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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아 : 내일의 바람 ㅣ 사계절 1318 문고 120
이토 미쿠 지음, 고향옥 옮김, 시시도 기요타카 사진 / 사계절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피투성이라도 살아내야 하는 이유

아포리아는 그리스어 aporiā 로 ‘통로가 없는 것’, ‘길이 막힌 것’을 뜻한다. 우리는 2011년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과 쓰나미의 엄청난 재난을 알고 있다. 바닷물이 몰려와 도시를 삼켜버리는 무시무시한 일이, 영화에서나 봄직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 우리나라도 최근 경주 지진을 경험했다. 실제로 지진을 경험한 사람들은 조금만 땅이 흔들려도 공포에 빠진다고 한다. 그만큼 지진의 공포는 실제를 능가한다.
이 책은 2011년 리히터 9.0 규모의 동일본대지진 이후 24년이 지난 가상의 2035년을 무대로 하고 있다. 도쿄만의 작은 마을 시오우라는 2011년 이후 일본은 지진과 쓰나미에 대비하여 인공 언덕 위에 방재센터를 구축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그러나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인간의 노력이란 게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건지, 지진에 이어 쓰나미가 덮치자 도시는 다시 바닷물에 잠기고 만다.
이 책은 재난문학에 속하는 것으로, 구드룬 파우제방의 유명한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을 연상케 한다. 이 책이 사계절에서 출판된 사실로 알 수 있듯이 청소년 문학에 속하는 책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영상심의등급이 ‘12세 이상 관람가’라면 12세 이상 누구나 볼 수 있듯이 이 책 역시 청소년만 보는 책이 아니라 청소년 정도면 이해가 가능한 책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뛰어난 문학작품이다.
외톨이 은둔형으로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만 쳐박혀 있는 중학생 2학년 이치야가 주인공이다. 3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교사가 엄마와의 상담을 잡아 놓은 날이었다. 혼자 방에서 은둔하던 그는 지진이 일어나자 엄마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라고 소리친다. 암흑이 찾아오고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자 창문에 옆집 담이 넘어와 있고, 욕실도 사라지고 2층 방이 무너져 부엌을 덮어버린 상태였다.
잔해 앞에서 엄마를 찾던 그는 쓰나미 경보 속에서 가타기리라는 청년에게 떠밀려 집을 탈출하게 된다. 갇혀 있는 엄마를 놔둔 채 떠밀려 생존자가 된 그는 방재센터로 가지 못한 채 남아있는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어색한 생존을 하게 된다. 하루 식사는 건빵 여덟 개. 그들은 구조될 수 있을까.
거대 서사의 재난문학처럼 보이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생존자들의 내면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주인공 이치야가 어머니를 구출하지 못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처럼, 이치야를 구해준 가타기리, 어린 소년 소타, 간호사 출신 나카니시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나미 이전에 가족을 잃으며 생긴 생채기를 가슴에 안고 속으로 흐느끼고 있다.
이야기는 이들 개별 구성원들과의 내면적 심리 갈등과 개인 대 개인의 충돌, 재난 상황에서 음식을 두고 벌어지는 개인 이기주의 등의 다양한 갈등이 수면 위로 표출되며 긴장의 끈을 조인다.
가타기리는 건물 바깥에서 함석 지붕 위에 쓰러져 있는 여학생을 발견하고 위험을 무릅쓰며 구해오는데 그 과정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재난이라면 우리는 세월호라는 국가적 트라우마를 경험한 바 있다. 또다시 그런 재난이 닥친다면 우리는 우왕좌왕하지 않고 지난 아픔을 반면교사 삼아 침착하게 잘 감당해낼 수 있을까?
여기서부터는 지탱해 줄 벽이 없다. 힘을 빼,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밖으로 나오자 회청색 구름 사이로 빼꼼 나온 해가 부드럽게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 따스함에 잠시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건물 주위에 쌓인 파손된 자동차며 다다미며 방충망, 목재, 원형을 알 수 없는 철골, 물 위에 잔뜩 떠다니는 나뭇조각이며 패트병, 천 조각 등을 보자 와락 공포가 밀려들었다. (67쪽)

자신을 지탱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살아나기 위해 오히려 힘을 빼야 한다. 가능할까?
책은 대지진과 쓰나미라는 거대한 재난을 다루면서도 개인의 내면 묘사와 인간 본성의 충돌을 깊이 있게 다루며 독자에게 사유의 공간을 확장시켜 준다. 재난 앞에서 모두 저마다의 패배감과 죄책감으로 협력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커진다. 자기중심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삶에의 패배감이라고 해야 할까. 온 도시가 물에 잠긴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그들은 어떤 구조의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사람들은 희망의 끈보다 패배의 쓴잔을 먼저 삼킨다.
그러나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독자에게 말한다. 다리에 힘을 꽉 주라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다만,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전부다.
그래서 살아간다. 살아가야 한다, 똑바로. 다리에 힘을 꽉 주고.
“고맙다. 나는 이렇게 살아 있어.”
이치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살아가려고 한다.”
가타기리 아저씨…
이치야는 얼굴을 들고 가타기리를 보았다.
“살아갈게요. 저도. 여기서. 지금부터.”
(221쪽, 마지막 문장)
인간에게 생존이란 무엇일까. 또 가족도 없이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태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살아낼 의욕이 있을까. 실제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고서 어찌 감히 그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에스겔 16:6) 과연 우리는 피투성이가 되어서라도 살아야 하는 걸까. 그것은 자명하다. 살아나지 못한 사람들의 몫을, 살아남은 자들은 더 질기게 살아낼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것이 피투성이가 되어서라도 살아내야 할 이유이다. 이치야가 이를 악물고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아직 찾지 못한, 엄마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생명은 자신의 것이지만, 삶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에.
꼭 살아내길, 누구나 가슴에는 지우지 못할 상처가 있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