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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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한다면,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선'은 낡거나 헌 '물건'을 고치는 것이지, 그 대상이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수선의 대상을 '살아있는 자'라고, 사람이 그 대상임을 명백히 하였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제목을 붙인 것일까, 책 마지막 후기를 보면,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안톤 체호프의 희곡 “플라토노프”에서 빌려온 작품 제목이라고 설명한다. 희곡 “플라토노프”는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으로 불리는데 구하기도 힘들고 내용을 잘 알아내기도 힘들다. 국내에서 무대에 오른 작품 설명을 보고 대충 내용을 이해했으나 장기이식과는 아무런 연관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체호프의 작품 어디에서 그런 부분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어찌 됐든,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도 타인의 제목을 가져와 붙인 것이다.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내용이 직설적이고 감당하기 힘든 것을 포함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랬다. 불편함. 인간으로서 인간의 육체를 수선의 대상을 삼고 있는 이야기를 읽으며 동감할 수밖에 없는 이 인간으로서의 형이하학적인 모멸감. 그러나 어찌보면 우리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모든 과정이 수선을 받는 과정은 아닐까. 오래되어 낡아진 육체를 찢고, 잘라내고, 꿰매고, 깁고 새로 페인트를 칠해서 새 것처럼 보이게 하는 리모델링.

작가는 의도적으로 책 제목에 인간의 인간성을 배제하고, 철저히 사물 중심적인 시선으로 이 책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출입구에서부터 독자들을 서성거리게 만든다. 물론 책을 펼치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는 책을 스토리 중심으로 흡입력 있게 독자를 이끌고 가는 형태로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현재형 시제를 사용해 독자와 '함께' 그 불편함을 안고 동행하도록 강요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바다에서 서핑을 하고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시몽의 부모 입장이 된다. 장기 이식을 사실상 강요하는 의사 앞에서 가부간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의사 입장에서 이렇게 싱싱한 장기들을 그냥 불태워 없애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신선한 장기들로만 교체된다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수없이 많은 환자들이 줄을 서 있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 시몽이 어떤 결정을 더 좋아할지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정내려야 했다. 좋아요, 한 번으로 최소 6명 가량의 환자들이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경제적인 효율성도 있지만, 그것은 선의 또는 악의의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거부할 수도 있다. 시몽이 원치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물론 그 결정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이 결정은 전적으로 경제성을 따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주변에서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여섯 명이 살아날 수 있어,라는 수학적인 계산으로 바라본다.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너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판단될 거야, 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공기 속에 녹아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2001년에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라는 곳에 뇌사시, 각막, 장기, 조직 외에 시신까지 기증하겠노라고 서약을 하였다. 지갑에는 운전면허증이 아니라 시신기증등록증을 맨 앞에 끼워넣고 다닌다. 혹시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면, 내 뜻을 확실히 밝히기 위해서.


그러나 이 결정으로 내가 선한 사람이 되고, 이타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고, 장기기증을 서약하지 않은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판단하고 이분법적인 잣대를 들이대어서는 곤란하다.

나는 죽어서 이 세상에 내가 기억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내 육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가령 시신이 의학대학에서 인턴들에게 경외를 받지 못한 채, 실습도구로 한 번 사용되고 버려진다 해도, 물론 그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이 지구상에 0.001%의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할 수 있다. 살아서 기여하지 못한 부분을 죽어서라도 도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결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일부 종교들은 시신을 화장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한다. 또 다른 책 "숨결이 바람될 때"를 읽어보면, 시신 기증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거룩하거나 존경을 받는 행위가 아님을, 책을 읽고 나서 장기기증을 포기한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책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역시 시신을 기증한다는 것이 남겨진 자, 가족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지를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게 한다.

그리고 이 책의 압권은 6개의 장기를 적출해 간 각 병원에서 특히 심장을 적출해 간 병원에서 환자에게 심장을 이식해 넣는 수술 장면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생생한 묘사는 실제 수술실에 들어가서 관찰하는 것만 같다.

장기 기증과 수증의 의미에서 저자는 소설 속 이야기를 통해 중요한 개념 하나를 정리한다. 즉 장기 기증이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녀가 생각한다. 이런 일에 있어서 기증자라는 건 없어. 그 누구에게도 기증을 하려던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312쪽)

이런 일에 있어서는 그렇다. 왜냐하면 뇌사상태에 빠진 젊은이는 생전에 결코 그 의사를 밝힌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식해준다는 장기를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환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수증자가 아니다.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수선”이라는 의미의 방점은 심장을 이식받는 환자의 생각에서 찍힌다. 그녀는 자신의 진짜 심장은 어떻게 처리될까? 생각한다. 무수히 많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결국 자신을 살아있도록 지탱했던 그 심장은, 수선도 되지 않아 폐기처분 되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실존적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번역자는 이 책이 참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숨이 가빠 올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문장들과 짧은 호흡으로 끊어지는 문장들의 어지러운 갈마듦, 현학적이고 전문적인 어휘들과 일상어 혹은 비속어들의 혼재, 문장의 흐름을 툭툭 끊어 놓으며 복잡하게 가지쳐 나가는 무수한 연상의 난입, 서핑이나 카누 제작에 대한 지식은 말할 것도 없고 심장 이식 수술과 관련된 전문적 지식의 나열 등으로 점철된 텍스트의 번역 작업은, 어순이나 어휘 등 모든 면에서 프랑스어의 대척점에 서 있는 한국어가 모국어인 번역자에게 정신적, 육체적 학대로 다가올 정도였다.” (346쪽)

번역자의 이 글에서, 이 책의 문장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감히 짐작할 수 있다. 쉽게 호르륵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참고 읽어나가다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그런 생각의 범위를 확장시켜 준 작가와, 출판사와, 번역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다시, 영혼의 육체의 경계에서 실존의 의미를 고민해야 할 시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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