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볼품없는 남자였다.
적어도 첫눈엔 그랬다.
"저기."
그가 땟국에 전 엄지와 검지로 낡아빠진 빨간 야구 모자의 챙을잡아당기며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기가 여인숙으로 가는 길이 맞나요?" - P19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운명 같은 순간이었다. 그날 나는 그길로노스 로라를 향해 뒤돌아 집으로 가서 저녁 준비를 해도 됐다. 아빠와 오그 이모부에게 세스가 한 소리 듣든 말든 다 놀고 알아서집에 올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있었으니까. 아니면 최소한메인 스트리트에서 길이라도 건너가 이따금 다니는 자동차와 노랗게 물들어 가는 미루나무를 사이에 두고 걸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고, 그로써 세상의 모든 게 달라졌다. - P22

부모님이 내 앞에서 애정 표현을 하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지만, 둘만의 고요한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었음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형언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그날 얼마 뒤에 집 안으로 들어와 우리 남매에게 어머니의사망 소식을 알리던 아빠의 사무적인 눈빛을 보면서 나는 또 한가지를 배웠다. 사랑은 오로지 두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 커지는감정이며, 두 사람 사이에서 애도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라는 걸.
부모님의 사랑은 감춰진 보물처럼, 은밀한 시처럼,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로지 두 사람의 것이었다. - P24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어도 우리 존재는 탐스럽게 잘 익은 복숭아를 조심스럽게 수확하듯 신중하게 형성되는 게아니다. 끝없이 발버둥 치다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거둘뿐이다. - P38

이 소녀도 다름 아닌 나였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끼며, 내가 평생 걸었던 이 길을, 전에는 생각도 못 했던 방식으로 우리는 함께 걸었다. - P39

특유의 아름다움과 창창한 미래를 빼앗아 짓밟았다는 면에서,
매시 아저씨의 매끈한 자동차를 망쳐놓은 기차 사고와 오그 이모부를 망쳐놓은 전쟁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1년 뒤, 우리가족에게서 캘 오빠, 비비언 이모, 우리 어머니를 앗아간 사고도그와 똑같은 짓을 했다. 나는 파멸의 집요함이 어떤 것인지 너무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다. - P53

기억을 돌이켜 보면, 본성이 선한 오빠는 옛날부터 제각기 흘렀던 우리 가족의 개울을 하나의 강으로 통합하는 합류점이었다. 오빠는 이따금 어머니를 웃게 만들었고, 기꺼이 아빠의 일을 도왔다. 일머리가 좋았던오빠의 일솜씨는 빼어난 품질의 복숭아를 제외하면 아빠의 유일한 자랑거리인 것 같았다. 오빠는 세스의 넘치는 에너지를 플라이낚시나 자동차 수리와 같은 유용한 일에 쏟아붓게 만드는 법을 알았고, 심지어 몇 마디 대화만으로 세스의 성질을 누그러뜨리기도했다. 그리고 내게는 까진 무릎에 호, 하고 입바람을 불어주는 유일한 사람, 친구가 필요할 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P61

그날 밤 잠에 따져드는 순간까지 내가 그토록 간절히 소원했던 건, 여자도 자기가선택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해줄 사람이었다. 물론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도 내 편을 들어줬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딸이 누릴 수 있는 이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실제로는어땠을지 모르지만 머릿속에서만큼은 어머니를 확고한 내 편으로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 P66

무슨 일이 됐든 캘 오빠가 그렇다고 하면 나도 그렇게 했다. 캘 오빠는 똑똑하고 착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뭔가 재밌는 말을 하거나 웃긴 행동을 할 때마다 캘 오빠의 두눈이 작은 초승달처럼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았다. 내게 캘오빠는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나침반 같은 존재였다. - P75

어제 그의 눈동자에서 내가 본 것은생각지도 못한 부류의 남자 한 명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새로운 내 모습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의 나를 포기하고 싶지않았다. - P100

