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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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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편이나 에세이와 달리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을 읽는 것은 내겐 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는 일이다. 난 평소에 여러 책들을 동시에 읽는 초병렬 독서가이지만 하루키 장편을 읽을 때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야기에 몸과 마음이 온전히 푹 빠지기 때문이다.
이번 신간도 진작에 사전 예약주문으로 구매했지만, 표지만 보고 책장은 넘기지 않는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내 안에서 이야기에 빠져들 시간이 무르익길 기다리는 것이다. 마치 최상급 와인을 따지 않고 눈으로만 그 맛과 향을 상상하는 것처럼. 그러다 첫 눈이 내리고 겨울이 되자 자연스럽게 책에 처음 손이 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속으로 숨 참고 독서 다이빙! 덕분에 요 며칠 천천히 아껴 읽으며 하루키 월드에 푹 빠져 행복했다. 그리고 이제 이 리뷰를 쓰며 책장을 넘기며 느꼈던 감정들과 단상들을 되돌아본다. 마치 주인공이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를 그리워하듯이.


익숙한 하루키 월드

역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도 우리에게 익숙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티브들이 가득하다. 몇 가지만 예를 들자면,

1. 스스로를 평범하게 여기는 주인공

무라카미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외적인 기준으론 대부분 평범한 삶을 살며 스스로도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눈엔 꽤나 독특하고 때론 매력적인 인물인데, 정작 자신은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의 다자키 쓰쿠루가 가장 대표적이다.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는 분명 자신의 특별함을 인식하고 있는 느낌이지만, 《태엽감는 새 연대기》의 오카다 도오루, 《기사단장 죽이기》의 주인공 역시 스스로를 지극히 평범하다고 인식한다.

[나로 말하자면 가족에 대해 네게 해줄 만한 이야기가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부모님은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아버지는 제약회사에 다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부모처럼 행동하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부모처럼 말한다. 나이든 검은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운다. 학교 생활에서도 특별히 이야기할 만한 부분은 없다. 성적은 나쁜 편이 아니지만 이목을 끌 만큼 우수하지도 않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이번 작품의 주인공 역시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으로 여기지만, 직장 후배 오키로부터 의외의 평가를 받는다.

[오키는 조금 뜰을 들이다가 말했다.
"괜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저한테 선배는 예전부터 좀 신기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예측 불허라고 할까, 종잡을 수 없다고 할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2. 순수하고 폐쇄적인 관계

스스로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자신이 속한 관계의 안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 와타나베 노루와 나오코, 기즈키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으며,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의 나고야 5인방도 그러하다. 또한 《태엽감는 새 연대기》와 《기사단장 죽이기》의 주인공들의 부부관계도.
이번 작품 역시 주인공 나의 티없이 순수한 사랑은 대상인 너에게 말을 거는 형식으로 아름답게 묘사되고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신비롭게 형상화된다.

[요컨대 누구에게도 - 이 세상 어떤 사람에게도 - 방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와 너는 둘이서 보내는 시간만으로 충분히 만족하기에 다른 무언가를 곁들이고 싶은 생각이 없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3. 사라지는 소중한 것들

그러나 그러한 순수한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발단은 누군가의 죽음(《노르웨이의 숲》)이거나 또는 외도(《기사단장 죽이기》), 혹은 따돌림(《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모티브는 사라짐이다. 《태엽감는 새 연대기》에서 주인공의 아내가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 주인공이 짝사랑한 스미레가 영문도 모르게 사라진다. 어떠한 경우든 결국 주인공은 홀로 남겨지고 깊은 고독에 빠진다. 그리고 그 사라진 것을 되찾으려는 주인공의 분투가 이 세계의 경계를 넘어 다른 세계로 이끈다.
이번 작품에서도 예외없이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갑자기 사라진다. 물론 여자친구에게 심리적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순 있지만 결국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주인공은 30년 가까운 세월과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로의 이행을 거쳐야한다.

