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모아젤 보바리
레몽 장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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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처음 읽었을 때 마지막 책장을 쉽사리 덮을 수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 보바리 부부의 남겨진 어린 딸 베르트 때문이었다. 부모의 비극은 졸지에 베르트를 덮쳐 세상에 홀로 남은 아이의 앞날이 너무나 막막했다. 하지만 소설은 그 이후를 더는 보여주지 않기에 먹먹한 마음은 체기로 남았다. ‘그리고 베르트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그렇지만 베르트는 혼자서도 꿋꿋이 행복해졌다’고 눈물은 그렁한데 입은 활짝 웃고 있는 캔디 같은 뒷이야기를 도저히 이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레몽 장의 『마드모아젤 보바리』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체념하지 못하고 이상이라 믿은 환상을 좇다가 산산이 부서져 버린 엠마 보바리와, 선량하고 성실한 가장으로 조금의 불안도 없이 행복하다고 믿어온 현실의 발판이 허상이고 착각이었다는 걸 알고 절망한 샤를르 보바리의 죽음 이후 가난한 여공으로 고달프게 성장한 베르트를 등장시킨다.

플로베르를 찾아온 그 어린 여공은 자신이 ‘베르트’라고 말한다.

   
  저는 베르트예요.
베르트 보바리.
 
   

레몽 장은 그녀가 정말 실제 사건인 들라마르 부인의 음독자살에 영감을 받은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에 등장하는 베르트인지, 그저 자신을 베르트와 동일시한 것에 불과한지에 대해 모호하게 서술한다. 그녀는 자신을 『마담 보바리』의 약제사 오메의 아들 나폴레옹이라고 소개한 청년에게서 “네가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이미 여러 사람들을 거쳐 손때 묻은 『마담 보바리』를 건네받는다. 그리고 그 책을 무수히 읽은 그녀는 자기 부모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낱낱이 써서 만천하에 공개한 플로베르를 찾아간다. 웅장하고 위압적이지만 쓸쓸한 플로베르의 저택에서 그녀는 베르트로 플로베르와 교감하면서 달콤한 비극의 시간에 도취된다. 『마담 보바리』의 구절구절을 자기 이야기로 낭송하면서, 도덕과 종교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마담 보바리』 법정 공방의 무죄 선고를 우스꽝스럽게 연극하면서. 그러나 꿈결 같은 시간은 언제나 남루한 현실로 돌아가는 불안한 시간까지 예비해 두는 법이다. 방직공장 감독관과 수녀가 들이닥치면서 베르트의 짧은 꿈은 깨어지고 그녀는 행실 나쁘고 이미 여러 번 도망친 전적이 있는 가난한 고아 여공으로 돌아온다.

엠마 보바리가 지겨운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책(연애소설) 속 환상을 꿈꾼 것처럼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읽은 그 가난한 고아 여공도 자신이 보바리 부인의 딸 베르트라는 달콤한 착각에 빠진 것이 아닐까. 자신의 고달픈 인생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소설 속 베르트를 상상하면서 그 뒷이야기의 비극적인 주인공이 되는 꿈은 잠시 현실을 덮어버린다. 아픈 현실에서 행복한 상상은 아득히 멀게 느껴지지만, 더 아픈 상상은 그보다 조금은 나은 현실을 위무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상상이 만들어낸 환상 속에 머물 수는 없다. 언제고 현실은 환상 속의 나를 불러낼 무지막지한 힘을 가지고 있다. 힘겨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환상을 꿈꾸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 현실에서 한 발짝도 떨어질 수 없다. 이 명명백백한 사실은 걸핏하면 책 속으로 도망치는 내게도 경고하는 것만 같다. 여공은 베르트가 되고 나는 여공이 된다. 그러나 나는 나이고, 레몽 장의 여공은 레몽 장의 여공이고 플로베르의 베르트는 플로베르의 베르트일 뿐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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