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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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고백하자면 나는 형철이형의 '빠돌이'이다. 형철이형(이 호칭엔 애정과 존중이 온전히 담겨있으니 부디 이해해주시길...)의 신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출간되지 않은 인터넷 상의 글들을 모두 찾아 읽으며, 그의 첫 단독 저서 <몰락의 에티카> 초판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인생 자부심으로 갖고 산다. (그렇다. 나는 방금 첫 단독 저서라고 썼다. 형철이형이 무려 대학생 학부 시절 공동 저서로 썼던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난 그것을 우연히 고등학생 때 구입했었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자세히 얘기하면 나 자신도 소름 돋으니 여기까지만 얘기하기로 하자) 따라서 나는 이 책에 대해 객관적 위치에서 평점을 매기거나 장단점을 열거하는 글은 쓸 수 없다. 그것은 빠돌이로서 취할 수 없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신간에 수록된 대부분의 글들을 한겨레신문의 격주시화 코너에서 이미 읽었다. 그렇지만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한 편씩 최대한 조심스럽게 아껴 읽었다. 다른 많은 독자들도 그랬을듯이.

프롤로그 '조심,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에 대하여'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란 짧은 시를 해설한 글인데 마치 책 전체의 예고편처럼 느껴진다. 이 글에서 강조하는 핵심적인 생각은 바로 '조심'이라는 말인데, 물론 이것은 저자의 갓 태어난 아이에게 그리고 부모가 된 스스로에게 쓴 글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땐 이렇게 조심하는 태도가 비단 아이와 부모가 된 자신에게만 한정되지 않는 것 같다. 삶 자체와 문학 작품을 대하는 형철이형의 기본적인 선언문처럼 내겐 들린다. 책 전반에서 이렇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고전 시가와 현대시, 외국시 등 다양한 작품들의 가치를 더 드러내준다. 힘 빼고 무리수도 두지 않고.

내가 형철이형의 글에 빠져들었던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론이라는 메스를 들고 작품을 완벽히 장악하고 해부하겠다는 폭력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조금이라도 시나 소설에 대한 감상을 써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것이 훨씬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정신분석학이든 해체론이든 페미니즘이든 이론을 먼저 떠올리고 작품의 일부를 그러한 이론 틀에 끼워 맞춰 해석하는 일은 오히려 쉽다. 물론 이론은 작품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작품이 이론을 위해 희생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형철이형의 글은 대부분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한다. 조심스럽게 작품을 읽고 조심스럽게 글을 쓰기 때문이다. 형철이형에게 우선 순위는 작품이다.

아니다. 형철이형의 최우선 순위는 작품도 아니다. 조심스러운 독서의 백미는 부록으로 실린 시인 최승자 론 '실패한 사랑의 역사를 헤치고'에서 두드러진다. (이 책에서 최승자 시인에 대한 글은 두 번 나온다. 1부에서 한번 나오고, 마치 무언가 마음에 걸려 더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부록에서 또한 번.) 90년대 이전의 최승자 작품과 이후의 작품의 변화에 대해 논하면서 시가 아니라 시인의 안부를 걱정한다. 나는 이 대목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랐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난 이런 종류의 문학 평론을 본 적이 없다. 일단 놀랐고, 그리고 순식간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렇다. 형철이형에게 최우선 순위는 시나 작품이 아니고 시인과 사람인 것이다. 나는 그 후로 '시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였다.

좋은 책에 괜히 쓸데 없는 얘기를 너무 많이 주절거렸다. 좋은 것은 사실 말이 필요하지 않고, 숨 막히는 듯한 떨림과 음미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책도 영화도 술도 사람도. 단 한 번이라도 형철이형과 미리 좋은 작품을 하나 정하고 직접 만나서 술 한 잔 기울이며 인생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상을 해본다. 날이 새고 술 병은 빌 것이다.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일 것이다. 김현 세대에 대해 더 이상 컴플렉스 없이 그 유산을 상속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우리도 우리 세대의 비평가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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