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20세기 90년대 전반에 걸쳐 중국 지식인의 역사적 처지를 개괄하자면, 첫째, 민주화 운동의 실패 이후 정치적 민주화 담론의 중단과 이로 인한 지식인들의 좌절과 방황, 변혁의 방향을 시장개혁과 경제 개발로 전환했다는 점. 둘째, 시장화의 진전에 따라 지식인들이 느끼는 모순과 곤혹감. 셋째, 국내개혁이 전지구화 과정으로 전이되었지만, 동시에 주변국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위기와 전쟁을 마주하며 느끼는 이질감, 사상적 위기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유주의와 신좌파의 구도와 대립으로 중국 지식계를 묘사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유주의는 하나의 이론일 뿐 아니라 특정한 사회 사조를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세기말 중국에 뿌리내린 자유주의는 추상적인 시장개념 위에 사회적 불평틍과 경제와 정치의 내적 관계들을 은폐하며 맹목적 시장주의로 전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는 무관하고, 또 실질적 시장 개념과도 상반된다.

 

지난세기 중국의 동요와 혼란은 평등이라는 가치의 왜곡 혹은 실천불가능으로부터 유발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평등의 차원에서 이룬 성취가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야기된 새로운 신분제다. 그것은 문혁 당시 우나극(遇羅克)의 혈통론 사건으로 불거지기도 했다. 따라서 중국사회의 곤경과 문제를 평등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단순한 생각이다. 중국의 이익분화와 불평등한 과분과정의 기저에는 국가 독점과 공유제의 명목하게 기능하는 시장 관계가 숨어있다.

 

같은 논리로, 중국의 문제를 민족주의나 인민주의로 환원하여 결론짓는 것도 역사의 실상을 너무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구체적 사건에 대한 논의 없이 단순한 '주의"에의 분석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자민족 중심주의와 글러벌리즘의 미명을 빌린 국제적 헤게모니에 대한 반항은 구별되어야 한다.

 

*춘추번로 심찰명호편

*이지 분서 제3권 거우처사, 비향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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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21세기에 다석의 글이나 함석헌의 사상이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고 구시대적 사고나 유물 정도로 취급될까. 개인적 단견으로 두 가지 걸림돌이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우선, 다석이 사용한 용어의 문제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다석의 용어쓰임에는 현재 우리가 더는 사용하지 않는 순우리말이랄지 독특한 조어들이 눈에 띈다. 물론 이런 독특한 조어나 용어방식은 다석 사상의 깊이를 더하고 또 그 나름대로 하나의 철학과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거니와 현대인에게 있어 이런 용어의 낯섦이 독해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본다. 21세기에도 공자와 노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이 읽혀지고 써지는 이유는 끊임없는 사상 전달 언어의 쇄신에 있지 않겠는가.  언어의 쇄신은 단순히 용어의 문법이나 어휘 선택에만 한정되지 않고 문체, 즉 스타일의 문제를 내포하며 이는 당대의 문제를 다루고 독자를 설정하고 전달방식과 테두리를 변혁시킨다. 나는 다석이 쓰는 제나랄지 얼나라는 말이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이제 제나나 얼나는 그저 제나와 얼나로만 멈춰버리면 안된다. 그러면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될지 모른다.   

 

다음으로 사상의 융합과정과 그 시도들이 다소 거칠다. 요즘처럼 전문화돠고 개별학문이 독립적으로 자기 위치를 점하는 시대가 있을까. 학제간 연구라는 것도 당연히 개별학문의 뚜렷한 독립과 구분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다석의 글을 일별하면 드는 처음 생각은 성급하고 어설픈 동서양 사상의 화해 시도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사상의 짬봉이다. 나는 지난세기에 우리 한국에서도 이런 걸출한 사상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또 한편에선 그저 사상과 사상에게 말걸기를 시도하고 이를 비슷한 유형과 알레고리에 따라 성기게 잇는 정도에 머문 것이 못내 아쉽다. 아마 동서양의 철학서적을 두루 탐독해본 이라면 어설프게나마 사상의 짜깁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 사상의 보편성과 유사성을 부인하고자 함이 아니라, 다석식의 경전 이해는 때로 아전인수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석의 <중용>강의를 되짚는 이유는 여전히 그 속에 번득이는 사상의 통찰과 예견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킴은 여전히 현대인들의 몫이다.

 

 

0.

회개하라는 말은 제나(자아, 이고)가 죽고 하느님 아들인 얼나(도, 덕, 명)로 솟나(솟아나다)라는 말이다. 儒와 孺를 같은 차원에서 논하면서 유교를 어린아이가 되자는 가르침으로 푸는 대목(21)과 도덕경 55장의 含德之厚者 比於赤子 (함덕지후자 비어적자), 탐진치의 수성(獸性)을 얿애자는 뜻을 모두 같은 선상에서 논의한다.