[그렇게 나는 너에 대한 모든 단서를 잃고 만다. 아무래도 너는 나의 세계로부터 소리 없이 퇴출된 모양이다.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설명다운 설명도 없이. 그 퇴출이 너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어떤 불가향력이 작용한 결과(이를테면 차가운 바닷물이 문을 부수고 쏟아져들어오는 것에 맞먹는)였는지는 모른다. 남은 것은 깊은 침묵과 선명한 기억과 이뤄질 수 없는 약속뿐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4.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경계

그렇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엔 두 개 이상의 평행 세계를 병치하여 이야기를 구성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댄스 댄스 댄스》의 호텔 이루카의 엘리베이터, 《태엽감는 새 연대기》의 빈집의 우물, 《1Q84》의 수도고속도로의 비상계단, 《기사단장 죽이기》의 집 뒤편의 돌무덤. 이것들은 모두 이쪽 세계와 완전히 다른 혹은 비슷하지만 결코 같지 않은 저쪽 세계로 통하는 일종의 통로 역할을 하는 곳이다. 각 작품의 주인공들이 그 통로에 근접할 때 이야기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 현실 세계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통로 역할을 하는 장치들이 등장한다. 바로 현실 세계의 땅에 파인 구덩이, 그리고 벽 도시의 물 웅덩이가 그곳이다. 특히, 1부 말미의 물 웅덩이에 대한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이 작품의 백미 중 하나이다.

[웅덩이의 상태는 지난번과 다를 게 없다. 아름다울 만큼 맑고 푸른 물, 잔물결 하나 없이 평온한 수면, 깊은 밑바닥에서 단속적으로 들려오는, 목이 막힌 양 쿨럭거리는 소리. 때때로 불온한 헐떡거림이 섞인다. 동굴로 빨려들어가는 대량의 물이 내는 소리다. 그 밖에는 아무 소리도 없다. 바람도 멎었다.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주위에는 순백의 눈이 소리 없이 내린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나는 생각했다. 감동했다, 라고 해도 좋다. 나는 이 풍경을 아마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선명하게 기억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풍경의 온갖 세부가 뇌리에 고스란히 재현될 것이 틀림없다.
머릿속에서 현실과 비현실이 격렬히 싸우며 뒤엉켰다. 나는 바야흐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경계에 와 있다. 이곳은 의식과 비의식의 얇은 젋면이고, 나는 어느 세계에 속해야 할지 지금 바로 선택해야 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경계에 대한 묘사는 심지어 에세이에서도 나오는데, 그리스와 터키 여행기인 《비 내리는 그리스에서 불볕천지 터키까지》(원서 제목은 《우천염천》)에서 나는 세계의 경계에 대한 실로 매력적인 구절을 발견했다. 하루키는 그리스를 여행하며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이 있는 성스러운 아토스 반도로 가기 위해 페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라노폴리스와 다프니라는 두 마을 사이에 그러한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이 두 마을은 생겨난 과정이 전혀 다르고, 따라서 지켜야 하는 규범이나 가치관도 전혀 다르다. 살고 있는 사람들의 종류도 다르거니와 지향하는 방향도 다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라노폴리스는 질서 없이 어지럽지만 미워할 수 없는 우리 같은 속세의 인간들이 속한 마을인 반면, 다프니는 보편성과 청렴과 신앙으로 가득 찬 성스러운 영역에 속한 마을이다.
……
진한 선글라스를 쓴 수영복 차림의 여자가 고무 샌들을 끌면서 천천히 길을 가로질러 간다. 주위의 풍경과는 무서울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마이클 잭슨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그늘에서는 한 마리의 커다란 개가 생사의 경계선을 헤매는 듯이 깊이 잠에 빠져 있다. 배낭여행족이 하나에 45엔 하는 큰 무슈키로 빵을 소중하게 가슴에 안고 걸어간다. …… 이곳이 우리의 사소한 현실 세계의 작은 끝인 것이다.
이제부터는 여자도 없고, 타베르나도 없고, 마이클 잭슨도 들리지 않으며, 독일인 관광객도 없다. 이곳은 현실 세계의 막다른 장소이다. 욕망의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리얼 월드의 프런티어인 것이다.]
-《비 내리는 그리스에서 불볕천지 터키까지》

나는 개인적으로 이 여행 에세이 책의 그리스 편에 다른 세계에 대한 하루키식 설정의 열쇠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더 깊이 이야기할 수 없으니 하루키 월드에 대해 탐구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이렇듯 무라카미 하루키 매니아들이라면 작품 간 상호참조를 통해 밤새도록 질리지도 않고 하루키 월드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40년 넘게 놀랍도록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히 무라카미 법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마치 뛰어난 재즈 뮤지션처럼 매 작품마다 다채로운 변주를 선보이며 우릴 매료시킨다.


