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웨이 다운
제이슨 레이놀즈 지음, 황석희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독서후기 [선한리뷰 2020-005] 롱 웨이 다운 Long Way Down

 

저자 : 제이슨 레이놀즈

옮긴이 : 황석희

출판사 : 밝은세상

발행일 : 20191230일 초판 1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엘리베이터 시간 여행.

어린 소년에게도 세상은 녹록치 않다는 것을,

삶은 무수히 복잡한 관계로 엮여져 있다는 것을,

룰이 바뀌어야 세상도 바뀐다는 것을,

우리는 회색빛 책을 통해,

어린 소년 열다섯 살 윌의 고통을 통해,

배운다.

 

책은 일반적인 형태의 산문이 아니라, 시처럼 짧고 간결하게 쓰여져 있다.

그래서 소설이라 부르기도 그렇고, 시라 부르기도 그렇고,

새로운 형태라고 해야 할까.

이름 붙이기 모호한 경계에 서 있다.

 

흑인들이 사는 곳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형이 누군가의 총에 맞아 죽는다.

동생 윌은 형에게 배운 대로, 그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세 가지 룰을 따라 형의 복수를 위해 집을 나선다. 형 서랍에서 꺼내든 총을 바지 주머니에 불룩하게 집어 넣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No. 1: 우는 것

하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No. 2: 밀고하는 것

하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No. 3: 복수하는 것

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년은 울지 않았다. 룰을 지켜야 하니까.

소년은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룰을 지켜야 하니까.

소년은 총을 바지주머니에 숨겼다. 룰을 지켜야 하니까.

 

 

그러나 형이 죽고 소년은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 그 고통을 느낀다.

그런 심리 상황에 대한 표현들이 이 책을 문학적으로 더욱 가치있게 해준다.

 

나는 한 번도

지진을 겪어보지 않았다.

이게 지진이란 것과

얼마나 비슷한지

모르겠지만 땅이

완전히 갈라져서

입을 벌리고

날 집어삼킨 기분이었다.

(13)

 

8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벌어지는 일이 이 책이 이야기하는 전부다. 단순하고 반복적이고 짧게 쓰여진, 아동문학으로 분류될 수도 있는 책이지만, 글은 가볍지 않다. 윌의 마음, 윌의 생각을 따라가며 우리는 윌의 입장이 되어 사건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간 어린 소년이 된다. 무서움에 떨면서도 룰을 지켜야 하는 이중감정을 가진 채. 낯선 어른들을 만나는 불편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진다. 어린이에게 어른은 언제나 힘들다. 잘 알지 않는가.

책은 세 가지가 교차하면서 독자에게 신호를 주는데, 처음에는 그 신호를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첫 번째 신호는 엘리베이터가 각 층에 설 때 표시되는 시간이다. 각 층이 표시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그 때의 시간이 책 윗부분에 표기된다. 문자가 아니어서 그냥 지나치기 쉽다. 책 표지를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는데 엘리베이터가 한 층씩 내려가는 장면을 보면서 다시 표지를 보게 된다. 표지는 엘리베이터의 각 층이 표시되어 있다. 마지막 1, 로비 층인 L자에 불빛이 들어와 있다. 책 표지는 이미 책 마지막을 암시한다. 엘리베이터의 반질거리는 스테인리스 벽에 반사되어 흐릿하게 보이는 주인공 소년 윌의 모습이 흔들리고 있다.

 

8층에서 마지막 1층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60초다. 복수를 해야 하니 윌은 60초 뒤에 또 다른 살인자가 될 것이다. 이제 그의 운명은 정해졌다. 그 동네가 으레 그렇듯이 그의 인생은 이제 끝난 것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으니까.

 

하지만 윌이 처음부터 L층을 눌렀음에도 엘리베이터는 각 층마다 서고 각 층마다 사람이 탄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오래 전에 죽었던 사람들, 구멍이 난 사람들이다. 윌의 동네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룰에 따라 그들은 모두 죽었다. 윌은 형을 죽인 범인을 단정하고 있다. 그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고는 복수의 총을 집어 들었다. 과연 그럴까. 죽은 화자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놀라운 사실들을 전해준다. 윌은 오줌을 지렸다. 총을 한 번도 잡아보지도, 쏘아보지도, 어떻게 쏘는지도 모르는 복수자 윌은 과연 무사히 1층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

 

두 번째 신호는 글자 조합, 에너그램이다. 이 재미난 게임은 주인공 윌이 즐겨하는 놀이인데, 소설 중간중간에 챕터처럼 끼워져 있다. 이 영어 알파벳 놀이는 각 층에서 탑승하는 사람들과는 무관하다. 그러니까 7개 층에 일곱 개의 놀이가 펼쳐지는 게 아니라, 단 네 개의 에너그램이 중간에 들어가 있다. 이것을 잘 관찰하면 작가의 서술 방식을 조금 더 이해하고, 주인공과 탑승자의 상관관계를 조금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순전히 내가 생각해 본 방식이다. 작가는 전혀 다른 뜻으로 이 부분을 집어넣었을 수도 있다.

