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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평점 :
"매우 화목하게 보이는 일가족, 그러니까 젊은 부부와 어린 딸"을 바라보다가 부랑자꼴인 그를 보고 두려워하는 젊은 부인에게 남편이 "저 사람은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거야. 그냥 없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큰 충격을 받는다. 자신은 그 화목한 가족이 사는 세계에서 지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비로소 이 세계에 그토록 많은 고통이 필요한 까닭을 단숨에 이해한다. 그건 고통을 느낄 때에만 인간은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현실은 고통을 원리로 건설됐다"고 결론내린다.
-p.169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 中에서
한 편씩 야금야금 읽던 책을 다 읽었다.
김연수 작가의 책은 처음인데, 왜 이제야 이 작가를 알았나 싶을 정도로 재밌게 읽었다.
너무 웃겨서 웃음이 빵 터져 나오다가 가슴 한 켠이 시리듯 슬프다가 마음이 따뜻해졌다가 하는 책이었다.
그리고 작가의 말처럼 아름다웠다.
사람의 인연이란게 얼마나 운명적인지, 반대로 얼마나 우스운지 그리고 그 이면엔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열한가지 단편을 통해 들려준다.
젤 처음 이 책에서 읽었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선 절대음감으로 날 놀래키며 김연수 팬으로 만들어버리더니 '인구가 나다'에서는 바이올린 이야기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렸을 때, 엄마의 생일날 아침이면 우리는 아빠가 건네는 귀밝이술을 마신 뒤 미역구에 오곡밥을 말아 먹었다. 원래 그 술은 남자들만 마셨는데, 어느 해인가 마침내 말하는 법을 익힌 미경이 울며불며 우겨서 그애도 더불어 마시게 됐다. 그런데 우리는 귀밝이술을 마셨지만, 그애가 마신 건 목청터지기술이었는지 일단 말을 하기 시작하자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 p.104 일기예보의 기법 中에서
'일기예보의 기법'에선 저 목청터지기술이 나오는 대목에서 빵 터진 웃음이 그칠 줄을 몰랐다. 나도 어릴 적 귀밝이술을 마셨었는데, 그래서 귀가 밝은가? ㅋㅋ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에선 어찌나 맘이 아프던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난 뒤의 느낌과 비슷했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맘은 더 커져간다.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서는 검은펜, 빨간펜, 파란펜을 통해 보는 작가의 고충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여기까지가 다인가?'
만약 내가 글을 쓴다면 나도 저 세가지 펜을 들고 '정말 여기까지가 다인가?' 내게 묻고 있을 것만 같다.
우리 나라 작가 중엔 좋아하는 작가가 몇 없는데 그나마도 남자 작가는 없었다. 신경숙, 은희경의 글을 좋아했는데, 여기에 김연수 작가 추가다. 그간 번역된 다른 나라 작가의 책들을 많이 읽다가 이렇게 우리 글로 쓰여진 우리 나라 작가의 글을 읽으니 느낌이 또 다르다. 한 번씩 꺼내서 아무데나 펼쳐서 읽어도 좋을 책을 나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김연수 작가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소설을 쓴다는 건 그게 야즈드의 불빛이라고 믿으며 어두운 도로를 따라 환한 지평선을 향해 천천히 내려가는 일과 같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을 쓰는 동안, 나는 내가 쓰는 소설은 무조건 아름다워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 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 곳이든,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끔찍하든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 작가의 말 中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