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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꿈꾼 시대 - 육성으로 듣는 열정의 20세기
장석준 지음 / 살림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혁명을 꿈꾼 시대
정석준/살림,2007
-게다가 2월의 혁명이 단순히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10월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간 이유가 뭔 줄 아나? 혁명으로 들어선 임시정부가 전쟁을 곧바로 중단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임시정부는 러시아 자본가들의 입김을 무시할 수가 없었는데, 이 러시아 자본가들은 대개 프랑스 금융자본과 한통속이 돼서 사업을 벌이고 있었거든, 그래서 프랑스의 뒤통수를 치면서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빠져나갈 수 없었던 거지. 반면에 오직 볼세비키당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만이 ‘즉각적인 종전’을 약속했다네.(24)
-버트런드 러셀은 “핵전쟁은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는다”...대랑살상무기의 더 정확한 표현은‘자멸무기’일 거야. 그 기본 논리가 뭔가? “우리 함께 죽자”고 서로 상대를 협박하는 것 아니냔 말이야. 이것하고 자살 촉탄 테러리스트 사이에 무슨 근본적 차이가 있나? 테러리스트들은 사실,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강대국들의 논리를 축소된 형태로 되풀이하는 것뿐이야. 테러리스트란 결국 오목거울에 비친 강대국 자신의 모습이란 말일세.(35)
-마흔 살 때 동료 철학교수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와 함께 쓴 『수학의 원리』 라는 세권짜리 대작이 너무 어려워서 세상에 이 칙을 다 읽은 건 세 사람뿐(저자 두사람에다가 이책의 논쟁 대상이었던 철학자 프레게Gottlob Frege)이 라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37)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당신이 인류의 일원이라는 것만 빼고 나머지는 다 잊어버리라”(38)
- 전쟁을 예방한다던 동맹 전략이 오히려 국지전을 세계대전으로 키우는 역할을 한 셈이라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프랑스와 독일의 중도파 정치가들을 중심으로 통합 노력이 시작된 거라네. 1957년에 로마 조약이란 걸 체결하면서 ‘유럽경제 공동체(EEC)'가 출범했고 1992년에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경제‘ 자를 뗀 ’유럽공동체(EC)가 등장했지. 아무튼 평화 정책이라는 점에서만 보면 확실히 커다란 진전이라고 한수 있을거야. 적어도 유럽 나라들끼리는 이제 축구 경기 할 때를 제외하면 그렇게 피터지게 싸우진 않으니....(47)
-전쟁은 최후의 수단(ultima ratio)이 아니라 최후의 무리수(ultima irratio)입니다(54)
-미국 사회당은 1910년 위스콘신 주의 밀워키에서 시장을 당선시킨 것을 시작으로 미시건 주의 플린트, 캘리포니아 주의 버클리 등 70여 군데에서 시정부를 장악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하원에도 의원이 2명 있었다. 그리고 사회당의 후보가 대선에 나가 백만 표에 가까운 득표를 하기도 했다. 유진 빅터 뎁스, 철도 노동운동의 전설적 지도자가 바로 그 후보였다.(66)
-하지만 소련 사회에서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에 대한 트로츠키의 분석 자체는 정홧한 것이었다. 그가 이민 1930년대에 주장한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다당제의 중요성, 계획과 시장의 결합 필요성은 소련과 동유럽이 무너지고 나서야 전 세계 좌파의 상식으로 통용되기에 이르렀다.(79)
-1950년대 자기정정 기회를 놓친 것은 1980년대에 파국적인 결과로 돌아왔다.(102)
-“싸우도 보면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싸우지 않으면 그건 이미 진거다.”(117)
-LAFTA의 틀안에서 서로 협력합니다.(127)
-1870년대에 세계자본주의에 중대한 변화... 전 세계적인 규모의 불황... 자본이 제조업 투자로 이윤을 확보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거야. 자연히 경쟁에서 도태한 자본이 생기고 이런 자본이 모여서 거대한 금융자본이 형성된 거지. 그리고 이 거대 금융자본이 수많은 제조 기업들을 거느리며막강한 영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어. 이게 이른바 ‘독점자본’의 등장이라네.(135)
-간디의 투쟁 방침은 ‘샤티아그라하(힌두어로 ‘진리에 대한 헌신’이란 뜻)’였다 식민 당국에 모든 협력을 거부하고 불복종을 전개하되 그로 인한 모든 불이익을 감수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21세기, 새로운 진보정치의 구성과 그 가능성을 위해 이렇게 제안한다 새로운 세기의 변혁 정치에 필요한 것은 아마도 ‘레닌’과 ‘간디’의 만남일 것이라고.(138)
-1919년 베르사유 강화회담...“식민지 문제의 공평무사한 해결”이란 말 자체가 애매모했지. 그러다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그 상이 여실히 드러나 버린 거야. 피억압 민족들에게 독립을 허용할 의무는 1차세계대전의 패전국들, 그러니까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에만 적용됐거든. 승전국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어. ‘반쪽짜리’ 민족자결권이 아닌가? ...