하루키 장편의 매력

이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어떤 매력적인 변주들을 보여주고 있는가?
수많은 독자들을 빠져들게 하는 하루키의 특유의 문체나 빛나는 비유, 심리묘사는 굳이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밖에 하루키 장편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는 바로 그의 장소나 배경 묘사이다. 먼저 누구나 빠져들만한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독자의 머리에 각인되어 쉽게 잊히지 않는다. 게다가 은연중에 도시의 정적이고 편안한 동시에 불길하고 자폐적인 분위기까지 전달한다. 또한 현실 세계 속 후쿠시마현 Z** 마을 역시 일본의 조용하고 정적인 어느 시골 마을의 겨울을 실감나게 떠올리게 한다.

주의 깊게 읽어보면 이 두 세계가 느슨한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먼저 각각의 세계에는 그 세계를 지키는 경계인이 있다. 벽 도시는 문지기이며 현실 세계에서는 도서관의 사서 소에다가 그 역할을 맡는다. 문지기는 도시의 벽을 지키고 유일하게 벽의 안과 밖을 넘나들 수 있다. 소에다 역시 현실 세계에 속해 있되 고야스의 유령을 볼 수 있지만, 관장실 앞에서 그 비밀을 지킨다. 둘은 모두 유능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다. 사족이지만 문지기의 손작두와 손도끼와 소에다의 금속테 안경(그녀는 안경 브릿지를 자주 만진다)이 가진 금속의 물질성이 그들의 캐릭터를 잘 드러낸다. 오행론에 따르면 금 기운은 결단력, 완벽함, 냉철함, 엄격함의 특징을 지닌다.

또한 벽 도시의 너(도서관 소녀)와 z** 마을의 커피숍 여자 역시 대칭을 이룬다. 도서관 소녀는 주인공의 소년 시절에 만난 과거의 사랑이고 커피숍 여자는 중년이 되어 만난 미래의 사랑이다. 도서관 소녀가 만드는 쑥 색깔의 약초차와 약초로 만든 연고는 주인공의 통증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역할을 하며, 커피숍 여자가 내어주는 블루베리 머핀과 커피는 주인공에게 피와 살이 된다. 한편으로 보면 이 작품은 주인공이 과거의 사랑을 미래의 사랑으로 전이시키는 이야기이다. 그 밖에 벽 도시에서는 단각수의 죽음 장면과 현실 세계에서의 고양이의 출산 장면이 대칭을 이룬다.

무엇보다도 하루키 작품의 특별함으로 개연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하루키 월드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독서 중 앞으로 이어질 내용을 예상하는 나만의 게임을 즐긴다. 예를 들자면, 이번 작품에서 1부의 말미에 나와 그림자가 물 웅덩이에 근접하면서 작품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데, 1부를 다 읽고 잠시 책을 덮는다. 그리고 2부가 어떻게 전개될 지 다양한 가능성들을 혼자 예측해본다. 그림자가 사라진 주인공에게 혹은 도시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그림자는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2부를 펼치면 충격적으로 그림자 시점이 전개된다. 모든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나는 그것에 전율한다. 게다가 이야기를 따라 갈수록 '그래, 이야기가 이렇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한다. 이 이야기의 어떤 내적 논리에 따르면 그러한 전개가 필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은 황당해보이는 초현실적 설정들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이 매우 높다.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이렇게 개연성이 높으면서 반전을 가진 작품은 흔치 않다.

나는 그의 에세이와 단편들도 사랑하지만, 이러한 매력들 때문에 그의 장편들을 가장 좋아한다. (적지 않은 독자들이 오히려 그의 장편보다 에세이를 더 좋아하지만.) 그리고 하루키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각종 기호들와 상징들의 의미를 파헤치거나 작가가 숨겨놓은 의도를 도출하는 일은 재밌을진 모르나 소득이 있을 가능성은 없다. 하루키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도식화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작가이며 아마 작가 본인도 그런 걸 모를 것이다.

