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촌 골목길 한 어귀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좁은 입구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알 수 없는 장식(손님들의 증명사진, 낙서, 색종이 가랜드, 각종 팻말들…)이 가득한 한 어둑한 바가 있다. 그 바에서 나는 사람의 감정을 관찰하는 방법을 많이 배웠다. 아니, 사람의 감정이 저절로 관찰되는 순간들을 여러 번 경험했다고 해야 하나. 굳이 애쓰지 않아도 몽롱해지는 취기와 뿌옇게 뭉개지는 발음 속에서 사람들의 감정과 그 방향만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었다. 
상시적 애정결핍 상태에 처해 있었던 나는 그 예민하고도 귀중한 감각을 한시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감정의 역학에 내가 얽혀 있을 때에도 멍하니 모르는 체 하며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은 채 면밀히 감정들을 관찰하고, 음미했다. 그러고 있다 보면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일어나려다 말기도 했다. 사건의 발생이란 대개 어떤 사람이 그 자신의 의도와 전혀 상관 없이 잔인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일어났다.
잔인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다양했다. 나는 대체로 비겁한 쪽이었다. 술김이라는 핑계를 빌려 슬쩍 잡은 손을 술김이라는 핑계를 빌려 거칠게 뿌리치거나, 나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누군가의 정면을 모른체 하는 식. 바의 플레이리스트에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신청하거나 어떤 음악을 듣고 내가 생각났다고 고백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그저 그랬냐며, 얼버무린 대답만을 내어놓는 식.
그러나 어쩌겠는가? 사랑받고 싶은 마음(앞서 밝힌 '상시적 애정결핍 상태') 앞에서 나는 너무 쉽게 비겁해졌다. 비겁함은 사랑받고자 하는 그 얄팍한 의도를 잘도 숨긴 채 운명적인 잔인함으로 쉽게 오인되며, 잔인함은 아름다움으로 쉬이 오인되기 마련이다. 나는 어떠한 노력도 투자하지 않고 그저 모든 성의를 철회하는 방식만으로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룻밤만큼이라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오해받기를 바랐다. 나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눈 속에서 진짜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었으며 그 반대 방향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무서웠다. 외로움 때문에 외로운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상한 마음이다.

체와 앙헬은 나와도, 내가 만나 온 사람들과도 달랐다. 이 다름이 내가 경험해온 바의 예민함과 긴박함과는 다른 묘한 담담함과 순한 슬픔을 만들어낸다. 체의 진솔함은 비겁함을 허용하지 않는다. 앙헬은 체의 감정을 모른체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감정은 시효를 다한 지 오래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함께 나눈 몽롱한 과거와 함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고 이 거리가 신적 잔인함을 만든다. 나무를 향해 손을 뻗으면 무화과 나뭇잎이 멀어지며 말라붙게 한 신의 저주처럼, 신적인. (신적이라는 말은 우연적이라는 말과 가까울까, 필연적이라는 말과 가까울까?) 

"앙헬은 종종 다른 사람에게 끌리고 다른 사람에게 매력을 느꼈지만 믿음에 관해서는 오직 체뿐이었다."(99쪽)
"어던 상황이 벌어져도 체가 자신을 힘으로 제압하지는 못할 거라는 사실. 그 물리적 조건이 앙헬의 마음을 놓이게 했다. 
그렇기에 앙헬은 체 앞에서 취할 수 있었고 그녀와 단둘이 모텔에 갈 수 있었다." (99쪽)

아주 쉬운 말로 이 신적인 거리를 사랑과 우정 사이의 거리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우정이 서로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믿는 입장에서, 그런 표현을 쓰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앙헬이 체와 평생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 못하지만, 앙헬이 체를 평생 잊지 못하리라고는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가 그녀에게 잔인했던 만큼, 솔직하게 사랑받았던 만큼. 비로소 깨닫건대 사랑에 있어서 타인에게 어떤 사람에게 잔인해지는 일이란 그만큼의 순수함이 자신의 인생에 틈입해오는 것을 허용하는 일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순수함은 쉽게 잊혀지지 않고 (뒤늦은) 잔인함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 나를 순수하게 사랑한 사람에 대한 기억은 내가 사랑한 사람에 대한 기억과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여하튼 이 소설은 체에 대한 앙헬의 "감정적 잔재"(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21쪽)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읽히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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