그러나팔을 뻗어 향긋한 냄새를 들이마시고 보드랍게 잘 익은 복숭아를가지에서 하나씩 비틀어 딸 때마다 꼭 윌이 나를 지켜보는 것만같았다. 나중에야 알았다. 정말로 윌이 몰래 보고 있었다는 걸. 그날 한낮의 햇살이 황금빛 잎사귀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내 살갗에닿아 노랗게 빛났다고, 내가 큼직한 복숭아를 깨물었을 때 팔뚝을타고 과즙이 줄줄 흘렀고 팔꿈치에 맺혀 있다가 뚝뚝 떨어졌다고과즙이 묻어 반짝반짝 빛나는 내 입술이 마치 자신의 입술을 부르는 것 같았다고, 나중에 윌이 말해주었다. 그때였다고, 그때 자기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그랬다. 내가 복숭아를크게 한 입씩 베어 물 때마다, 자기가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텁수룩한 나무 사이로 툭툭 눈길을 던질 때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고 윌은 말했다. - P110

루비앨리스는 미친 사람도 악마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월도 그랬다. 윌은 구릿빛 피부의 나그네일 뿐이었다. - P121

월과 사랑을 나누는 건, 아주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곳에 도달한 듯한 느낌이었다. 윌의 품에 안겨 있을 때만큼은 평생 꿈도보지 못한 모든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의 품에 안긴 나는 아름다운 여자, 매력적인 여자, 심지어 조금은 위험한 여자였다. 농가를•떠나 온 하룻밤 사이에 나는 그전까지의 순종적이고 소심한 소녀•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위험을 감수하는 여성이 되어 있었다. - P130

"세스 같은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아."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사와 날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대답이었다. 그러나 안심은커녕 불안만 커지고 말았다. 그건 윌의 말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윌이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간다 한들 세스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어디로 간들 세스처럼분노로 가득한 사람, 피부색이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려는사람이 없겠는가? 윌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 P143

도무지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진실을 외면할 순 없었다. 무고한소년을 포용하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우리가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블랙 캐니언이 윌의 깊고 끔찍한 무덤이 되어버린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이 마을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진실을. - P151

그러고 보니 아빠는 기분이 좋을 때도 아무리 화가 날 때도 내 이름을 빅토리아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집을 나간이 여자애가, 빅토리아라는 이름의 이 젊은 여자가, 자기 딸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갈 힘이없는 건 토리다. 윌의 여자, 빅토리아는 얼마든지 전진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강인한 여성이다. - P167

열두 살의 내가 어머니 없는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였던 것처럼 이제는 어머니로서의 삶 속으로 한걸음 내디뎌야 했다. 나는 필요의 부름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몸을 일으켜야 했다. - P184

몸집이 가장 큰 곰부터 아주 작은 곤충까지, 또 씨앗이 싹을 틔우고꽃을 피우기까지, 탄생하고 견디고 시드는 만물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숲속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윌이 줄곧 내게 알려주고 싶어 했던 진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둥글게 솟아오른 배를 두팔로 감쌌다. 그러면서 내 아기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 형언할 수는 없지만 나 또한 그 일부라고 느낀 어떤 무한함을 나는 단단히 끌어안았다. - P187

세상에는 슬픔을 넘어서는 슬픔, 펄펄 끓는 시럽처럼 아주 미세한 틈으로도 스며들어 버리는 그런 슬픔이 있다. 그런 슬픔은 심장에서 시작되어 모든 세포로, 모든 혈관으로 스며들기 때문에 그런 슬픔이 한번 덮치고 가면 모든 게 달라진다. 땅도, 하늘도, 심지어 자기 손바닥마저도 이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야말로 세상을 바꿔버리는 슬픔이다. - P209

거실로 들어간 나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나를 바라보는 루비앨리스의 움푹 꺼진 한쪽 눈에는 연민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옆에 불룩하고 거친눈은 무슨 일을 겪었든 이제는 다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 P221