[- 무라카미 씨 개인적으로, 사실 이건 이러저러한 걸 나타낸다, 그 전후관계는 실은 이런 의미다 하고 생각하는 것도 없나요?
무라카미 : 없어요. 전혀 없어요. 결국에는 말이죠. 독자들에겐 집단 지성이 있으니 그런 장치 같은 건 바로 들통나게 되어 있어요. 흠, 이거 작가가 일부러 깔아놓은 거구나 간파하죠. 그러면 이야기의 혼이 약해져 독자의 마음 깊숙이까지 가닿지 못해요.
쓰는 사람도 정답을 모른다. 그 막연하고 종합적인 이야기를 독자 역시 막연하고 종합적으로 받아들여주기 때문에 각자 나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전 "무라카미 씨, 이 부분은 이런 뜻이죠?"라는 독자의 물음에 "아뇨, 그게 아니라 이런 겁니다"라고 단언하지 못해요. "그렇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같은 말밖에 할 수 없어요.]
-《수리 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 가와카미 이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고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내게 준 표면적인 메시지만 남겨본다.

1. 완벽한 사랑은 둘 만의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 혹은 이야기를 구축하는 일이다.
2. 그것은 아름답고 유혹적이지만 자폐적이며 위험하기도 하다.
3. 따라서 아무리 많은 시간이 걸려도 언젠간 그 세계를 벗어나야 하며 그것은 다른 타인과의 만남을 필요로 한다. 사랑도, 이야기도.


하루키 독서의 추억

짐작하듯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매니아다. 그것도 열렬한. 하루키를 읽어왔던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스무살 때 《노르웨이의 숲》(당시 번역본 제목은 《상실의 시대》)을 처음 접했을 땐 그저 트렌디하고 재밌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어서 또 다른 장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고, 당시 중구난방으로 번역된 단편들과 에세이도 읽었다.

그 후 한동안 에세이를 제외하곤 하루키를 거의 읽지 않았다. 그 동안 시간이 흘러 취업, 결혼, 육아 등 삶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생기고 또 다양한 책들을 읽었다. (하루키 작품의 대다수 주인공들처럼 내가 책을 읽지 않은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다) 그러다 어느날 삼십대 중반이 되어 그 당시 막 출간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는데, 그게 20살 때 독서와는 달리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위로를 주는 것이었다. 연달아 《1Q84》와 《기사단장 죽이기》를 출간 직후 읽었는데 역시나 육아에 지친 저녁에 큰 힘이 되었다. 나름 그 사이에 독서 이력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게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학생 때 읽었던 많은 작가들로부터 졸업했는데, 하루키만은 오히려 예전보다 울림이 더 깊어진 것이다.

묘하게도 내가 읽을 때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나이를 비슷하게 따라가게 되었다. (20살 때 《노르웨이의 숲》, 30대 중반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 《1Q84》, 《기사단장 죽이기》, 그리고 40대 중반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그 사이 어느덧 하루키도 소설을 쓴 지 40년이 넘었고 나도 그의 작품을 읽은 지 20여년이 훌쩍 지났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무엇이 그렇게 나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작가 본인의 말을 들어보자.

