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포르투칼의 높은 산>



내가 아는 얀 마텔이 아니었다. “파이 이야기”를 썼던 그 작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첫 이야기는 실망으로 치달았다. 주인공 토마스는 갑작스럽게 부인과 아들을 잃고 만다. 그는 슬픔에 못 이겨 뒤로 걷기 시작하는데, 하필 그 때 아내가 뒤로 걷는 사람을 봤다는 얘기를 한다. 어, 내가 읽은 책에도 뒤로 걷는 사람 얘기가 나왔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토마스는 포르투칼의 높은 산에 있는 교회에 특이한 십자가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그곳으로 가려고 한다. 부유했던 숙부는 세상에 처음 나온 자동차라는 것을 빌려준다. 토마스가 포르투칼로 가는 여정을 그린 1부, 1904년의 이야기, “집을 잃다”는 토마스가 가족을 잃고 상실의 아픔을 뒤로 한 채 세상에서 자동차를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자동차로 포르투칼의 높은 산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간절히 바랐던 그 십자가상을 찾지 못한다. 오히려 자동차로 한 어린이를 치고 만다. 그리고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다 도망치고 만다.

2부 ‘집으로’는 1939년. 그러니까 토마스가 포르투칼로 갔다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끝난 지점에서 30년, 1세대가 지난 즈음에 전혀 다른 인물들이 나타나 이야기를 시작한다. 단편소설이었나?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고 읽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 아이를 잃은 부부, 그리고 그 남편을 잃은 부인 마리아가 부검 병리학자인 ‘에우제비우’를 찾아온다. 이야기의 연결고리는 이 마리아가 잃은 아이가 바로 1부에서 토마스가 교통사고로 죽게 만든 그 아이라는 설정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2부 이야기는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얀 마텔이 ‘파이 이야기’에서 보여준 식인호수에 버금가는 설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놀라운 상상력이자 그 상징성의 깊이에 그저 놀랄 뿐이다. 마리아의 집은 어디였을까? 아이를 잃고 남편마저 잃은 마리아의 집은 남편이었다.

3부 ‘집’은 현대로 넘어와 1980년이 된다. 캐나다 상원의원인 피터. 그는 미국에 초청되어 갔다가 우연히 침팬지연구소를 방문하게 되고, 우연히 침팬지 오도를 데려오게 된다. 미친 짓임을 알면서 그는 그와 함께 살려고 한다. 그는 오도를 위해 자신이 태어났던 곳 포르투칼의 높은 산으로 간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집 한 채를 겨우 구하고 그 곳에서 침팬지와의 삶을 시작한다. 캐나다에 있는 아들도, 누이도 버려두고,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 삶이 놀랍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 피터가 말하면서, 삶은 달걀과 감자가 담긴 냄비를 오도(피터가 데려온 침팬지)에게 보여준다.

그들은 생각에 잠긴 채 조용히 먹는다. 식사가 끝나자 오도가 다시 창밖으로 펄쩍 뛰어 나간다.

낡은 매트리스가 의심스러워 피터는 거실 테이블 위에 캠핑용 매트와 침낭을 깐다.

그러고 나니 할 일이 없다. 3주 동안 - 아니 한평생일까? - 쉼 없이 움직였는데, 이제 할 일이 없다. 무수한 종속절과 수십 개의 형용사와 부수가 들어가고, 기발한 접속사들이 문장을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는 와중에 - 예기치 못한 막간의 촌극까지 끼어들고 - 하이픈 없는 명사들이 난무하는 장문이 마침내 놀랍도록 고요한 마침표와 함께 끝이 난다. 한 시간쯤, 꼭대기 층 계단참에 나가 앉아서, 지치고 조금 긴장이 풀리고 살짝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그 마침표에 대해 생각한다. 다음 문장은 무엇을 가져오려나? (얀 마텔, 포르투갈의 높은 산, 332쪽)

그는 침팬지를 닮아 점점 하등동물처럼 단순해지고, 침팬지는 피터를 닮아 지능적이 되어 귀리죽을 끓인다.

“피터는 침실에서 손목시계를 꺼내 온다. 아직 오전 8시도 안 되었다. 거실에서 테이블을 바라본다. 읽을 보고서도 써야 될 편지도 없고, 어떤 종류의 문서 업무도 없다. 구성하거나 참석할 회의도 없고, 우선적으로 처리할 일도 없고, 해결해야 할 세세한 일들도 없다. 걸거나 받을 전화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다. 일정도 없고, 프로그램도 없고, 계획도 없다. 일하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업무가 전혀 없다.

그런데 시계를 볼 필요가 있을까? 그는 손목시계를 푼다.” (347쪽)

그는 끝내 자기 집을 찾았다. 토마스가 도달하려고 했던 집, 마리아가 안식하려고 했던 집, 그 집을 피터는 침팬지와의 삶 속에서, 토마스가 갔던 그 포르투칼의 높은 산에서 발견한다.

처음에는 아무런 감흥 없이 실망하며 읽기 시작한 책이었는데, 마지막 장을 덮을 땐 엄청난 희열과 충격과 감동으로 놀란 가슴을 쉬이 진정시키지 못했다. 역시 얀 마텔.

다양한 상징들, 예수, 십자가상, 집, 안식, 애통, 죽음 등 다양한 변주가 사방에 숨어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그 모든 것들의 위대한 뜻과 깊이를 헤아릴 수 있었다.

결국 세 이야기는 애통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내와 아들을 잃은 아빠, 아들과 남편을 잃은 아내

애통은 질병이에요. 벌집을 쑤신 것마냥 슬픔의 마맛자국이 생겼고, 우린 열에 시달리고 타격에 무너졌어요. 그 병은 구더기처럼 우리를 초조하게 하고, 이처럼 달려들었죠. - 우린 미칠 정도로 몸을 긁어댔어요. 그 과정에서 귀뚜라미처럼 활력을 잃고 늙은 개처럼 기운이 빠졌어요. (244쪽)

결국 책은, 익명의 군중이 살해한 사람의 아들, 그 익명을 애통해하는 신의 눈물에 관한 이야기, 애통하는 자녀들에 대한 신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 구원의 여정으로 걸어가는, 전혀 높지 않은, 포루투칼 높은 산으로 걸어가는, 믿음의 이야기다. 예수의 십자가상이 어떤 사람의 눈에는 침팬지처럼 보여, 이게 신성모독이 아닌가 가히 의심스러운 매우 위험한 책일 수도 있으나, 그 팔이 긴 것은 모든 사람을 안으려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얼굴이 긴 것은 애통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다.

가장 인간적이고 우아하며 품위있는 영적 여행, 이라는 뒷표지의 한 문장이 매우 정확한 책이다.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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