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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삶의 상처와 상실감을 치유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 소설집 속 인물들은 고독과 쓸쓸함에 직면하고 삶의 구멍들에 빠져 무기력하다. 때론 그 구멍들을 메우기 위해 애쓰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폭력에 휘말리기도 한다.
첫 번째 작품인 <구멍>은 이 소설집의 전체의 인트로처럼 느껴졌다. 주인공은 어릴 적 함께 잔디를 깎다가 친구인 탈이 폐하수관으로 이어지는 구멍에 빠져 죽는 사고를 겪는다. 그 사고 경험은 주인공에게 다양한 버전의 기억과 꿈으로 변주되는데 그 중 ‘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p.15)’ 꿈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결국 그 구멍은 주인공에게 메워질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될 것이라는 예감과 함께 짧은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나에겐 이 결말이 끝이 아니라 시작처럼 느껴졌으며, 이어지는 다른 소설들의 주인공들도 마치 이 사건을 겪었던 것처럼 읽혀졌다. 그들은 각각 삶에 어떤 구멍을 지니고 살고 있는가?
<코요테>와 <폭풍> 그리고 <코네티컷>은 공통적으로 가정에서 아버지의 부재라는 구멍과 그것이 그의 가족들에게 안긴 상처를 이야기한다. 실패한 다큐멘터리 감독이며 방랑벽을 지닌 <코요테>의 아버지의 부재는 주인공과 가족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같이 가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저 수영 팀이에요’(34쪽)라는 주인공의 답변은 삶의 구멍을 안고 살면서도 일상을 지키는 일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폭풍>의 주인공은 누나와 어린 시절 테라스에 앉아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지난날의 늦여름 오후를 그리고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245쪽)을 회상한다. 삶에 구멍이 생기기 이전 행복했지만 이젠 되돌아갈 수 없는 유년 시절의 기억은 아버지의 부재가 가져온 가족의 상처와 선명하게 대비되어 삶의 쓸쓸함을 부각시킨다.
한편 <아술>에서는 아버지가 아닌 아이의 부재를 다룬다. 주인공 남편 폴의 불임으로 그의 아내 캐런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결혼 생활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교환학생을 집으로 들인다. 하지만 주인공은 교환학생인 아술이라는 타인의 존재가 주는 낯섦과 껄끄러움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주인공 폴이 섣부르게 라몬을 파티에 초대해 파국을 불러일으킨 행동은 그의 불임으로 부부 생활의 난관을 초래했던 아픈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것만 같다. 아술이 자신들의 아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폴과 캐런 사이에는 아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확인하려는 것처럼.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주인공 헤더는 약혼남이 채워주지 못하는 구멍을 로버트 교수를 통해 메우려고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깨닫고 평생 허전함을 안고 살게 된다. 헤더가 지닌 구멍은 콜린의 부족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헤더 본인의 마음의 문제였을까?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그러한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구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혹은 그것을 모른 척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나의 중요한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125쪽)
어쩌면 헤더가 이야기하는 그녀의 중요한 또 다른 일부는 애초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콜린과의 만남 이후에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역설은 우리의 영혼에 충만과 결핍을 동시에 준다는 것이다. 마치 빛이 파동이기도 물질(입자)이기도 한 것처럼.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그러한 사랑의 역설을 극복하거나 우회하지 못한 상처 입은 영혼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이 소설집에서 다른 소설들과 달리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작품이 있다. 바로 <머킨>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씁쓸함을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린의 가짜 애인 역할을 맡아오며 린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상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린과의 새 출발을 암시하며 이야기는 끝나며 우리는 그 두 연인이 꿈꿔온 유럽 여행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희망의 가능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짐작건대 호세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주인공의 공감 능력일 것이다. 들리지 않는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드문 능력이야말로 우리 비루한 삶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작품은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