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 문학동네 시인선 80
박시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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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슬픔, 망각, 망실, 밤, 겨울, 검은색, 눈, 추위.


박시하의 시집에는 이런 주제와 시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것은 꽤나 담담해서 읽는 이들의 감정을 혼란하게 한다. 그것은 소리치고 찢어지고 피흘리거나 괴로워야하는데, 박시하의 그것은 무척 무덤덤하기에. 


슬픔은 느끼는 것만 아니라 어떤 사물처럼 가지고 다닌다.그것은 감각을 너머 소유되기도 한다. 시적 화자 자신의 감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객관화하는 되는 과정일까. 하지만 슬픔은 단순히 감정이나 어떤 모호한 사물로만 남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당신)이나 저편을 열고 잇는 매개로 등장한다. 박시하의 슬픔은 단조롭되 단순하지 않다. 다양하게 말 건넨다. 슬픔은 또 다른 가능성일까. 아님 가능성의 조건일까.



밤의 공원에서




캄캄한 밤의 공원에서

유서를 썼다


기분이 좋았다

맹꽁이가 커다랗게 울고 있었다

두 남자가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셔틀콕이 어둠 속을


밤의 흰 새처럼

잊어버린 새의 이름처럼 날아갔다


아이들이 텅 빈 미끄럼틀을 타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편지를 보낸

나 없는 세계에서 왔다

나는 유서를 밤의 공원에

벤치 아래의 어둠 속에 묻었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딘가로 떠났고

이 세계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긴 한숨 소리가 번져나갔고

나는 유서를 어디 묻었는지 잊어버렸다


그 밤의 공원도 잊었다

나를 잊었다


새의 이름을 잊듯이

보드카 레인



한 번의 아침마다

한 번의 죽음을 주세요


그토록 많은 비가 내린 후에

새로운 비가 내립니다


나무에게

눈의 시신에게

실패한 사랑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주세요


아침에 내리는 비는 

미래의 사랑

미지의 슬픔입니다


당신의 이마는

내 죽음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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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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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사회·문화심리학적 각도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이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는지 다양하게 고찰한다. 인간의 사유체계와 구조형성에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 하는 언어인지학적 영향이 지대하다. 이러한 언어사용과 언어문화가 인간의 사유와 사상을 통제하고 방향지운다. 


다른 사유방식은 현대인 뿐 아니라 고대에서도 어떤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서양의 철학, 특히 그리스 철학은 사물이나 우주를 개별적 사물의 집합으로 이해했으며, 따라서 이들은 사물 자체에 대한 기원이나 특성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물은 자연계 속에 속해있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다. 비록 사물이 다른 사물과 모종의 관계를 형성하지만, 사물은 대체할 수 없는 근본적 속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사물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별적 사물의 특성에 따라 그리스인들은 분석적인 사고를 전개할 수 있었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사물을 범주화하고자 했다. 모든 사물은 특정한 속성으로 분류가능하다. 


동양, 특히 고대 중국인들은 이러한 개별적 사물을 인정하면서도 각각의 사물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에 더 주목했다. 그것은 완전히 독립적인 닫힌 특성들이 아니라 가변적이며 개방적이다. 사물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과정 속에서 발전하고 순환한다. 오행의 관계는 이러한 동양인의 사고방식과 체계를 잘 보여 준다. 그렇기에 동양인들은 관계와 맥락을 더 중시하며 개인주의적 성향은 서양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보인다. 대상 주체를 염두에 두기보다는 늘 대상 주변의 상황이나 배경에 초점을 둔다. 동양인은 서양인보다 어쩌면 더 눈치를 잘 본다. 


서구의 사고방식이나 역사는 선형적이고, 동양은 순환적이라는 비교는 식상하지만 여전히 유효해보인다. 


다만 저자와 저서 속 여러 학자들이 증거로 제시하는 설문조사나 간단한 비교실험들은 사뭇 도식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아시아인은 이러하고 미국인은 이러구러하다는 단순 비교는 사유의 한 현상이거나 경향일 뿐, 그것이 근본적 차이 자체는 아니다. 더 심도깊은 논의는 종종 생략되기 일쑤다. 


같이 읽어볼 책으로는 송영배,  『동서 철학의 교섭과 동서양 사유 방식의 차이 

http://aladin.kr/p/dF8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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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종서 소설의 기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전쟁과 욕망일 것이다. 이는 거시적으로 패전과 항전이라는 바탕 위에 배신과 질투라는 인간존재의 가장 내밀한 부분들을 예리하게 스케치해간다. 다만 그 말로가 어떤 희망이나 가능성을 제시하기보다는 암울하고 퇴폐적인 시대상황 속에 매몰되는 군상이나 미래에 대해 냉소적인 전망을 내비친다는 점에서 나름의 한계를 띠고 있을 뿐이다.


    사람, 짐승, 귀신이라는 제목을 단 이 소설이 전하려는 메시지도 전쟁과 욕망에 관한 여러 변주에 다름 아니다. 아울러 이는 훗날 <위성>이라는 장편의 사상적 바탕이나 추형雛形을 살펴볼 근거를 제시하기도 한다. 