나는 아이올라를 사랑했던 것처럼 코라 언니를 사랑했다. 그러나 비극과 슬픔은 아이올라에 대한 내 모든 믿음을 좀먹었다. 텅빈 노점에 마지막 판자를 못 박으면서 할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속삭였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굳이 사과하지 않았다. 코라 언니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아빠가 무덤 속에서 차분하고 편안하게 누워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코라 언니나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하든 아빠라면 내가 모든 기억을 지우고 동네를 떠나 도망칠 기회를 틀림없이 지지해 줬을 것이다. 내가 과수원만 제대로 건사한다면, 그거면 될 터였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할 계획이었다. - P241

모슬린 베개와 자수액자 속 정교한 바느질 한 땀 한 땀에, 저 높이 달린 흰 선반 위 도자기 십자가에, 참나무 탁자 위 하얀 도일리 한가운데 놓인 어머니의 애장품 담청색 꽃병에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빠가 들여왔던 번쩍번쩍한 밤색 라디오에는 아빠가, 손수 만든 체커판에는 캘 오빠가, 비비언 이모가 가장 좋아했던 의자에는 이모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남자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을 거라고 호언했다. - P255

루비 앨리스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노파는 흔들리는 손을 내 쪽으로 뻗고서 비단 같은 손끝으로 내 손목을 어루만졌다. 우리의 작고 기이한 우정덕분에 자기도 외롭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P257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아쉬움이, 평생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 곧 물속에 잠겨버릴 풍경에대한 아쉬움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너무나 잔인한 무지의 동네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엔 외로운 노파를 악마라고, 아름다운 구릿빛 피부를 지닌 소년을 비열한 무법자라고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 P258

과수원땅에 생긴 거대한 구멍들이 마치 찢긴 상처 같았다. 나무가 뽑히고흙이 찢기고 바위와 뿌리가 떨어져 나가면서 과수원 땅이 무혈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훗날 이곳에 물이차오르면 마지막 숨마저 고통스러워할 과수원 땅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내가 산에서 얻은 가르침이 있다면, 그건 땅은 지속된다는것, 필요한 때가 되면 인간의 어리석음을 없애고, 가능할 때 제모습을 되찾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었다. - P279

새로운 삶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지난날의 선택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의심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지금을 지나야만 그다음이 펼쳐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가 없고 초대장이 없더라도 눈앞에 펼쳐진 공간으로 걸어 나가야만 한다. 그건 윌이 가르쳐주고, 거니슨강이 가르쳐주고, 내가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마주했던 곳인 빅 블루가끊임없이 가르쳐준 진리였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내가 나아가야할 다음 단계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고, 나는 그걸 믿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 P281

사람들이 묘지를 나설 때 나는 참석해 준 모든 이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지난 일을 잊고 내 손을 잡아주었다. 만약 윌의 장례식을 열 기회가 있었더라면 이들 중 몇 사람이나 왔을지 궁금해졌다. 그래, 전부 다 오지는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대부분은 참석했을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내가 마을 사람들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 것들, 잊고있었던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굵은 눈물방울이 되어 두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 P282

뿌리째 뽑힌 내 나무들이 새로운 곳에서 온갖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빌어먹을 온갖 불행이 닥치더라도 나 역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P284

예전에 윌이 여기나 저기나 똑같다고 했을 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말은 그렇게하지만 월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이제는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나를 받아줄 곳이 아무 데도없으면, 모든 곳은 그저 아무 곳도 아닌게 된다. - P295

서서히 이곳에 정착해 가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차를 몰고 계곡을 따라 노스포크강이 거니슨강과 합류하는 로저스 메사로 갔다. 거기서 나는 세이지와 야생 꽃과 버드나무가 잔뜩 드리워진 오솔길을 걷다가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린 뒤 차가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두 강이 하나로 합쳐지는 정확한 지점에 서 있었다. 강물이 합류할 때 들리는 거친 물소리가 두 강의 오랜 대화를제외한 다른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나는 미끄러지지 않으려고돌멩이를 발가락으로 움켜쥐고 곧게 서서 물살에 맞서 균형을으며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맑은 물이 내게 뭐라고 했는지 내가 다 이해했다고 할 순 없다. 그러나 그 모든 말이 사실이었다는것만큼은 틀림없다. - P303