[때는 원시시대, 인간은 동굴 안에서 공동생활을 합니다. 해가 지면 밖은 어둡고 무서운 짐승들이 있으니 다들 동굴 안의 모닥불을 둘러싸고 모이죠. 춥고 배고프고 불안하고…… 그런 때 이야기꾼이 나섭니다. 그 뛰어난 입담에 사람들은 흠뻑 빠져들어 슬퍼하다가, 설레다가, 화를 내다가, 소리내어 웃다가 하면서 곧 배고픔과 공포, 추위를 잊어요.
스토리텔러란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제게 전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먼 옛날 누가 "무라카미, 이야기 좀 해봐"하면 "그럼 시작합니다"했을 사람이죠(웃음). 꽤 반응이 좋아서 "그뒤에 어떻게 되는데?"라는 말에 "그건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뭐 이러지 않았을까, 그런 이미지가 제 안에 있어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고대 혹은 원시시대 동굴 안의 집합적 무의식 같은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느낌이 들어요.]
-《수리 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 가와카미 이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과연 그렇군. 나는 어느 순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은 장편 소설이라는 외피를 쓴 신화 혹은 동화와 같은 일종의 오래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강해졌다. 생존을 위한 험하고도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동굴이나 모닥불 근처에 둘러앉은 모습을 상상한다. 아마도 오랜 시간 인류는 이야기를 통해 하루의 긴장을 풀고 이야기의 힘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이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다 읽고 책장을 덮는다. 새벽은 깊고 모닥불도 꺼졌다. 동굴 안엔 찬바람이 불고 또 새로운 하루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가 고단한 현생에 위로와 힘을 준다. 다음엔 읽은 지 오래 되어 기억이 가물해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n번째로 다시 읽고 싶어진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가 꾸준하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남겨줘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도 안되는 이야기들

1. 위스키는 하루키 월드의 필수 요소 중 하나다.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 빠지지 않고 아일레이 섬의 싱글몰트 위스키 보모어12가 등장한다. 위스키 한 모금이 커피숍 주인이 자신에 대해 털어놓는 계기가 되고, 주인공과의 관계가 더 깊어진다.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볼수록 개성있고 매력적인 보모어12는 이야기 속 커피숍 주인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2. 홍차는 적어도 내 기억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에 등장한 적이 없다. (만약 있다면 누구 혹시 알려주실 분?) 고야스가 홍차를 우려서 주인공에게 대접하는 장면은 내게 좋은 홍차를 마시고 싶은 욕구를 강렬히 불러일으킨다. 홍차에 입문해볼까? 뭐 못할 것도 없지. 이미 하루키를 통해 위스키와 달리기에도 입덕했는데.

3. 위스키와 함께 하루키 장편의 필수요소 중 하나는 섹스 장면이다. 그런데 이번 장편엔 섹스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루키 월드에서 섹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쌓인 감정이 해소되는 카타르시스이기도 하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등장인물인 쥐의 소설에는 뛰어난 점이 두 가지 있다고 하였다. 섹스 장면이 없다는 것과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는 것. 일단 섹스 없는 이야기는 나왔는데 언젠간 사람이 죽지 않는 장편도 나올까?

4. 이번 작품에서 이야기 전반에 걸쳐 물과 불의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물, 불, 금속, 흙, 공기와 같은 물질의 이미지들은 오랜 기간 인류를 사로잡았고 지금도 동양에선 오행론에 토대를 둔 명리학, 서양에서는 4원소설을 바탕으로 한 바슐라르의 연구가 끊임없이 영감을 준다. 무리수이라는 걸 알지만 명리학을 공부하는 나로서는 문지기의 손도끼와 소에다의 금속테 안경이 주는 금의 물상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작품 속 물과 불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그것들은 인간에게 우호적이기도 하고 위협적이기도 한 양면성을 지녔다. 강은 주인공이 젊어지고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재생의 이미지가 있는 반면 젊은 시절 고야스의 아내를 삼켜버리며, 사과나무 장작을 태우는 난로불은 주인공에게 따뜻함과 몽롱함을 주지만 벽 도시에서 죽은 단각수들을 태우기도 한다.

