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나는 살고 싶어, 정말*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
진진송
1.
요새 이런 꿈을 자주 꾼다. 직육면체 형태의 내 방이 점점 더 작은 직육면체가 되는 꿈. 점점 좁아져서 내 온몸을 옥죄이는 꿈. 그러면 꿈속의 나는 그 좁아지는 세계를 뚫고 나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벽면에 몸을 부딪는다. 부딪고, 또 부딪고, 또 부딪고, 어쩌면 속 시원한 느낌이 들 정도로 힘껏 부딪친다.
그러다 보면 알게 된다. 그 부딪치는 강한 힘 속에, 부딪혀서 죽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는 걸. 죽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은 이렇게나 다르지 않다.
이따위 세상 속에서도 사실 나는 살고 싶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해? 제기랄, 죽어버려. 자살해 버려.
2.
얼마 전 90년대생 여자들의 자살률을 다룬 유튜브 채널 《슬랩》의 영상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2020.11.12.)**가 SNS 등에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영상에 따르면 2020년 상반기에만 해도 20대 여성 전체의 32.1%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는 엄마 세대(1950년대생)보다 7배나 높은 수치다. 중앙대 적십자간호대 교수 장숙랑 씨는 일본 전후 세대 청년들이 그랬듯이 나이가 들어서 세대 자체가 모두 사망할 때까지 2030 여성들의 자살률이 높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2020년 3월 코로나의 여파로 20대 여성 12만 명이 일자리를 잃으며 생존 조건을 박탈당했다. 삶을 포기하는 여성 청년들과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조건들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3.
정세랑의 「옥상에서 만나요」는 『규중조녀비서』를 통해 남편을 소환하는 결혼의 공간이면서 각종 갑질, 성폭력으로 인해 회사 생활에서 떠밀려 나온 여성들이 자살을 고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설탕조차도 내가 점프를 생각하는 걸 멈추게 할 수 없었어. 달고 신 것으로 녹일 수 없는 나쁜 생각들이 있잖아.”, 『옥상에서 만나요』 92쪽.).
정세랑의 소설들이 ‘가볍고 산뜻하다’는 평을 받는 것과 달리 그의 소설들은 현실을 꽤나 숨김없이 냉혹하게 묘사하는 편이다. 회사 상사인 최 피디는 자신의 러시아 여자친구와의 쓰리섬을 나에게 제안하고, 나는 “사무실에서 일한 시간보다 룸살롱에서 접대한 시간이 훨씬 길”(위의 책, 94쪽)다고 말할 정도로 부조리한 회사의 문화에 시달린다. 이러한 현실이 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러한 현실을 정서적으로 깊이 파고들지 않는 정세랑 특유의 방식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런 현실이야말로 가장 흔한, 우리 사회의 ‘정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그만둘 수 없는데, 혈액 투석 중인 아버지, 류머니트 관절염으로 고생 중인 어머니, 우울증으로 추정되는 남동생으로 이루어진 가족 구성원 중 본인이 유일한 경제인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사회적 안전망이라고는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생존의 위협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와 친하게 지내던 세 명의 여성 직장 동료는 결혼을 택한다. 결혼이 주는 안정성은 “훌라후프”(위의 책, 97쪽)라는 상징을 통해 대표된다.
“결혼해서 막 좋은 건 아닌데…… 어쨌든 집에서 훌라후프는 돌아가.”
“훌라후프요?”
“결혼 전에 어릴 때 생각나서 훌라후프를 샀다가, 나 막 울었잖아. 원룸에서 아무리 자리를 옮겨봐도 훌라후프가 안 돌아가는거야. 싸구려 옷걸이나 부직포 서랍이니 온통 걸려서…… 이러니 저러니 해도 둘이 합쳐 살면 집에서 훌라후프 정도는 돌아가니까, 숨이 쉬어지더라고.”
(위의 책, 97쪽)
가족은 국가가 재생산과 부의 분배, 그것의 존속 등을 완전히 외주해 둔 집단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적 안전망 속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먼저 결혼의 길을 간 직장 동료들의 조언을 얻어 결혼을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선택은 우발적인 것이 아닌, 생존을 목전에 둔 “간절하고 신중”(위의 책, 102쪽)한 선택이다. 그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위의 책, 102쪽) 있다고 되뇌며 “변화”와 “탈출”, ‘계급 상승“(위의 책, 102쪽)등을 꿈꾼다. ”그 모든 것의 답이 결혼이 아닌 줄 알면서도“(위의 책, 102쪽).
그러나 『규중조녀비서』를 통해 소환된 남편은 그에게 안정을 가져다 줄 ’벤츠남‘ 같은 남자가 아니라 웬 외계인이다. 그 외계인은 절망을 먹이로 삼는데, 재미있게도 오히려 이 특성이 나로 하여금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된다. 외계인 남편이 나의 절망을 먹어치우면 나는 ”절망 프리“(위의 책, 110쪽)한 상태가 되고, 마치 도핑을 한 운동선수처럼 산뜻한 회사생활을 해 나갈 수 있다.
나에게 「옥상에서 만나요」는 잔인한 소설이다. 결혼이 아니면 사회적 안전을 전혀 확보할 수 없는 위치에까지 떠밀려 자살을 대신해 외계인 남편과 결혼을 하고, 그가 제공해 주는 ’도핑 효과‘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여자의 이야기. 물론 현실이 더 잔혹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현실에서는 나를 ’절망 프리‘상태로 만들어 줄 도구적 남편마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소설 속의 나가 죽지 않았다는 점에 희망을 위치시킨다. 세상에, 그녀는 죽지 않았다! 심지어 인간 남자와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살아 있다!
마치 가임기 여성 지도를 그려대는 나라에서 배짱 좋게 비혼을 선언하고,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물을 털어넣으며―나는 이걸 ’도핑‘이라고 부른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여자들처럼. 매일 죽겠다 죽겠다 말을 하지만 아직 진짜 죽지는 않았을 정도로 강하고 씩씩한 탓에 여지껏 살아 있는 그들처럼. 나도 그런 여자들 중 하나다. 그리고 나는 오늘 아침에 내가 (또) 뱉은 ’죽고 싶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나는 살고 나는 살고싶어, 정말.
*애리 〈나는 깜빡〉의 가사 중 일부
**https://www.youtube.com/watch?v=qyXWtE7Os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