숲속에 가만히 앉아 얼룩덜룩한 햇빛을 받으며 케케묵은 이끼와 소나무 냄새를 맡았고, 여기저기서 윙윙거리고 재잘거리며 수다 떠는 소리를 귀담아들었다. 나는 하루하루 내가 선택한 삶을 만들어나가고 있었고 그건 좋은 삶이었다. 내게 없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내 앞에 놓인 것들에 감사했다. - P309

세스의 지독한 성질과 그로 인한 슬픔이 내 기억을 잠식해 버린 나머지 어머니에게 사과의 선물로 줄 버드나무 십자가를 정성껏 만들있을 그 꼬마를, 나는 하마터면 떠올리지 못할 뻔했다. 어머니는그 십자가 두 개를 다 소중히 간직했다. - P266

우정이란 게 무엇인지 잘은 모르지만, 욕심 내지 않고 서로의 장점을 바라본다는 면에서 나는 우리가 좋은 친구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젤다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어려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했던 그날, 나는 정말 정말 가슴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비난 없이 담백하게 자신의 얘기를 하는 젤다가 너무나도부러웠다. - P337

"나한테 숨기는 게 무엇이든, 말하든 말든 그건 자기가 알아서할 일이에요. 그렇지만 두 가지만 얘기할게요. 하나, 빅토리아가강한 사람이라는 건 나도 잘 알아요. 나무도 구하고 농장도 운영하고 열심히 일하고 걷고... 뭐든 혼자서 척척 잘 해낸다는 거.
그래도 슬픔을 혼자 짊어지고 사는 건 강인한 게 아니에요, 빅토리아. 그건 누가 봐도 벌이야.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든 자신을 비난하는 것만큼은 멈췄으면 해요." - P340

"윌의 죽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에도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렇지만 사건을 추적하지는 않았어요. 그때는 평등권도 없었고, 원주민들을 위한 법이랄 것도 없었고, 그들이 어떤 일을 참고 견뎌야 했는지 아무도신경 안썼어요. 지금도 달라진 게 별로 없고요. 잘 알잖아요" - P407

잘못한 것 없는 무고한 소년에게 세상은 어떻게 그토록 편협하고 끔찍했는지, 나는 여전히 공포를 떨쳐내지 못한 채 멍하니 수프를 저어댔다. - P408

개울을 따라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은 마치 이끼로 뒤덮인폭포 같았다. 폭포의 음악 소리와 안개 낀 바위를 쫓아 언덕을 내려오는 내 걸음은 사슴처럼 경쾌하고 단단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불현듯 궁금했다. 숲속 황야를 인간처럼 서투르게 걷지 않고 숲속생물들처럼 편안하게 걷는 법을 익힌 건. 숲이 바위투성이라서, 너무 미끄러워서, 너무 가팔라서 걷기 힘든 땅이 아니라 없어서는안 될 소중한 땅이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 P415