5. 위 리뷰에서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장편 소설이 있다. 무엇일까? 바로 《해변의 카프카》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의 가장 대작이라는 《해변의 카프카》를 서재에 모셔두고 고의로 읽지 않고 있다! 하루키 월드에 빠지고 싶을 때 차라리 나는 이미 읽었던 장편을 n번째로 다시 읽는다. 인생은 유한하기에 무라카미 하루키도 언젠간 더 이상 신작을 낼 수 없을 것이고, 물론 나 역시 더 이상 책을 읽지 못하는 날은 필연적으로 올 것이다. 더 새롭게 읽을 수 있는 그의 장편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상상은 상당히 나를 허무하게 만든다. 마치 제일 소중한 선물은 포장지를 뜯고 싶지 않은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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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2-30 16: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리뷰를 읽은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한호석 2024-01-05 0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 글을 올려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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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고백하자면 나는 형철이형의 '빠돌이'이다. 형철이형(이 호칭엔 애정과 존중이 온전히 담겨있으니 부디 이해해주시길...)의 신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출간되지 않은 인터넷 상의 글들을 모두 찾아 읽으며, 그의 첫 단독 저서 <몰락의 에티카> 초판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인생 자부심으로 갖고 산다. (그렇다. 나는 방금 첫 단독 저서라고 썼다. 형철이형이 무려 대학생 학부 시절 공동 저서로 썼던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난 그것을 우연히 고등학생 때 구입했었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자세히 얘기하면 나 자신도 소름 돋으니 여기까지만 얘기하기로 하자) 따라서 나는 이 책에 대해 객관적 위치에서 평점을 매기거나 장단점을 열거하는 글은 쓸 수 없다. 그것은 빠돌이로서 취할 수 없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신간에 수록된 대부분의 글들을 한겨레신문의 격주시화 코너에서 이미 읽었다. 그렇지만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한 편씩 최대한 조심스럽게 아껴 읽었다. 다른 많은 독자들도 그랬을듯이.

프롤로그 '조심,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에 대하여'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란 짧은 시를 해설한 글인데 마치 책 전체의 예고편처럼 느껴진다. 이 글에서 강조하는 핵심적인 생각은 바로 '조심'이라는 말인데, 물론 이것은 저자의 갓 태어난 아이에게 그리고 부모가 된 스스로에게 쓴 글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땐 이렇게 조심하는 태도가 비단 아이와 부모가 된 자신에게만 한정되지 않는 것 같다. 삶 자체와 문학 작품을 대하는 형철이형의 기본적인 선언문처럼 내겐 들린다. 책 전반에서 이렇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고전 시가와 현대시, 외국시 등 다양한 작품들의 가치를 더 드러내준다. 힘 빼고 무리수도 두지 않고.

내가 형철이형의 글에 빠져들었던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론이라는 메스를 들고 작품을 완벽히 장악하고 해부하겠다는 폭력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조금이라도 시나 소설에 대한 감상을 써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것이 훨씬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정신분석학이든 해체론이든 페미니즘이든 이론을 먼저 떠올리고 작품의 일부를 그러한 이론 틀에 끼워 맞춰 해석하는 일은 오히려 쉽다. 물론 이론은 작품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작품이 이론을 위해 희생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형철이형의 글은 대부분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한다. 조심스럽게 작품을 읽고 조심스럽게 글을 쓰기 때문이다. 형철이형에게 우선 순위는 작품이다.

아니다. 형철이형의 최우선 순위는 작품도 아니다. 조심스러운 독서의 백미는 부록으로 실린 시인 최승자 론 '실패한 사랑의 역사를 헤치고'에서 두드러진다. (이 책에서 최승자 시인에 대한 글은 두 번 나온다. 1부에서 한번 나오고, 마치 무언가 마음에 걸려 더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부록에서 또한 번.) 90년대 이전의 최승자 작품과 이후의 작품의 변화에 대해 논하면서 시가 아니라 시인의 안부를 걱정한다. 나는 이 대목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랐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난 이런 종류의 문학 평론을 본 적이 없다. 일단 놀랐고, 그리고 순식간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렇다. 형철이형에게 최우선 순위는 시나 작품이 아니고 시인과 사람인 것이다. 나는 그 후로 '시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였다.

좋은 책에 괜히 쓸데 없는 얘기를 너무 많이 주절거렸다. 좋은 것은 사실 말이 필요하지 않고, 숨 막히는 듯한 떨림과 음미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책도 영화도 술도 사람도. 단 한 번이라도 형철이형과 미리 좋은 작품을 하나 정하고 직접 만나서 술 한 잔 기울이며 인생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상을 해본다. 날이 새고 술 병은 빌 것이다.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일 것이다. 김현 세대에 대해 더 이상 컴플렉스 없이 그 유산을 상속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우리도 우리 세대의 비평가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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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뇌과학 - 인간의 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라지는가
리사 제노바 지음, 윤승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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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대화하듯이 쓰여진 이 책은 기억에 관한 뇌과학의 상식을 문외한이라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하지만 책 말미에서 저자도 지적하듯이 독서를 하는 동안 이미 책의 많은 내용들이 나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버렸고 남아있는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하여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좋은 책이 그렇듯이 이 책 역시 중요한 주제에 대해 내 머리 속에서 생각의 스파크를 만들어주었고 나는 기억에 관해 몇 가지 테제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독서의 즐거움은 책의 내용에 대한 기억하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각과 관점을 갖게 해준다는 데에도 있다.