 

중용이 예기에서 독립하기 시작한 것은 북송의 정이천으로 알려져있다. 그 밖에 범중엄이 장횡거에게 중용의 일독을 권한 대목이 보이기도 한다. 중용이라는 말은 논어 옹야편에 보인다.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 다석은 이를 하느님의 얼이 뚫려 속알(얼나)가 됨이, 하느님께 이르는 씨알(人)이 적은지 오래되다라고 풀고 있다. 또 이를 예수님의 좁은 문 비유와 이어 생각한다. (36-37) 다석은 더 나아가 中을 하느님(성령)으로 보고, 그 생명인 얼(성령)을 받아서 쓰는 것이 중용이라고 말했다.

 

주희는 중용을 <니코마코스 운리학>의 中처럼 이해했다. 그것은 정도의 치우치지 않음이지, 하느님에게로 通함이 아니다. 다석은 주희의 중용해석을 비판한다. 주희는 하나의 태극을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양의의 발생을 이해했다. 주희에게는 분명 통합적 사고보다는 모종의 편집(偏執)이 어떤 치우침이 뚜렷이 보인다.

 

 

1.

몸나를 참나로 알고 있다면 천명인 얼나(참나)를 알 수 없다. 天命之謂性은 하느님과 내가 얼생명으로 이어진 것을 말한다. 率性之謂道는 탐진치를 추구하는 몸나를 부인하고 진선미를 추구하는 얼나를 쫓는 것이다. 솔성과 수도를 이웃에게 보여주는 것이 敎다. 다석은 주희의 인심과 도심이 섞여있다는 말이나, 맹자의 도심을 잃거나 가지고 있다는 말 대신에, 도심을 찾을 것을, 몸나에서 얼나로 거듭날 것을 말한다.

 

33.

의금상경 [衣錦尙絅], 사람들은 짐승인 제나를 참나로 알고 교만하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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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바슐라르는 불이 단순히 화학적 현상일 뿐 아니라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사회적 공기(환경)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책 전체를 관류하는 몇 가지 콤플렉스가 눈에 띄는데, 그 첫 번 째가 바로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불을 가지고 놀고 싶고 훔치고 싶고, 어른들 몰래 불장난을 하려는 원시적 열망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불에 대한 아이들의 호기심과 장난기는 분명 어른들이 제시한 금기라는 사회적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바슐라르는 소멸과 파괴의 불로서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를 말한다. 거기에는 화산의 이미지, 불나방의 열망이 있다. 방화범이 할 줄 모르는 것은 오직 화로에 불을 지피는 것 뿐이다. 



3.

불은 객관적 현상이기에 앞서 인간적인 어떤 원인이다.예컨대 전깃불은 보통의 불보다 더 많은 성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마찰되는 것, 불타는 것, 전기를,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은 어떤 생식을 설명하는 듯이 보인다. 어떤 효용론에서 벗어나 선사시대의 인간이 불을 다루는 이유와 태도에 대해 고찰해본다면 우리는 불에 대한 성급한 결과의 도출이나 단순화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원시인들이 나뭇가지를 이용해 마찰을 일으키고 불을 얻는 과정을 하나의 축제 속에서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 리드미컬하고, 즐거운 어떤 행위다. 원시인의 자의식은 분명 고통 속에서가 아니라 이런 즐거움, 축제 속에서 발견된다. (63)


연마, 마찰의 이미지로부터 바슐라르는 성적인 이미지를 연상하고 또 광석의 연마, 보석의 마광을, 애무하는 손길의 흔적과 연계하여 이해한다.다른 면에서 바슐라라는 프레이져의 <황금가지>에서 나타나는 불의 분석을 비판하면서 합리적 설명 대신 정신분석학적 설명으로, 동시에 유용한 것이 아닌 기분 좋은 것이라는 전제 하에 불을 해석할 것을 주문한다.


상징적 의미에서 불은 훔치는 것, 분노하는 것, 욕망하는 것, 성적인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불의 이미지를 노발리스Novalis의 작품 속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그는 이를 노발리스 콤플렉스라고 칭하며 마찰에 의해 발생한 불, 그 불에 대한 충동, 열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종합적으로 관찰한다.



4.

불에 대한 사우는 집중된 힘을 향한 몽상의 기울기를 따른다. 부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불을 집중하기를 바란다. 바슐라르는 性化된 불을 논하면서 불에 대한 성적 몽상, 이미저리가 연금술과 아궁이로부터 온다는 것을 지적한다. 성화된 불은 물질과 정신을 결합시키고, 관념들과 물질들을 서로 遷移시킨다. (106) 



5.