내게 닥친 일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마주하며 살아왔다고,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며 살아왔다고 말해줄 것이다. 어떤 존재가형성되기까지는 시간이라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해줄 것이다. 윌이 가르쳐주었듯이 흐르는 강물처럼 살려고노력했지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말해줄 것이다. 물론 걸림돌을 무릅쓰며 멈추지 않고 흘러왔다는게 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강물처럼 나 역시 나를 다른 존재들과 이어주는 작은 조각들을 모으면서 살아왔고,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손바닥에는 흙 두 줌이 쥐여져 있고, 심장은 여전히 삶을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나라는 존재를 형성한 건내 고향이었다. 떠나보낸 가족, 떠나보낸 사랑, 몇 없는 친구, 나를살아가게 해준 나무들과 내게 안식처를 제공해 준 모든 나무, 여기까지 오면서 마주한 모든 생명과 내 어깨에 내려앉은 모든 빗방•울과 눈송이와, 하늘을 가른 모든 바람, 내 발이 닿은 모든 굽잇길•과 내 손과 머리를 얹은 모든 곳과 지금 내 앞에 있는 것과 같은 모든 개울, 모든 생물과 조화롭게 주고받으며 산비탈에서 쏟아져 나 오고 중력을 얻고 소용돌이치며 다음 굽이로 밀고 나아가는 개울 이라는 고향.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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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대가족을 원하지 않았다. 가끔 화가 나면 당신을양동이에 넣어서 물에 빠뜨려 죽이겠다고 했다. 어렸을 때 당신은 슬레이니강으로 끌려가서 어머니가 당신을 양동이에 넣어 강둑에서 던지는 것을, 양동이가 잠시 둥둥 뜨다가 가라앉는 장면을 상상했다. 당신은 나이가 들면서 그 말이 그냥 하는 말임을 알았고, 너무 끔찍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가끔 끔찍한 말을 했다. - P15

유진이 여행 가방을 들고 가자 당신이 그를 따라 나간다. 벚나무가 휘어진다. 바람이 강할수록 나무도 강해진다. - P21

누군가가 괜찮냐고 묻지만 정말 바보같은 질문이다-당신은 또 다른 문을 열었다가 닫을 때까지,
칸막이에 안전하게 들어가 문을 잠글 때까지 울지 않는다. - P27

"그저 물러서서 마음대로하게 놔둬야 해요. 실수하게 내버려둬야 하죠. 그게 힘듭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큰 일을 당할 뿐이에요." - P39

그녀는 자기인식이란 말의 너머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대화의 목적은 스스로 이미 아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모든 대화에 보이지 않는 그릇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야기란 그 그릇에 괜찮은 말을 넣고 다른 말을 꺼내 가는 기술이었다.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나누면 더없이 따스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고, 결국 그릇은 다시 텅 빈다. 그녀는 인간 혼자서는 스스로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 너머에 진짜 앎이 있다고 믿었다. - P61

어째서 상처보다 부드러움이 사람을 훨씬 더 무력하게 만들까? 그의 손은 건조하고 따뜻하다. - P60

공황이 덮치지만 시간이 지나자 평화로운 무언가로 바뀐다. 왜정반대는 항상 이렇게 가까이 있을까?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고음, 듣기 싫게 찢어지는 소리가 되기 직전의 그 음 같다. - P157

얕은 물가에 이르자 해변으로 기어 올라가 모래 위에 쓰러진다. 그가 힘들게 숨을 쉬면서 주변을 둘러보지만 조류가 그의 옷을 가져가 버렸다. 그는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온 최초의종을, 그들에게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지를 상상한다. - P158

마거릿은 바람이 세찬날을 기다렸다가 날 수 있을 줄 알고 보일러실 담벼락에서 우산을 펴고 뛰어내렸다가 도로에 떨어져 발목이 부러졌다. 성인이 된 다음에도 근거 없는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그렇게리 증명된다면 좋았을 텐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대체로 어둠속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 P190

그녀는 안으로 들어와서 누구도 해치지 않고 누구도 자신을 해치게 두지 않으면서 이 집에서 최대한 오래 살겠다고 결심했다. 자신이 누군가를 해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생기면 그녀는 다시 이사할 것이다. 여기까지 온 경로를 이어 배를 타고 아란 제도로 건너가서 아일랜드의 최서단으로 옮길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최선을 다해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자. - P191

그녀는무엇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이미 일어난 과거를 말로표현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였다. 과거는 곧잘 배신을 했고, 천천히 움직였다. 자기만의 속도로 결국은 현재를 따라잡을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뭘 할 수 있을까? 후회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고 슬픔은 과거를 다시 불러올 뿐이었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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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이 말이 제 생활신조입니다.
저는 사람도 물건도 검박하고겸손한 면모를 좋아합니다. - P8