    총 4개의 에피소드를 다루는 이 소설은 얼핏보면 전혀 다른 대상과 주제, 즉 하나님의 꿈, 고양이와 살롱의 문인들, 대문호의 영혼과 염라대왕, 여인과 유복자라는 각각의 사정과 類가 다른 존재들을 다루는 것 같지만 종국엔 하나의 인간문제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꿈>에서는 신이 자신의 고독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닮은 인간을 만들었고, 그를 통해 고독을 해소하려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신의 고독을 빼닮은 인간 남녀 또한 각자 저마다의 고독자로 처해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양이>에서는 무능하고 나약한 당대의 중국 지식인의 모습을 살롱에서 일없이 지내는 고양이에 겹쳐 보여주는가 하면, 겉으로는 매력적이고 지적인 살롱의 여주인이 남편의 외도에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억압적 전통관이나 관계의 부조리성에 쉽게 길들여지는 모습을 고양이에 빗대어 풍자하기도 한다. <영감>이라는 이야기 속에서는 허울 속에 가려진 지식인의 변명과 문단의 병폐적 일면을 꼬집기도 하고, <기념>이라는 이야기에선 한세대의 우울과 그릇된 욕망이 단절되거나 극복되지 못한 채 오히려 다음세대로 전가, 지속된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하간, 신의 꿈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그 꿈이 낳은 인간의 고독한 모습을, 다시 전쟁을 거치며 고양이처럼 변해버린 당대의 지식인군상을, 활력을 잃은 당대의 지식인의 모습을 다시 죽은 문호의 영혼으로, 당대 인간의 욕망과 좌절을 다시 반복해서 이어갈 유복자로 형상화하며, 인간이 지닌 근본적 한계와 던적스러움을 갈파한다.  


     *전종서의 글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가 그리는 주인공들의 내면심리가 무척 섬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드는 비유와 수사의 활용이 내게는 퍽 생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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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의 성이 성에 들어가려는 인간의 어떤 근원적 욕망과 불안을 이야기했다면, 전종서의 위성은 성에 들어갔어도 성 밖에서의 그 불안과 욕망이 쉽사리 해소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에 대해 전종서 선생의 부인인 양강楊绛 여사는 내제內題에서 이를 이렇게 요약다. 


성에 둘러쌓인 사람은 도망가고 싶어하고, 성 밖에 있는 사람은 들어가고 싶어한다. 결혼도 그렇고, 직업도 그러하니, 살면서 바라는 것들이 대개 이와 같다.

围在城里的人想逃出来,城外的人想冲进去,对婚姻也罢,职业也罢,人生的愿望大都如此。

    재밌는 것은, 전씨가 그리는 인물들의 욕망이 어떤 진지한 고민의 산물이라기보단 충동적이거나 유치한 동기들이 빚어낸 결과나 과정이라는 점에 있다. 주인공 방홍점方鴻漸의 이름부터가 어떤 아이러니다. 기러기가 구름을 뚫고 점점 높은 하늘로 치솓아 오른다는 뜻의 그의 이름은 화려하게 귀국한 서막과는 다르게 그가 머무는 장소는 해외에서 상하이 다시 깡촌으로 물러나는 어떤  퇴보적 경향을 보일 뿐더러, 연애에 있어서도 상해의 모던한 여성들과 이어지지 못하고 내지의 여성과 결혼하게 되는 우여곡절, 그마저도 순탄하게 흐르지 못하고 격화일로로 치닫게 되는 대략은 한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고 당대의 시대상과 인간상을 어느정도 반영하고 있다. 


    농촌이나 고향이 인간의 원초적 기억을 보지하며 동시에 인간에게 모종의 치유나 회복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과는 다르게, 전씨의 소설은 고향과 타향, 내지와 외지, 처와 첩, 학문과 도박 등 상반되는 개념항들이 결국 인간을 둘러싸고 인간을 욕망하게 하는 기제로 작용함을, 그리고 이 대립되는 쌍들이 둘이 아닌 하나의 성城일 뿐임을 폭로한다. 


    물론 주인공 방홈점의 성격이 가지는 어떤 부박함이나 불성실함이 그의 삶을 좌초시킨 것처럼 비춰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문제의 원인이거나 해답으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이나 도덕, 가치, 이기들은 그럴싸한 외벽을 가진 웅장한 성일 뿐이고 그 안에 둘러싸인 인간은 진정한 삶의 가치나 별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거나 체득하지 못함을 소설은 꼬집기도 한다.


    城은 어떤 욕망의 대상이나 관계를 암시하는 메타포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인간 자신을 가리키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개방되지 못할 때 그것은 공략해야 할 성으로 비춰지고, 함락된 후에는 다시 버려지기도 하는 빈 성. 혹자에게는 자기의 자존감과 가정을 넉넉히 지켜줄 외벽이 되기도 하고, 혹자에게는 자기 자신이 깨트려야할 하나의 금기이거나 도전이 되기도 하며,  또 혹자에게는 그저 정해진 운명이 가혹할 뿐인 어떤 장벽. 그렇다면 소설은 이렇게 묻고 있는 듯 하다. "자기 자신에게 둘러싸여도 그것이 벽이 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가, 아니면 불행한 사람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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