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스 스토리
A.S. 바이어트 지음, 윤희기 옮김 / 프레스21 / 1997년 6월
평점 :
절판


A. S. 바이어트의 『마티스 스토리』는 20세기 프랑스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단편 세 편이 들어 있는 소설집이다. 바이어트의 『소유』를 사랑하게 된 후, 꽤 오래도록 찾았지만 좀처럼 눈에 띄지 않다가, 어느 날 너무나도 갑자기, 이토록 쉽게 이 책과 나의 연이 닿을 줄 몰랐다. 책과 만나는 일도 인연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메두사의 발목

나는 미용실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옷차림도 그렇지만 머리 모양도 ‘미(美)’에 대해서는 최대한 밀쳐둔다. 그저 나 편한 대로가 좋달까. 내 머리를 남에게 여러 시간 맡기는 것도 선뜻 내키지 않고, 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만 들고, 무엇보다 미용사가 이런저런 말을 붙여오는 것이 싫다. 구태의연한 휑한 말에 적당하게 맞장구칠 만한 대답을 찾기가 힘겹고 성가시다. 그래서 자꾸만 자라는 긴 머리칼을 도저히 주체하지 못하겠다 싶을 때만, 한 해에 한 번 정도 싹둑 자르러 미용실에 잠깐 들르는 것을 제외하면 내가 미용실에 갈 일은 아직은 좀처럼 없다. 좀더 나이 들어 포니테일로 묶은 치렁치렁한 머리가 흉하게 느껴질 때쯤이면 미용실에 가는 길이 덜 싫을까.

고전학자인 중년의 수잔나 부인은 젊음의 자연스러운 생기를 잃어가면서 푸석푸석하게 윤기를 잃은 머릿결과 세월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미용실에 드나들게 되었다. 파란 타일 위에 누워 있는 분홍 나부가 그려진 마티스의 「장밋빛 누드Pink Nud」가 인상적인 미용실은 온통 핑크와 화이트로 단장되어 있어, 그곳에서는 잠시 자신이 잃어버린 젊음을, 거짓이지만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되찾을 수 있었다. 미용사 루시언이 뜬구름 잡는 말들을 건네도 귀 기울여 들어주고 적당한 대답을 돌려준다. 어쨌거나 루시언은 부인의 마음에 꼭 들도록 젊음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느껴지도록 머리칼을 매만져주니까.

그러나 텔레비전 방송에 나가기 위해 다시 그 미용실을 찾았을 때 그곳은 온통 은색과 적갈색, 회색, 검정색 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미용실은 더 이상 부인이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아주지 못했고, 다. 오히려 젊음의 생기를 잃고 늙어가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모든 것이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세월의 주름과 검버섯을 감춰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생기를 되찾기 위한 진한 화장과 과장된 머리단장은 우스꽝스럽고 수치스럽기만 하다. 부인은 손에 잡히는 대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내던져 미용실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어느 케이블TV에서 봤던가, 소위 ‘얼짱’이라 불리는 어느 아이는 미용실에 들르지 않고는 어떤 만남도 갖지 않는다고 강박적으로 말했다. 그 아이를 얼짱으로 변신시키는 곳이 바로 미용실이었다. 인위적인 가공 과정을 거쳐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얼짱이 된다고 한들, 그것이 그 아이에게 자신의 멋진 외모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느끼게 해줄까. 오히려 끝내는 자기 멸시에 이르지 않을까. 자기 본연의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는 얼짱으로 결코 나설 수 없을 테니까. 부인은 더 이상 억지스러운 젊음을 되돌리기 위해 미용실에 발걸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기만적인 아름다움이 필연코 흘려놓는 모욕의 허방을 딛고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절감했으니까.


