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고래 K-포엣 시리즈 7
정일근 지음, 지영실.다니엘 토드 파커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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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친근한 시인. 어디서 그를 봤을까? 그의 시가 교과서에 실려 있다.

 

 

<바다가 보이는 교실>

 

참 맑아라

겨우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

열이, 열이가 착하게 닦아놓은

유리창 한 장

 

먼 해안선과 다정한 형제섬

그냥 그대로 눈이 시린

가을 바다 한 장

 

열이의 착한 마음으로 그려놓은

아아, 참으로 맑은 세상 저기 있으니

 

(정일근, 바다가 보이는 교실, 전문)

 

이 시는 지금은 창원으로 통합된 경남 진해 출생인 그가 처음 국어 선생님으로 근무했던 진해 남중학교 첫 발령지에서 쓴 시다. 마치 동시 같은 그의 이 시는 그의 첫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에 실려 있다.

 

나도 결혼하고 첫 삶의 보금자리를 진해에 두었으니, 어쩐지 낯이 익더라,는 첫 느낌이 어쩌면 가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신작시집 저녁의 고래는 고래를 사랑하는 고래시인 정일근의 새로운 시 20편이 부부 번역가 지영실과 다니엘 토드 파커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한국 최초 한영대역 시집으로 발간된 작품집이다. 아시아 출판사는 통 큰 기획으로 [K-포엣] 시리즈를 발간하여 곁에 두고 읽고 싶은 한영대역 한국 대표 시선을 발간하고 있는데 정일근 시인의 신작시집 저녁의 고래가 첫 번째로 발간되었다.

 

달랑 스무 편의 시로 시집을 만들어 좀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나 나란히 놓인 영어 번역본을 생각하면 결코 얇은 책은 아니다. 굳이 영어로 번역된 시를 다 읽지 않더라도 특유의 한국적 표현이 들어간 시어들이 나오면 영어로는 어떻게 번역해 놓았지? 하며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가령 두 번째 시 눈의 바다같은 경우에는 영어 제목을 ‘Sea of Snow / Sea of Eyes’로 번역해 놓고 주를 달아 한국의 이 두 가지 뜻을 가진다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연은 우리가 읽는 그 시적 언어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 같아 번역문을 보면서도 괜히 마음이 달아 오른다.

 

기다렸던 눈은 아니지만, 참 푸짐한 눈이다

청어 떼들 헤엄쳐 돌아오는 눈의 바다다

 

‘Not the snow she was waiting for, but remarkably abundant eyes

A sea of snow where a school of herrings swim back home.‘

(정일근, ‘눈의 바다에서)

 

시는 전체를 읽으면서도 파도처럼 밀려오는 바다를 느낄 수 있지만, 어떨 땐 부분만 떼어놓고 읽어도, 발끝을 적시는 바다의 내밀함을 느낄 수 있다. 가령, ‘어머니의 문장이란 시에서 아래의 시를 읽을 때처럼.

 

어머니란 주어가 잠시 비운 사이

먼지 한 톨 끼어들 틈 없는 긴장에

간장종지 하나라도 위치를 바꾼다면

이 문장 와장창 깨어져 비문이 될 것 같다

어머니 혼자 주무시던 이부자리에서

(정일근, ‘어머니의 문장에서)

 

시는 한 번 읽고 밀쳐버리는 그런 책이 아니다. 짧은 만큼 시간을 두고 곱씹어야 한다. 시는 산문보다 더 감정을 지닌 글이다. 뒤늦게 가슴을 울린다. 코끝을 울리고 심장을 벌렁거리게 한다.

 

고래를 사랑하고, 자연과 생태를 사랑하는 정일근의 마음은 이 시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좋다. 아무렴. 시인이라면 그래야 한다. 사랑할 것들을 사랑해야 한다.

 


 

시를 다 읽고 나자 시 같은 산문이 하나 부록처럼 붙어 있다. ‘가을, 겨울, , 여름, 다시 가을이라는 수필이다. 부족한 졸시집 봄부신 날,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으로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그의 계절, 가을로부터 시작하는 그 어긋남은 실로 기막히다. 그리고 그의 글 속에서 또 아름다운 시 한 편 발견하고 조용히 글갈피로 만들어 본다. 그의 마음이 오롯이 담긴 시 한 편과 같다. 그렇게 생각한다. 이 시집의 모든 것은 바로 이 한 문장에 담겨 있다.

 

빠름의 선물은 편리이고, 느림의 선물은 사유입니다.

천천히 걸을 때 좋은 생각이 찾아옵니다. (81)

 

이제 시작하는 가을, 시집 읽기 딱 좋은 계절이 왔다.

천천히 걸으며, 좋은 생각하며, 좋은 시들을 많이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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