성화된 불을 다룰 때부터 바슐라르는 객관적 현상으로서 불을 동시에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 장에서 불에 대한 과학적 접근, 시인과 몽상가가 아니라 화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의 접근 속에 혼란한 상태로 축적되어 있는 불에 대한 직관들을 언급한다. 불의 실재성, 실재화에 대한 인식은 일반 사람들 뿐 아니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인식되어왔다. 예컨대, 인간의 몸 속에 불이 있다는 주장, 별이 빛(불)을 먹으며 빛나다가 소멸에 이른다는 것, 뜨거운 본성을 가진 식물에 대한 이야기 등. 이러한 실재적 불의 이해는 점차 은유화 과정을 거치며 사람들에게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러나 실체로서의 불은 늘 객관적 판단들을 왜곡시키고, 어떤 내밀한 힘을 간직한 채 이해된다. 다시 말해, 불만큼 사람들의 인식 속에 왜곡되고 오해되는 물질(?)은 없다. 체온계를 처음 만들 때, 온도의 기준점이 되는 것은 사람의 체온이었다. 이러한 열에 대한 이해와 경험은 불꽃이 붙어있지 않는 불이라는 개념, 생명의 불이라는 관념을 이루는데도 일정 정도 작용한다. 아울러 불(열)에 대한 현학적인 몽상들이 덧붙는다. 

(*개인적으로 이 장은 바슐라르가 불의 반과학적 면, 비의적 면을 비판하기 위해 썼던 글을 수정하여 삽입한 것이 아닐까한다. 정리를 해보려고 했지만 단편적이고 모호한 관점들이 난무한다.)



6.

火酒, 그것은 불의 물이다.(155) 술은 위 속에 들어가 존재를 따뜻하게 덥혀준다는 점에서 내밀하면서도 객관적인 경험들을 수렴한다. 바슐라르는 어렸을 적 마을 축제에서 브륄로라는 화주를 만들어 마셨던 기억을 즐겁고 몽환적인 경험으로 간직하고 있다. 술잔 위에서 일렁이는 불은 분명 어린 그에게 이동하는 불이고, 약이고, 어떤 절절함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바슐라르는 호프만의 작품 속에서 비치는 술, 펀치Punch, 불의 악마적 요소들을 주목한다. 알콜은 작품 속에서 언어를 풍부하게 하고 구문을 해방시키고 몽상과 환각을 자극한다.(161) 술을 지나치게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는 자연연소 사건은 19세기에 애주에 대한 어떤 은은와 농담들을 낳는다(붉게 탄 얼굴, 불 탈 것 같은 붉은 코 등). 



7.

불이 원죄와 악의 표지로 간주되는 것은 性化된 불을 언급했던 대목을 상기해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슐라르는 이렇게 오염(?)되고 부정적 이미지로서의 불 말고 그 대척에 선 淨化된 불에 대해 다룬다. 정화되고 순수한 불에 대한 가치부여로 유효한 근거는 불의 악취제거를 생각할 수 있고, 또 물질의 불순성을 소멸한다는 특성을 떠올릴 수도 있다. 여기서 불은 광석의 용해나 제련의 이미지를 상기시키고 나아가 인간 심성의 정화, 단련, 修德같은 도덕적 관념과 가치까지 확대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밭을 정화하는 火田의 이미지는 잡초를 제거하고 대지를 비옥하게 하는 순수한 불의 작용을 잘 드러내는 표지 중 하나다. 


불의 가치는 순수 그 자체다. 바슐라르는 그것을 사랑에 견주며 릴케의 시를 인용한다. 

"사랑 받는다는 것은 오직 다 타버린다는 것. 사랑하는 것은 밤에 켜진 아름다운 램프의 빛."


(*개인적으로 바슐라르가 불의 내재성이나 순수한 이미지에 대해 말하면서도 종교적, 성경적 불에 대해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은 점은 다소 아쉽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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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have had a profound paradigm shift about the whole earth. We know it now as a jewel in space, a fragile water planet. And we have seen that it has no natural borders. It is not the globe of our school days with its many-colored nations. 

                                                                                          -Marilyn Ferguson


우리는 전지구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이 우주 속에서 물을 가진 깨지기 쉬운 행성이자 보석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본래 경계선이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구는 우리가 학창시절 알록달록한 색으로 그려진 지구본이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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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ink we would be able to live in this world more peaceably if our spirituality were to come from looking not just into infinity but very closely at the world around us—and appreciating its depth and divinity. 

-Thomas Mo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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