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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뷰를 쓰기 전엔 어떠한 독자의 리뷰나 심지어 번역자의 해설도 읽지 않는다. 오직 작품에서 느낀 나만의 순수한 인식을 적어보고 싶어서다. 그렇게 나의 감상을 적고 비교적 여유로운 기분으로 다른 독자들이나 비평가들, 번역자의 해설을 읽고 나의 생각과 비교하는 것은 나의 일상의 큰 기쁨 중 하나이다. 이번에도 그 기쁨을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어떠한 해설이나 리뷰로부터 나의 감상이 오염(?)될 가능성을 피하고자 다소 두서없더라도 작품을 읽고 내 생각을 바로 작성해본다.)
고독한 얼굴의 세계는 도처에 잠재적 추락의 위협이 깔려있고 예측불가능하다. 소설 도입부의 교회 지붕 위에서 빗자루가 떨어지고 작업부 게리가 추락 위험에 처한다. 그리고 암벽 위에선 바위가 떨어지고 등반가가 추락한다. 마치 그 세계는 예측 불가능한 추락이 디폴트값인 것 같다. 또한 이 작품의 세계는 마치 무표정한 암벽들과 같이 개인들에게 무관심한 세계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그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헤어지고, 희망하고, 절망한다. 그리고 누구나 근본적으론 고독하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홀로 우뚝 선 암벽 면들(solo faces)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 앞에서 고독한 우리의 얼굴들(solo faces)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고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랜드는 왜 산에 오르는가?’ 주인공인 랜드(뿐만 아니라 다른 등반가들 역시)가 추락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면 중독처럼 보이는 등반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그 질문과 연관하여 또 하나의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왜 랜드는 항상 떠나는가?’ 랜드에게 정말 두려운 것은 암벽에서의 추락만이 아닌 것 같다. 랜드에겐 결혼과 정착이, 즉 캘리포니아와 파리로 상징되는 얽매인 삶 자체가 일종의 추락이라고, 아니 추락보다 더 두려운 것이라고 직감하는 듯하다.
“카트린, 당신은 내 인생이 어떤지 알잖소”
“무슨 뜻이에요?” 잠시 후에 그녀가 덧붙였다.
“원하는 게 뭐죠? 계속 이대로 살고 싶은 거에요?”
“계속 똑같이 살 순 없겠죠. 1년 뒤, 2년 뒤의 나는 지금과 같지 않을 거에요.”
“뭐가 되어 있을 건데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난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166쪽)
이 지점에선 예기치 않게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떠올린다.
‘언제나 똑같은 생활이었다. 하루를 살면 하루 더 죽어가는 그런 삶이었다. 한 걸음씩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한 걸음씩 산을 내려가고 있었던 거야. - <이반 일리치의 죽음>(문학동네) 103쪽
이반 일리치에게 죽음을 앞두고 찾아온 인식을 랜드는 이미 깨닫고 있는 듯하다. 인생이라는 추락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등반하는 것처럼 보여서 작품은 다소 종교적인 색채까지 풍긴다. 작품 곳곳에서 샤모니와 드뤼는 성지처럼, 랜드는 성지를 순례하는 수행자처럼 묘사된다. 가령,
나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네. 그는 캐벗에게 편지를 썼다. 난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잃었어. ...
랜드를 변화시킨 것은 고독뿐만 아니었다. 또 다른 깨달음도 그를 변화시켰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174쪽)
위와 같은 구절에서 종교적인 분위기를 감지하지 않긴 어렵다. 랜드에게서 거의 구원의 가능성까지 엿보이는 인상적인 구절이다. 다만, 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남아있다. 랜드에게 등반은 단지 일상적 삶에 대한 도피일 뿐인가? 무의미한 삶이 등반을 성스럽게 만드는가 아니면 등반이 일상에서 의미를 빼앗아가고 떠날 수 밖에 없게 만드는가?
여기까지는 작품을 읽고 내게 떠오른 피상적인 인상일 뿐이며, 그 밖에 다른 독자들과 의견을 공유하고 싶은 주제가 작품 전반에 가득하다. 예를 들어, 랜드가 캐벗의 아내 캐럴에 대해 가졌던 감정은 무엇인가, 랜드가 조난당한 이탈리아 산악인들을 구조한 것은 어떤 이유였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캐벗에게 삶의 남은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불구가 된 캐벗을 만난 후 랜드의 삶에 구원의 가능성은 있을까 등등... 위 질문들에 대한 생각을 다른 독자들이 전달해준다면 이번 독서 경험에서 더욱 소중한 선물이 될 것 같다.
추가로 문체에 대해 얘기해보자.
제임스 설터의 문체는 간략하고 함축적이며, 문장과 문장 사이 의미의 여백이 커서 마치 문장들 그 자체가 암벽에 드문드문 박힌 홀드와 같았다. 예를 들어,
그날 늦게 몇 시간 동안 별 움직임이 없던 두 사람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얼음 때문에 로프가 닳아 해졌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위에 로프가 잘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걸 아는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들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에는 한 점의 색깔이 제자리를 벗어나서 암벽을 따라 아주 천천히-거의 사뿐히 내려앉듯이-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가 외쳤다.
“누가 떨어졌어!”(157쪽)
위와 같은 문장들은 쉽게 읽기 힘들다. 마치 암벽 등반하는 것처럼 한 문장, 한 문장에서 숨을 고르게 되고, 때론 다시 이전 문장들로 돌아가기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작품 속 세계가 때론 적대적으로, 때론 포용적으로 느껴지다가 어느새 고독함에 깊이 전이되기도 하고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디선가 문장의 리듬과 호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문장이야말로 작가와 독자의 신용거래라고 하였다. 이번 독서를 통해 수년 전 제임스 설터의 단편집 <어젯밤>을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고 나는 그의 스타일에 대한 신용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장편이든 단편이든 제임스 설터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 헤밍웨이도 많이 거론되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제임스 설터와 가장 비견될만한 작품은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이라고 생각한다. 서사뿐만 아니라 문체를 통해 그 작품의 세계와 정서에 전염시키는 작가는 흔치 않으며 그러한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은 분명 인생의 큰 행복 중 하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