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늑대 베틀북 그림책 42
마가렛 섀넌 글 그림, 정해왕 옮김 / 베틀북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에는 아크타입(원형)이라는 게 있다. 예를 들자면, <햄릿>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그 원형이다. 새넌의 그림책 <빨간 늑대>는 아버지의 억압으로 인하여 탑에 갇힌 공주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억압과 그에 희생당한 여자의 이야기는 동화 <긴머리 공주>와 입센의 <인형의 집> 등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남성의 공격성과 여성의 수동성에 관한 이야기로 확대될 수 있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 이러한 이야기의 대표작이라 하겠다.)

  아버지는 여자가 만나는 최초의 이성인 동시에, 사회를 상징한다. 즉, 아버지로부터의 억압은 사회구조로 부터의 억압이다.  탑 역시 아버지의 억압과 같은 것을 상징한다. 얼핏 보기에는 공주는 사회로 부터 격리 된 것 같지만, 사실 사회구조 속에 격리된 것이다. 

   '빨간'색은 예로보터 '금기' 또는 '생명'의 상징이었다. 아버지 왕에 의해 탑에 갇힌 공주 로젤루핀이 빨간 늑대 옷을 입고, 탑을 부수고 나가는 것은 여자를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깨트리는 행위이다. '금기'시된 그것을 깨트린 공주는 자유(=생명)를 얻는다. 그래서 빨간 늑대가 되어서 탑을 부수고 나가는 장면에 태양이 찬란히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새넌은  체코 공화국의 로케트 나드 오호르시라는 아름다운 성곽 마을에 우연히 들렀다가 이 이야기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뒷날 이 마을을 다시 찾아가 일곱 달을 머무르면서 이 이야기의 삽화를 그렸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볼때, 새넌은 그 마을에 전해오는 설화를 채록하여 동화책을 만든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창작동화와 달리 상징성이 강한 것들(빨간색, 탑, 늑대 같은 것들)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 같다.

  특이한 것은 서구의 경우 탑이나 성에 갇히는 공주(잠자는 숲 속의 미녀, 라푼제, 미녀와 야수 등인데, 라푼젤과 미녀와 야수는 아버지의 죄로 이해 딸이 탑이나 성에 갇힌다는 점에서 아버지로 부터 파생된 억압이라고 볼 수 있다)나 아버지의 억압에 관한 이야기(긴머리 공주 등)가 많은데, 우리 나라의 설화에는 이런 유형의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민족과 서구의 사고 방식 차이때문이리라.(대신 우리 나라의 설화에는 부녀지간의 갈등구조보다는 고부갈등구조가 많이 나타나는 것 같다. 며느리 밥풀꽃이나 소쩍새 설화를 보면...)

  새넌의 그림책 <빨간 늑대>는 조금은 낯선 북유럽풍의 인물과 밝고 선명한 선홍빛으로 그려진 빨간 늑대, 여러 가지 색깔들이 뒤섞여 있는 숲, 그리고 섬뜩하기도 한 이야기의 결말은 아이들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며, 무엇보다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동화책이다. 많은 말이 적혀 있지는 않으나, 알아 듣기 힘든 말이 한가득 적혀있는 두꺼운 책보다 훨씬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동화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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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키웨이 2004-07-03 03:12   좋아요 0 | URL
이 그림책.
저도 참 좋아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주위에 권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이파리님 리뷰를 읽으니 눈이 새롭게 떠집니다.

서구의 전래이야기가 아버지 억압이 많은 게 아마도 여자를 너무 하찮게 보아서 그랬던 걸까요?
너무 좋아서 추천 꾹 누릅니다.

이파리 2004-07-03 14:08   좋아요 0 | URL
저들은 아닌 척 하고 있지만, 서양의 여성차별 역사가 훨씬 길며, 현재도...
그래서 더욱 페미니즘이니 여성상위니 신사도니 하고 떠드는 거 아니겠어요.
조선시대에 약간 옆길로 새긴 했으나... 우리 나라가 여성을(특히 어머니라는 이름의 여성을) 더욱 존중하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