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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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작가정신에서 파이 이야기를 일러스트 판으로 새롭게 펴냈다.

 

파란 파다 위에 흰 배가 제목 파이 이야기와 함께 누워 있다. 그리고 붉은 호랑이와 까만 사람. 파란 바다 아래는 비행기 같은 물고기들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다. 그랬던 책이

 

 

이번에는 하얀 바탕에 붉은 호랑이만을 채워졌다. 호랑이는 더 이상 누워 있지 않았고, 하얀 배는 더 이상 좁지 않았다.

 

    

파이라 불렸던 소년, 동물원장의 아들이었던 까만 소년은 겉표지에서는 더 이상 만나볼 수 없었다. 겉표지를 벗기자 화려하게 옷을 갈아 입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의 그림 세계가 환상처럼 펼쳐진다. ! 절로 터져 나오는 탄성. 내가 책을 읽으며 느꼈던 모든 감정이 정확하게 표지에 그려져 있다.

 

어떻게 이런 책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심히 고맙고 또 고맙다. 사실 파이 이야기는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주는 즐거움도 크지만 책을 읽으면서 이미지를 상상해보는 시각적인 즐거움 또한 크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그 이상을 창조적으로 상상해내는 데 있어 다소 어려움을 느낀다. 특히 창대한 바다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 그리고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마법의 판타지 세계들은 더욱 그러하다.

    

책을 원전 삼아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대개 책을 먼저 읽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 못한다. 나 역시 그런 영화들은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편이다. 당연하다. 책은 탁월한 심리묘사를 보여주지만, 영화에서는 그것이 힘들다. 한 장 가까이 묘사된 사람과 호랑이 사이의 긴장감 넘치는 심리 상태를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렇지만 영화는 책이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을 선물로 안겨주는데, 탁월한 영상미가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영화 파이 이야기에 후한 점수를 주었는데, 그것은 감독이 책의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창조적 역량을 극대화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바다 위를 나는 날치라든지, 파이가 혼자 상상하는 미지의 세계, 또는 모든 동물을 녹여버리는 놀라운 식인섬의 영상이 그러했다.

    

이미, 영화로 책 내용의 대부분을 이미지화한 상태이기 때문에 일러스트 파이 이야기는 오히려 역차별을 받을 가능성이 큰 기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그림작가의 일러스트들은 책의 가독성과 몰입도를 극대화시켜준다. 이처럼 생생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외적인 요소와 내적인 심리를 교묘하게 버무려 그려내다니 그저 감탄만 할 뿐이다.

 

    

실제로 표류가 시작되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초반부는 다소 산만하고 지루한 감이 있다. 꼭 그 부분을 넣었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자.

    

파이는 종교적 신념에 배치되는 행동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살아있는 생물을 죽여야 했고, 그것을 가공하지 않은 채 날 것 그대로 먹어야 했다. 이때의 먹는다는 행위는 우리가 익히 가치를 두고 있는 먹는다는 행위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먹는다는 것은 종종 종교적 신념과 부딪친다. 금지하는 음식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존이라는 거대 담론 앞에서 종교적 신념은 어디까지 지켜야 할까. 그런 측면에서 파이가 초반부에 3대 종교를 아우르며 왔다갔다 하는 모습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

    

스포가 될 수 있어, 책의 줄거리는 얘기하지 않기로 한다. 많은 분들이 이미 거의 알고 있을 것도 같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또는 읽고 나서, 단 하나의 질문에 집중했다. 그것은 사람 이름을 부여받은 호랑이, 리처드 파커, 그는 누구였나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었고,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망망대해에서 작은 보트에 섬처럼 갇힌 호랑이와 소년. 육지에 도착해서는 미련 없이 사라져버린 리차드 파커 호랑이.

 

    

살아남는 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내가 살아남기 위해 호랑이가 필요하다면, 아니 호랑이밖에 없는 세상에서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내게 세상은 바다인가. 외로운 구명보트인가. 아니면, 나와 함께 있었던 그 호랑이였는가. 그러니까 리차드 파커가 사실은 파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 페르소나는 아니었는가.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허상과 함께 생존을 이루어 낸 것은 아니었는가.

    

이 책은 우리가 잘 아는 맨부커 수상작이다. 유명한 맨부커 수상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으면 다시 되돌아가서 책을 읽어봐야 진실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맨부커상은 대체로 그런 작품들에게 돌아가나 보다. 파이 이야기 역시, 우리는 책을 다 읽어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상인지 알 수 없다. 기억이란 때로 모호해서 뇌는 스스로를 속인다. 파이 이야기는 진정한 표류문학이면서도 완벽한 판타지 문학이다. 생존이 절실한 모든 분에게 강추한다. 파이 이야기는 바로 당신을 위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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