"어떤 삶에도 햇빛이 닿으면그늘지는 부분이 생기잖아요.
그늘을 끌어안아야 삶이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 P9

남이 나를 위로하지 않아도
남이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남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오롯이 온전한 내 인생이니
나를 중심에 두고
내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아야겠지요.
내가 없어지면
온 우주가 멸망하잖아요. - P11

영국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희곡 <햄릿>에이렇게 썼지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여러 선택지 앞에서 결정하기를 어려워하는 증세를 ‘햄릿증후군hamletsyndrome‘이라 부르지요.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햄릿증후군을 겪고 있어요. 가령점심 메뉴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직장인이 많습니다. 어떤 식당에 갈지, 어느 학교에 진학할지, 이 남자를 계속 만나도 될지, 신혼집은 어디로 구하는 것이 좋을지, 아이를낳아야 할지 등 선택이 필요한 순간마다 부모님과 친구에게 혹은 심지어 온라인 커뮤니티에 답을 구하는 사람들도있습니다. - P71

인생에서 중대한 결정이라면 당연히 신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소한 일조차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스스로 선택한 결과에 실망하는 게 두려워 미리 피하려는 심리일까요? 저도 무언가를선택할 때 망설이곤 합니다. 다가올 위험을 줄이고 싶고,
여유가 없어서 그렇기도 해요. 모두가 앞만 보고 달리니한 번 넘어지면 그것을 만회할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불안이 늘 저를 따라다닙니다. 불안이 선택 앞에서 저를 주저하게 만듭니다. - P72

완벽한 결정은 없어요. 잘못된 결정도 역경도 인생의 일부입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다음에 만회할 기회가 있음을 믿어보세요. 다음 기회가 없었다면 세상의 모든 위인전은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 P73

젊은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자신을 들볶지 말고 자기 한계를 긍정할 때 자존감이 회복된다고. ‘이래야 해‘라는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발목 잡히지 말라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편안함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세상에 하나뿐이라고. 익히 들은 말일 수 있지만 정말 그렇다고. - P82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내세상의 한계다"라고 말했지요. 오늘은 내 마음에 노크하고들어가 내 마음이 무슨 빛깔인지, 어떤 몸짓을 하고 있는지언어로 표현해봐야겠어요. - P86

"긴장을 푸는 나만의 루틴을 만드세요."
이왕이면 오늘 하루를 하기 싫은 것보다 좋아하는 것으로 채우는 것이 좋겠지요. 저는 자연 친화적 시간을 보내는걸 저만의 루틴으로 만들었어요. 어떤 일이 저를 긴장하게만들면 ‘멍‘ ‘소리‘ ‘하늘‘ ‘햇살멍‘을 때립니다. 가만히 한군데에 집중하다 보면 교감신경이 진정되는 듯해요.
스트레스를 받은 후 관리하는 방법도 있지만 사전에 자극을 받아들일 여유 공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 P89

혐오성 발언과 낙인찍기는 분열을 증폭하고 대화와 이해의 토대를 약화합니다. 편견과 차별을 정당화하고 소수자를 향한 공격을 부추기지요. 이 모든 것은 결국사회적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훼손해 사회 전반의 신뢰와 협력 기반을 무너뜨립니다.
독일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그의 시 〈후손들에게>에서 ‘관대한 마음‘을 노래했지요.
저는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싶지도 않고, 목이 아프도록 싸우고 싶지도 않습니다. - P148

"괜찮아. 나아질 거야." "힘내. 용기 잃지 마." "혼자만 그런 거 아니니 좀 참아봐." 이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듣는이의 입장에서 숨통을 더 막는 소리니까요. 헤겔이 말했잖아요.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있다."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와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봐주는 것.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위로일 때가 있습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있어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얼어붙은 마음이 녹기 시작합니다. - P157

반년을 이탈리아에서 살았는데, 그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
‘밀라노 할머니‘도 없었을 거예요. 번아웃이 온 사람들이제게 길을 물어온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절대로 서두르지 말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상태, 가장 잘할수 있는 일을 찾을 때까지 자신을 다독이며 기다리라고요.
자기 시간을 가지라고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라고요. 샘물도 다 퍼 올리면 다시 차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지 않나요? - P171