기억에 관해 떠오른 세 가지 단상들

1. 기억은 무엇보다 나 자신을 만들어준다.

내가 나인 이유는 무엇인가? 오직 기억을 통해 나는 자신의 과거와 인간관계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그것들에 의미 부여를 하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 병이 비극적인 점은 기억을 지움으로써 나 자신의 정체성을 지운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에 따르면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도 인간의 모든 감정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떠한 정체성일까?

2. 게다가 기억은 세계 자체를 만든다.

과거는 오직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기억 작용이 없다면 과거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과거가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는게 아니라 기억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라는 환상이 구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 작용이 없는 유기체에게 세계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3. 결국 모든 기억은 사라진다.

알츠하이머든, 죽음이든 모든 인간의 기억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언젠간 필연적으로 도래할 인류의 멸종과 인류가 간직했던 모든 기억이 사라지는 미래를 상상해본다. 어쩌면 기억과 망각은 인간이 짧은 순간 대여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또한 이 책은 실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의 기억을 풍성하게 가꿀 수 있는 많은 실용적인 팁까지 제공한다. 그 중 인상깊었으며 실천하고 싶은 몇 가지를 내 나름의 언어로 정리해본다.

삶에 관해 떠오른 세 가지 교훈들

1. 집중하고 참신한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자.

매사에 호기심을 가지고 새로운 시각으로 삶을 응시하는 시인이나 작가들은 특히 얼마나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의미 작용이 뇌에 얼마나 많은 신경 회로를 새로 만들어줄까. 이것은 일종의 재능이기도 하고 학습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2. 이벤트들을 자주 만들자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바라보는 능력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호기심과 주의집중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삶 속에서 특별한 이벤트들을 자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이미 이것을 실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념일들이 있고 창작물이든 종교든 스포츠든 나름의 서사에 몰두하며 살고 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어제는 기억에 거의 남지 않는다. 저자는 안 가본 도시로 휴가를 떠나보고, 가구 배치를 바꿔보고, 반년 일찍 생일을 축하하고, 안 가본 식당에서 식사를 해보라고 제안한다.

3. 글을 쓰자

글은 우리의 불완전한 기억에 대한 강력한 보완도구일 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앞에서 얘기한 집중이며 이벤트이다. 어떤 종류의 글이라도 좋다. 먹고 살기 바빠도 일상에 지지 말고 글 쓰는 습관은 유지하자.

인생은 짧은데, 그 이유는 살아온 시간들이 대부분 기억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100세 시대라지만 내게 얼마의 시간이 주어지든 그 시간을 얼마나 의미 있게 보내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 아닐까?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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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해석, 사주명리 - 예언에서 개입으로
안도균 지음 / 북드라망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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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이 생기거나 성찰이 깊어질 때 우리는 철학, 문학, 심리학 등 다

양한 학문들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명리학 역시 인생과 자아에 대한 탐

색의 단초가 될 수 있으며, 그래서인지 시중에는 수많은 명리학 입문서들이 출판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명리학 입문서들 중에서 이 책은 제가 읽었던 입문서들 중에서 명리학을 대하는 저자의 입장이 가장 흥미로웠던 책입니다. 





저자의 입장을 제가 이해한다로 다시 풀어쓰자면 명리학은 이과적 학문인 통계학이 아닌 인문 학문인 기호학 또는 해석학으로, 인과적 연쇄에 묶인 자연과학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일정 부분 개입하는 정치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명리학을 일종의 기호학 내지 해석학으로 접근하는 이러한 입장을 저자보다 오히려 더 래디컬하게 밀고 나간다면 '기표와 기의는 자의적이다'라는 언어학자 소쉬르의 언어의 자의성 테제와 맞닥뜨릴 수 밖에 없겠구나. 즉, 사주팔자와 운명은 자의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주팔자와 운명의 자의성 테제는 명리학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말까요? 아니면 명리학의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줄까요? 실로 매우 위태로운 질문입니다. 


