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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ㅣ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평점 :
지금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도착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장벽을 넘어야 할 것입니다. 70여 년 세월의 장벽을, 그리고 소설 속 등장인물과 현실의 독자 사이의 장벽을. 둘 중 소설과 현실 사이에 놓인 미학적 장벽을 넘는 일은 꽤나 상상력과 공감 능력을 요구했지만, 역사의 장벽은 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세계에서 유일한 냉전 분단국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비극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이 사실이 당신에게 위로가 될까요? 절망이 될까요?
당신이 떠나고 지난 세월 동안 북쪽의 공화국은 여전히 당은 틀리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으며, 이제 광장은 우상 숭배의 극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반면 남쪽의 공화국에선 밀실에서 뛰쳐나와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서 우리들의 광장을 조금 넓혔으며, 광장을 사유화하려는 정치가들을 상대로 승리하는 경험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큰 악은 너무 커서 단죄할 수 없으며, 작은 악은 큰 악에 가려져 악으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자 한계가 아닐까 하는 씁쓸한 체념이 듭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냈던 인천의 분지와 부산 전선의 동굴은 마치 나의 추억이라도 되는 듯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은애와의 애가 타던 시간들, 초조하게 은혜를 기다리던 순간들은 분명 애틋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당신처럼 우리도 몸의 길을 따라 사랑하고 욕망하며 살고 있고, 그것만은 북쪽의 사람들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정말 우리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요?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의 희망이 덧없듯이 사랑도 한낱 우리의 덧없는 희망이 아닐까요? 당신의 사랑은 이뤄지지 않아 오히려 완성된 아름다운 비극이 아니었을까요? 아마도 정 선생님이 미라를 통해 본인도 모르게 당신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교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삶과 사랑의 덧없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지금 당신이 몸을 던진 남중국해를 떠올립니다. 그 크레파스보다 파란 색깔의 바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도 사랑도 사라지고 남은 우리 존재의 본래의 색깔일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우리의 욕망을 투여할 대상이 남아있지 않을 때, 그리하여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없을 때, 바로 그때 불현듯 그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의 어두운 심연의 색깔. 우리는 그 인생의 무의미함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랑하여 가족을 이루고, 일과 돈에 중독되고, 취미를 만들고, 소확행을 추구하는 등 끊임없이 관심 대상을 찾으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영혼의 영양제를 섭취하듯 그 어두운 심연을 가끔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철학도였던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하이데거는 이 무의미의 심연과 인간의 유한성이 우리에게 존재론적 불안(angst)을 불러일으키며 불안이야말로 우리의 근본기분(grundstimmung)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인생의 무의미함과 유한성에 대한 성찰이 우리의 인생을 더 충실하게 살게 하는 것인지 나는 알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전히 당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당신을 애도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