외롭지 않은 인간은 없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인간의 근원적 외로움은 남이 달래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저 스스로 견딜 뿐. - P181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쓰지 마세요. 자기 마음도수습이 안 되는데 남의 마음을 어떻게 수습하겠어요. 모든이유를 내게서 찾으며 자신을 괴롭히지 마세요. - P255

내가 타인을 자유롭게 해줘야 나도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해주는 마음, 그게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우리 사회에 행복한 개인주의자가 더 많아졌으면좋겠어요.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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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정조 - 유교 문명국의 두 군주 창비 한국사상선 2
세종.정조 지음, 임형택 엮음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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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최근 들어서 본의 아니게
<징비록>, <난중일기> 등을 비롯해서
한국사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필사까지 하고 있다.

그렇게 한 권 한 권,
도장깨기를 하듯 읽다가
이번엔 창비의 한국사상선 시리즈 중
<세종 정조>를 만나게 되었다.

흥미 위주, 판매 위주의 책들이
넘쳐나고 있는 시점에서,
더 나은 세상과 문명을 위해
한국사상이 갖는 잠재성을 공유하며
의미 있는 보탬이 되려 하는 실천이
멋지면서도 감사하게 느껴진다.

창비 한국사상선을 통해
조선의 가장 훌륭한
두 임금님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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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피로 쓴 7년의 지옥.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치욕은 반복된다, 책 읽어드립니다
류성룡 지음, 장윤철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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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쓴 7년의 지옥.
임진왜란의 참혹함에 너무 끔찍하고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다 났다. 죽은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 굶주림에 가족의 인육을 먹는 사람들.. 어쩌다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의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모든 일을 직접 처리했기에 이렇게 자세하게 전쟁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는 <징비록>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한 원인을 밝히고 그 과정을 기록했다. 높은 자리에서 국정을 다룬 사람으로서의 반성과 앞으로 이런 실수를 답습하지 말아야 할 것을 후대에 바라는 당부가 함께 들어 있다. 류성룡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번에 징비록을 읽으면서 임진왜란이 이렇게 어이없는 전쟁이었다는 사실에 황당함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었다. 전쟁을 앞두고 대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 겁에 질려 도망가기 바빴으니 왜에 점령당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무인들이라는 사람들은 제 목숨을 부지하느라 알몸으로 달아나기 일쑤였다. 왕은 제일 먼저 도망가기에 바빴다. 선조가 이렇게나 빨리 도망갈 줄은 몰랐다며 일본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징비록>에는 그 와중에도 의롭게 맞서 싸운 이들이 몇 명의 위인들, 의병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이름과 활약에 대해서도 나왔다. 정말 귀한 정신과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은 청렴함과 기개, 용기, 지도력, 정의로움 등 알면 알수록 더욱 존경하게 된다. 곧 <난중일기>를 읽을 계획이다.

아래 영상에서는 징비록을 5분 만에 정리하였는데, 반드시 책을 읽어야만 그 절절하고 끔찍한 전쟁의 과정을 살펴볼 수가 있다고 본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쓴 것이므로, 선조에 대해 대놓고 뭐라 할 수 없었으나, 중간중간에 기록된 선조는 의로움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자기 살 길만을 찾기 바쁜 비겁한 모습이었다. 선조의 망언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괜히 조선 최악의 왕이 아니구나 싶었다.

선조는 나중에 본인의 안위를 위해 류성룡까지 내쳤는데, 류성룡은 고향 안동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여러 차례 선조가 사과하며 불렀지만 응하지 않고 조용히 고향에 머물렀다고 한다. <징비록>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고향에서 머무르면서 9년간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귀한 책을 왜 그동안 읽지 않았을까.
학교에서 한 책 읽기 도서로 선정하여 읽어도 좋을 책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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