답을 찾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작년에 전원주택을 짓고 올해 주택에서 변화무쌍한 연월일시에 예전보다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며 사계절을 온전히 보냈습니다. 봄에는 나무와 꽃을 키우며 천지와 내 본성의 인()이 감응함을 보았고, 여름에는 잔디를 깍고 풀을 뽑으며 양의 기운이 극에 달했음을 보았고, 가을에는 낙엽을 쓸며 자연의 숙살지기를 느끼고, 겨울에는 눈을 치우며 극에 달한 음의 기운 속에서 수 기운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세력을 아침마다 확인하며 내 생활 속 발생하는 상황들의 의미를 조금 더 숙고하게 되었고, 원국표를 보며 주변 사람들의 성향에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명리학은 마치 문학이나 철학처럼 머리로 이해하는 학문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학문임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아직 내공이 부족하여 명리학이 저에게 줄 수 있는 가르침은 이 정도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삶은 무척 풍요로워졌습니다.


여전히 우리 앞에 펼쳐질 앞날과 인생의 의미는 우리에게 수수께기입니다. 명리학을 포함해 어떠한 인간의 지적 노력도 그 수수께기에 대한 답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수수께기에 대한 성찰과 숙고입니다. 저자의 명리학에 대한 참신한 접근법은 그 성찰과 숙고를 위한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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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이 생기거나 성찰이 깊어질 때 우리는 철학, 문학, 심리학 등 다

양한 학문들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명리학 역시 인생과 자아에 대한 탐

색의 단초가 될 수 있으며, 그래서인지 시중에는 수많은 명리학 입문서들이 출판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명리학 입문서들 중에서 이 책은 제가 읽었던 입문서들 중에서 명리학을 대하는 저자의 입장이 가장 흥미로웠던 책입니다. 





저자의 입장을 제가 이해한다로 다시 풀어쓰자면 명리학은 이과적 학문인 통계학이 아닌 인문 학문인 기호학 또는 해석학으로, 인과적 연쇄에 묶인 자연과학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일정 부분 개입하는 정치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명리학을 일종의 기호학 내지 해석학으로 접근하는 이러한 입장을 저자보다 오히려 더 래디컬하게 밀고 나간다면 '기표와 기의는 자의적이다'라는 언어학자 소쉬르의 언어의 자의성 테제와 맞닥뜨릴 수 밖에 없겠구나. 즉, 사주팔자와 운명은 자의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주팔자와 운명의 자의성 테제는 명리학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말까요? 아니면 명리학의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줄까요? 실로 매우 위태로운 질문입니다. 


답을 찾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작년에 전원주택을 짓고 올해 주택에서 변화무쌍한 연월일시에 예전보다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며 사계절을 온전히 보냈습니다. 봄에는 나무와 꽃을 키우며 천지와 내 본성의 인()이 감응함을 보았고, 여름에는 잔디를 깍고 풀을 뽑으며 양의 기운이 극에 달했음을 보았고, 가을에는 낙엽을 쓸며 자연의 숙살지기를 느끼고, 겨울에는 눈을 치우며 극에 달한 음의 기운 속에서 수 기운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세력을 아침마다 확인하며 내 생활 속 발생하는 상황들의 의미를 조금 더 숙고하게 되었고, 원국표를 보며 주변 사람들의 성향에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명리학은 마치 문학이나 철학처럼 머리로 이해하는 학문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학문임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아직 내공이 부족하여 명리학이 저에게 줄 수 있는 가르침은 이 정도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삶은 무척 풍요로워졌습니다.


여전히 우리 앞에 펼쳐질 앞날과 인생의 의미는 우리에게 수수께기입니다. 명리학을 포함해 어떠한 인간의 지적 노력도 그 수수께기에 대한 답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수수께기에 대한 성찰과 숙고입니다. 저자의 명리학에 대한 참신한 접근법은 그 성찰과 숙고를 위한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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