 

가령, 에너그램 네 번째는 CINEMA를 바꾸어 ICEMAN으로 만드는데, 아이스맨은 살인강도의 뜻이 있다. 아이스맨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봐도 이 뜻으로는 찾아지지 않는다. 겨우 한 사전 사이트에서 이 뜻을 찾았다. 영화를 좋아했던 형, 그러나 영화는 달콤하지 않다. 그것은 살인강도자가 될 주인공, 윌의 다른 모습이다. 그는 곧 아이스맨이 될 것이다.

 

세 번째 신호는 탑승자다. 탑승자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들은 엘리베이터에 탔다가 떠나는 게 아니라 계속 머무른다. 중간에 내리지 않는다면 그렇다. 그래서 좁은 엘리베이터에는 사람이, 죽었던 사람들이 계속 타면서 서로 아는 체를 하고 그들의 살아생전에 있었던 일들로, 그리고 윌이 몰랐던 어른들의 이야기, 숨겨진 이야기들이 베일을 벗는다. 윌이 바라보는 세상,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는 종종 오해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우리의 시야는 언제나 좁다.

 

탑승자는 반전이다.

누가 타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누가 타는지를 여기에서 밝힐 수는 없다.

 

다시 책 제목으로.

책을 다 읽고 나자, 책 제목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한국 독자라면, “롱 웨이 다운이라는 영어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을 찾아보면 ‘LONG WAY’는 먼 길, 먼 곳, 동떨어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LONG WAY DOWN’은 그러니까 아래로 내려가는 아주 먼 길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8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60초의 길이 물리적인 시간과는 무관하게, 윌에게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같은 매우 긴 시간, 매우 먼 길이 되었다. 책 제목을 우리 말로 멀고 먼 길’ ‘내려가는 길’ ‘긴 여정으로 번역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책 마케팅 차원에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영어 자체를 우리나라 발음으로 제목을 정하는 경우가 많고, 직관적으로 책의 분위기를 이해하기 어려운 감이 있지만, 우리말 번역도 역시 책의 분위기를 전달하기에는 다소 어렵지 않았을까 하고 이해해본다.

 

다시 책 표지로.

정말 책을 다 읽고 나서 책 표지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형이 죽고 동생이 복수하러 간다는 짧은 줄거리를 듣고 아마 추리소설인가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실 책 표지에 커다랗게 은박으로 박힌 뉴베리 아너상은 아동문학상이다. 그건 알고 있었다. 나름 아동문학 작가이니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책 표지가 아동문학과는 결이 달라 애써 무시했었다. 청소년 추리소설인가, 하고 생각했었다.

 

잿빛 표지는 출판사 이름 밝은 세상과는 결을 달리한다. 마치 어두운 세상으로 끌고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아주 어둡진 않지만 그렇다고 밝은 세상을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고 표지를 다시 살펴보자. 엘리베이터 층 버튼은 제일 아래 1층에서 밝게 빛나고 있다. 이제 소년은 1층으로 내려온 것이다. 비록 오줌에 지리기는 했지만 그는 마지막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소년은 총을 꺼내들고 형에게서 배운 룰을 따라 범인이라고 지목한 녀석에게 달려가 총을 쏠 것인가.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동시에

다시 들어간 기분이었다.

 

내 속으로

들어가서

내가 내 이빨이라도

집어삼킨 것처럼

안에 있는

모든 걸

잘근잘근 씹어댔다.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다 읽고 나서.

책에서는 그 이후 상황을 알려주고 있지 않다. 1층에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래서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밝게 빛나는 저 불빛의 의미를. 잿빛에서 환한 빛으로의 이동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밝은 세상이 될 수도 있음을, 이제 복수의 룰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소망을 품을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열다섯 소년 윌의 마음을 쫒아가는 심리소설이다. 형의 죽음을 통해 복수의 꿈을 꾸고 실천에 옮기려고 하는 멋진 동생이지만, 룰이 바뀌어야 죽음이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새로운 룰을 시작케 하는, 동네 녀석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저가 되는 동생의 변신 이야기다. 결과는 보여주지 않지만 우리는 그렇게 예상할 수 있다. 그래야만 이 청소년 소설이, 마약을 하고, 총을 쏘고, 사람을 죽이는 많은 청소년 사이에서 회자되고 읽혀져 그들의 룰이 바뀌도록 하지 않을까. 그래야 뉴베리상을 받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래야 작가가 마음속에 아픔을 간직하고 써내려간 이 이야기가 잿빛 이야기로 끝나는 아픔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작가의 말]

 

작가의 마지막 말은 이 책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누구를 위한 책인지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냥 쓰인 책이 아니다. 목적이 있는 글들의 조합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선한독서로 갈 수 있다.

 

너희의 증언은 중요해.

너희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은 사람들의 실패 때문에 너희의 인생이 희생당하곤 해.

하지만 너희는 이겨낼 거야. 이겨낼 거야.

(저자, 감사의 글)

 

[선한 리뷰]

얘야, 세상은 내려갈수록 더 힘들어지는 거란다.

누굴 만날지 짐작할 수도 없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도 없단다.

그러니, 이제 복수의 꿈은 잊으렴.

네 복수는 누군가가 이미 대신 했단다.

네 마음은 하늘에 전달됐으니,

이제 형의 죽음에서 자유로워지렴.

네 잘못은 아니잖니.

 

내려가는 길이 아무리 길고 힘들어도

중간에 포기할 순 없단다.

끝까지 내려가야

우리는 내려놓을 수 있단다.

어른도 마찬가지지.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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