예술작품

이 단편은 마티스의 그림 「집안에 깃든 정적」의 색채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된다. 여기에 「메두사의 발목」에서 수잔나 부인과 미용사 루시언이 마티스의 그림에 대해 나눈 대화 중에 언급됐던 로렌스 고윙Lawrence Gowing의 『마티스Matisse ; World of Art』(1985년 4월)가 다시 등장한다. 이런 작은 장치를 찾는 것은 독자로서 소소한 즐거움인데, 이 책이 실제로 존재했다! 어쩌면 바이어트는 고윙의 이 책을 통해 이 단편집의 영감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여성 잡지의 편집 기자쯤 되는(이 책에는 ‘디자인 편집자’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그녀가 하는 일로 짐작해 보건대) 데비는 색채에 대해 확연히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한다. 한 사람은 화가인 그녀의 남편 로빈으로, 그는 색채의 배열과 그것이 빚어내는 조화에 대해 아주 결벽적이다. 색깔의 이론적인 법칙에 따르지 않는 색채들의 집합을 참지 못한다. 또 한 사람은 데비가 자기 대신 가사를 보살펴줄 가정부로 고용한 브라운 부인으로, 그녀는 자연의 모든 색깔은 서로 어떻게 배열되어 있어도 조화롭다고 생각한다. 폭력적인 남편을 두고 두 아들을 양육해야 하는 브라운 부인은 남들이 쓰다 버린 폐품이나 잡동사니, 헌옷 등을 모아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손수 만들었고, 그렇게 만든 자기 작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세련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누구의 눈길이든 단번에 잡아챌 만큼 그 알록달록한,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색채의 향연으로 지나치게 화려해 보이는 것들을.

여기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이 질문은 다음 단편인 「중국산 바닷가재」에서도 이어진다. 「예술작품」에서는, 데비가 “뭔가 있는 모양이야”라고 말할 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남편 로빈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알선한 칼리스토 화랑이 로빈이 아니라 브라운 부인을 선택하는 것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어렴풋하게 보여준다. 데비는 취재차 화랑을 찾았다가 화랑의 불빛 아래 전시되어 있는 강렬한 작품들을 만나고 마음이 온통 뒤흔들린다. 곧 그녀는 그 작품들을 이루고 있는 재료들이 눈에 익고, 그것이 자기가 브라운 부인에게 버린 것들임을 눈치 챈다. 그리고 그녀는 가정부 브라운 부인이 아니라 ‘시바 브라운’이라는 여성 예술가의 이름과 마주한다.


중국산 바닷가재

「중국산 바닷가재」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좀더 직접적인 대담을 펼쳐 보인다. 이 대담의 발단은 페기 놀렛이라는 여성 미대생이 자신의 지도교수인 페레그린 디스를 편협한 지도 방식과 성희롱으로 고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대담을 펼치는 두 사람은 그 고발장을 받은 게르다 힘멜블라우 박사와 고발 대상자인 디스 교수로, 그들은 페기의 고발 내용, 가장 중요하게는 그녀의 세계가 예술인지, 예술이 아니면 무엇인지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페기와 페레그린은 마티스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페기는 마티스가 일종의 적의를 가지고 여성을 왜곡하여 표현했다고 주장하면서 마티스의 그림을 해체하여 원래의 의도(그러니까 여성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도록 재구성하는 패러디 작품을 선보인다. 그러나 마티스를 추종하는 페레그린은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일단 보고 나니까 본다는 것이 정말 순수한 힘으로 가득 찬 것”임을 깨닫고 생명의 힘을 얻은 사람이다. 당연히 그는 페기의 주장을 (페기가 모멸감을 느낄 만큼) 무시하고 페기의 작품을 “배설물”, 혹은 “똥을 뿌린 행위”에 불과하다고, 곧 절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는 “왜 하필 마티스입니까?”라고 울분을 토한다.

나는 예술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예술작품」에서는 시바 브라운에게 내 마음이 기울었다. 이 단편에서는 마티스의 그림들 중 몇 점은 아주 사랑하고 페기처럼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페기의 손을 들어주었다가(마티스라고 해서 성역이 될 수는 없으니까), 페레그린의 손목에 그어진 흉터를 엿보는 순간 그에게는 마티스가 생명의 힘을 다시 불어넣어준 성역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술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예술일 수도, 똥일 수도 있으니까. 이래서 주관이 개입되는 문제는 머리가 아프다. 머리를 굴리기 전에 심장을 따라야 한다. 그게 의외로 내게 꼭 맞는 정답일지도.


A. S. 바이어트는 결코 글을 쉽게 쓰는 작가가 아니다. 그녀의 소설을 읽는 일은 언제나 녹록지 않다. 지금 내 감상은 그녀의 섬세하고 치밀한 소설적 장치들을 무수히 놓치고 가장 눈에 띄는 파편만 건져올린 것이다.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이 소설은 제 모습을 무수히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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