 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드나들도록 허락했다. 갈의 마음에 동조할 수 없었다. 책장을 거의 다 넘길 때까지 나디아의 매력에 시큰둥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저 너무나 이기적인 여자일 뿐이었다.

나디아의 어떤 점이 그토록 매혹적이기에 자신을 떠나버린 그녀에게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갈의 인생이 허물어져 내렸을까? 어쩌면 나디아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딱 한 번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을 온통 뒤흔들었던 장면. 누군가 연애편지를 잘게 찢어서 높은 건물의 창밖으로 던졌다. 허공에 흩뿌려진 연애편지의 조각들이 나풀나풀 내려앉자 나디아가 그 종잇조각들을 이어 붙여 연애편지로 되돌린 후 갈에게 건넸다. 누구에겐가 썼던 연애편지를, 혹은 누군가에게서 받았을지도 모를 연애편지를 조각조각 찢어 허공에 흩뿌려야 했던 사람, 또 그 연애편지의 조각조각들을 이어 붙여야 했던 사람의 그 간절한 마음이 나디아를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연애편지의 내용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나디아가 다른 남자와 평범한 가정을 꾸린 후에도 오직 갈만이 등장하는 일기를 썼다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싶기만 했다.

갈의 인생에서는 스페인과 브루클린에 대한 에두아르도 라고의 애정을 엿볼 수 있다. 갈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는데 ‘사실 스페인 엄마와 이탈리아 아빠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너를 낳았단다’라는 이야기가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갈의 친부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파시스트와의 스페인 내전에서 스페인 공화국과, 전 세계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국제 여단이 민주주의, 공화정,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어떻게 양심을 일깨우고 저항했는지 자세하게 들려준다. 에두아르도 라고는 국제 여단의 일원이었던 갈의 양아버지 벤의 입을 빌려 “아무리 받아들이길 거부해도 네게는 청산할 과거가 있다. 그것은 오로지 마드리드에서 가능해. 그래야 네 인생이 온전히 네 것이 될 거야. 너는 직접 마드리드 땅을 밟고, 엄마와 아빠가 네가 잊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인 그 언어로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무엇보다 네 동족들 가운데 있어야 해. 어쨌든 그곳에서 내가 세상에 나왔으니까”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메리카니어드인 작가 자신에게 무수히 들려주는 말일지도 모른다. 존재의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스페인과 함께 브루클린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한다. 양할아버지 데이비드의 신문 칼럼을 통해 브루클린의 역사를 되짚는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이야기일지라도 데이비드의 펜을 거치면 브루클린의 매혹적인 내력으로 탈바꿈한다.

마지막으로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가 술집 오클랜드이다. 지금껏 언급한 인물들 말고도 『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 오클랜드 주위를 맴돌며 주저앉는다. 오클랜드는 마치 거대한 중력을 가진 행성처럼 인생의 패배자, 세상의 낙오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그림자를 자신의 궤도 안으로 끌어들인다. 오클랜드의 주인 프랭크를 그들의 보호자로 자처하면서 그들에게 기꺼이 안식처를 제공한다. 인심 좋은 오클랜드의 ‘선의’를, 네스터는 오클랜드에 한번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옥죄는 ‘안전한 그물’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에게 닥친 역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위해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건만, 자신이 주저앉은 그 비극의 자리에서 무기력하게 머물러 있도록 오클랜드의 ‘안전한 그물’이 쳐진다고. 그것이 진짜 독이라고, 갈을 무너뜨린 것도 사실은 나디아가 아니라 오클랜드였다고. 글쎄, 네스터의 생각에 수긍하든 발끈하든 그것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에서 나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 장소는 오클랜드였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오클랜드의 주술에 걸려든 것일까? 나는 프랭크의 진심을 믿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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