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전주곡
나이오 마시 지음, 원은주 옮김 / 검은숲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예전에 ‘계간 추리문학’ 7호에서 “죽음의 서곡(序曲)”으로 소개된 것을 보고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바램을 가져왔던 작품이었습니다. 계간 추리문학에서 창간호부터 연재했던 장기 기획 시리즈인 ‘세계 추리문학사에 빛나는 걸작추리 안내’ 라는 코너였는데, 약간 생뚱맞게도 ‘서스펜스’ 장르 중 하나로 소개되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본격 미스터리’ 작품이고 전형적인 영국식 고전 미스터리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따라서 애거서 크리스티 스타일의 정통 미스터리를 애타게 기다려 오셨던 분이시라면 이보다 더 반가운 작품이 없을 것입니다. 본격 미스터리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저 역시도 읽는 내내 매우 행복하였고, 다 읽고 나서 큰 불만 없이 만족했던 작품입니다.

 

사건이 발생하는 특이한 상황 때문인지,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 사건이 발생하는 엘러리 퀸의 ‘로마 모자의 비밀’이 생각나기도 했고, 사건 현장이 연극이 벌어지는 무대라는 점 때문인지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제제벨의 죽음’이나 마이클 이네스(Michael Innes)의 ‘햄릿, 복수하라! (Hamlet, Revenge!/1937)’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대체적으로 폐쇄된 공간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나중에 사체가 발견되는 일반적인 작품들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공개된 장소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는 점이 꽤나 신선하게 다가온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범인의 여러 가지 노림수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혜안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연극과 관계된 인물들 사이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이들 연극 멤버들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기 때문인지 소설의 도입부서부터 마치 연극을 직접 보고 있는 것 같은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졌고, 소설 전체를 통틀어 보더라도 영국의 작은 시골마을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책 전체를 하나의 연극 작품으로 만들어 극장에서 상연하더라도 큰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작가인 나이오 마시는 작가를 하기 전에 연극계에 몸담았던 연극인이더군요. 그러한 생생한 경험이 그대로 녹아든 작품이었던 셈입니다.

 

영국 추리소설에선 셜록 홈즈 같은 사립탐정이 사건 해결을 담당하는 경우가 상당수를 차지하는 반면, 사법당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찰을 직접 탐정 역으로 내세우는 전통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유구합니다. 우선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커프 경사가 있었고, F. W. 크로프츠의 프렌치 경감, 애거서 크리스티의 배틀 총경,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코크릴 경감, 마이클 이네스의 애플비 경감, 조이스 포터의 도버 경감, 패트리셔 모이스의 티베트 경감, H. R. F. 키팅의 고트 경감, P. D. 제임스의 애덤 달그리시 경감, 콜린 덱스터의 모스 경감 등등 숱한 명탐정이 존재했죠.

 

이 책에 등장하는 로더릭 앨린 경감 역시 영국 추리소설을 대표하는 명탐정 중 한 명인데요. 도로시 세이어즈의 피터 윔지 경이 찰스 파커라는 형사를 친구로 두고 있는 것처럼, 친구인 신문사 기자 베스게이트를 사건 수사 중에도 곁에 두고 있는 것이 특이하게 다가왔습니다. 보통 경찰과 신문기자는 서로 정보 공유를 꺼리는 앙숙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앨린 경감을 관찰한 개인적인 느낌은 P. D. 제임스의 애덤 달그리시 경감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P. D. 제임스가 탐정 캐릭터를 정할 때 많이 참고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추측해 봅니다.

 

작품의 품질은 발표연도가 1939년이라는 황금기 본격 미스터리로선 비교적 늦은 시기에 발표된 작품치고는 대단히 오소독스하고 전통을 고수하는 느낌이 강한 작품이었습니다. 사실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로 접어드는 시기라면 미스터리 작품들도 많이 닳고 닳아서 영악해질 대로 영악해질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이 작품 ‘죽음의 전주곡’은 독자들에게 중요한 카드를 억지로 감추려 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다 내놓는 정직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단서가 정직하고 공정하게 잘 제시되기 때문에 조금만 머리를 써보면 범인을 맞추기는 그다지 어려운 작품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런데도 저는 사건이 모두 해결될 때까지 정작 트릭의 비밀은 깨닫지 못하는 맹한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는데요. 마치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녹색은 위험’ 때처럼 간단하면서도 깔끔한 트릭인지라 읽으면서도 나름 감탄했던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입체감 있고 생생하게 잘 묘사 되고 있어서 꽤 긴 분량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심리나 행동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읽는 동안 크게 지루하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영국 전원의 한적한 풍경에 둘러싸인 고지대 숲속의 외딴 저택과, 교회를 둘러싼 목사관 및 교구회관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쓸쓸한 늦가을(?)의 정경 속에 사나운 비바람마저 몰아치는 가운데 울려퍼지는 우렁찬 죽음의 피아노 소리! CCTV와 CSI 등으로 인해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고전 미스터리의 낭만적이고 조화로운 세계가 이 책 속에 온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고전을 사랑하는 본격 미스터리 팬들에겐 견딜 수 없이 즐거운 시간을 선사해 주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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