조선인들은 윌슨의 민족자결권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1919년 3월에 시위운동을 벌이기까지 했어.(149)
-‘체’는 ‘동지’를 뜻하는 별명
-“아픔보다 넓은 공간은 없다/ 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만한 우주도 없다(178)
-견디기 어려운 고독이란 없습니다. 모든 길은 똑같은 목적지로 통합니다. 그것은 우리자신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181)
- 시의 적들은 시를 쓰거나 지키는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단지 시에 대한 공감이 부족한 곳에 있을 뿐 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시인에게는 동시대인들 중 가장 잊혀지고 착취당한 이들에게 자신을 이해하게 만들 수 없는 무능 외에는 다른 어떤 심각한 적도 없습니다.(182)
-미국 사회가 변화할 수 있는 열쇠는 라틴계 노동자들이 쥐고 있다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라틴아메리카의 혁명운동과 연대해서 미국을 안과 밖에서 동시에 위협할 수 있다는 거였지.(194)
- 어떻게 보면 우리는 수표를 현금으로 돌려받기 위해 이 나라의 수도에 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공화국의 설계자들이 헌법과 독립선어서의 장엄한 문구들을 작성했을 때, 그들은 모든 미국인에게 상속되어야 할 약속어음에 서명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호사에 빠질 때도 아니고, 점진주의라는 진정제를 삼킬 때도 아닙니다.(200)
-독일의 아우구스트 베벨이나 프랑스의 장 조레스, 영국 의 케어 하디, 또 아까 말한 유진 뎁스(207)
-미국흑인 민족주의 창시자 격인 마커스 가비 “우리(흑인 민족주의자들)야말로 최초의 파시스트들”이라고 자랑했다네. 그러면서 백인들보다도 좌파 흑인운동가들을 공격하는 데 더열을 올렸지. 백인 노동계급과 연대하려 한다는 이유로 말이야.(209)
-말콤 X에게는 성姓이 없었다. 본명이 ‘말콤 리틀’ 이었지만, 그는 어느 백인 노예 소유쥬한테서 왔는지 모를 이 ‘리틀’ 이라는 성을 내버렸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성이 없다는 뜻으로 ‘말콤 X'를 자처했다.(213)
-달에 갈수는 있어도, 옆에 있는 다른 인간에게 손을 건네는 건 그렇게 힘든 건가! 지구를 수십 번 파괴할 수는 있어도, 한번 쌓인 마음의 벽을 허물기는 그토록 힘들단 말이지!(225)
-만델라는 남아공 공산당과 함께 공동의 군사 조직 ‘움콘토 웨 시즈웨(민족의 창)’를 창설하고 그 책임자가 됐다. ANC는 나중에 이러한 노선 전환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간디의 말을 인용했다. “비겁함과 폭력 상황에서 선택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나는 폭력을 택할 것이다. 나는 불명예의 비열한 목격자가 되는니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드는 것을 택한다.(227)
-파시즘은 바로 혁명운동을 모방했다는 거야. 파시즘의 어원인 이탈리아 말 ‘파쇼fascio'는 '다발'이란 뜻이라네. '뭉친다' '단결한다', 뭐 그런 말이지. 원래 이 말은 이탈리아의 좌파가 즐겨쓰던 말이었어. 그런데 무솔리니가 1919년 3월에 새로운 당을 만들면서 이 말을 당명으로 써먹은 거야. ’파시 디 콤바티멘도Fasci di combatimento', 즉 ‘전투적 파쇼단’이라고. 바로 여기서 파시즘이란 말이 나온 거지....나치는 더 황당해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이라네.(243)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네. 자본주의에 위기가 닥치면 두 가지 선택만 남게 된다고. “사회주의냐, 아니면 야만이냐.” 지배세력은 더는 과거의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지탱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새로운 사회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은 딜레마 상황에서 파시즘을 대안으로 받아들인 거야.(244)
-1861년의 이탈리아 통일 외세를 몰아 내고... 나라를 통일하려는 리소르지멘토(‘부홍’이라는 뜻) 운동이...1919년부터 1920년까지 두해 (‘붉은 두 해’라 부른다)(246)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250)
-인종주의야말로 나치가 파시즘에 새로 도입한 요소라네(264)
-20세기 역사에서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전쟁이 두 개 있다고들 하지. 하나는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베트남전쟁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스페인 내전이야.(284)
-소련이 독일군을 몰아내는 데 모두 2천3백만 명의 소련인(군인,민간인 가릴 것 없이)이 목숨을 잃어야 했어. 당시 소련 인구의 10분의 1이 넘는다네. 폴란드는 아예 전 인구의 5분의 1을 잃었고.(293)
-그러고 보면 내 시대에 세상은 두 번이나 러시아에서 그 방향을 바꾼 셈이군. 한 번은 1917년 10월에 페체르부르크에서, 그리고 한 번은 1943년 2월에 스탈린그라드에서.(294)
- ‘인민전선’ 정부를 경험한 프랑스의 가진 자들이 뭐라고들 했는지 아나? “좌파 정부보다는 차라리 히틀러가 낫다”고 했다네. 1941년에 프랑스가 독일에 그렇게 맥없이 항복한 건 프랑스의 지배 세력이 좌파 동포들과 손잡고 독일과 계속 싸우느니 나치 독일을 두손 들고 환영하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어.(295)
-당시 미국에서의 공격은 만만치 않았다. 뉴딜은 ‘볼셰비키주의’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특히 노동조합의 권리를 인정한 방침이 집중 공격을 받았다. 보수적인 연방대법원은 정부 정책에 대해 연이어 위헌 판결을 내렸다. 그렇지만 국가가 자본을 규제하며 사회복지 기능을 떠맡고 경기 조절을 위해 나서야 한다는 생각은 점차 상식이 되어 갔다... 구원의 손길은 바깥에서 다가왔다. 유럽에서 전쟁이 터진 것이다. 뉴딜도 이뤄 낼 수 없었던 것을 전쟁이 해결해주었다. 막대한 양의 군수품 생산으로 미국 경제가 살아난 것이다.(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