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의 미술
손수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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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책은 국민일보 문화부 기자인 손수호 씨가 서울을 비롯해 우리나라 전역을 돌아다니며 쓴 문화보고서입니다.  길섶이란 말은 길의 가장자리란 뜻이죠. 그런데 도로 주변의 미술이라고 하지 않고 길섶의 미술이라고 하니까 저는 언뜻 시골 논둑길처럼 사람들의 발로 만들어진 길이 상상이 됐습니다. 그만큼 정겨운 제목이었죠. 그런데 책의 내용은 저의 이런 상상과는 많이 벗어나 있어서 약간의 섭섭함도 일었습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미술은 대개는 발로 만들어진 길섶이 아니라 기계로 지어진 도로 주변에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런 아쉬운 인상을 뒤로하고 책을 펼치면 의외로 흥미있는 얘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세종로에 왜 세종대왕의 동상이 없는가에 대한 대답이라든가, 세종대왕을 제치고 들어선 충무공의 동상이 왜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에 대한 에피소드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부산 태종대에서 자살을 마음 먹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린 모자상의 얘기, 한빛은행 동대문지점의 한벽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벽돌 부조가 민중미술의 기수였던 판화가 오 윤의 작품이었다는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길섶을 답사하는 문화 저널리스트의 발걸음은 전방위로 펼쳐지고 있는데요, 안양에서는 병원을 갤러리로 장식한 신병원을 소개하고 있구요, 천안 삼거리에서는 아르망 페르낭데즈가 자동차의 차축을 9백 99개를 쌓아만든 '머나먼 여정'이란 작품이 설치된 내력을 펼쳐보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쇠락한 탄광도시에서 광부화가 황재형 화백이 고한성당의 벽면 30미터에 두달 동안 밤낮으로 작업해 완성한 '삶의 벽'이 얘기해주는 광부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이나 유홍준의 문화답사기 이후 떼지어 몰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이전의 풍치를 잃어가는 소쇄원의 얘기도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2부에는 서울의 고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에 대한 얘기들이 실려있습니다. 가을에 특히 아름다움이 더한 창경궁은 임경업 장군이 간신 김자점에 의해 몽둥이에 맞아죽었고, 장희빈이 사약을 받아 죽은 곳이며 뒤주에 갖힌 사도세자가 가엾게 죽어간 장소라는 저자의 설명을 듣고나면 왠지 오싹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게 합니다. 덕수궁은 애초에는 지금의 경향신문사에서 태평로에까지 이어지는 큰 궁이었으나 하나, 둘 쪼개지고 미국대사관에게 자리를 내줘 허리를 잘리고 왜소해져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중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고 들어야할 대목은 서울의 정궁이면서도 제대로 복원되지 못한 경희궁의 복원을 주장하는 얘기일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단어가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그동안 길섶에 말없이 서있던 미술품들이, 한 저널리스트가 관심을 갖고 다가서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자 비로소 자신의 얘기를, 그동안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자신의 그 얘기를 하나씩 하나씩 펼쳐보인 것이죠.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어라'라는 듯이요. 달리 말하면 미술품들이 말 안하고 있어서 그렇지, 속으로는 다 자기 생각과 역사가 있다는 얘기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는데요, 우리가 침묵하는 미술품들로부터 아무런 얘기를 들을 수 없다면 우리는 영영 문화국민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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