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퍼온글]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정치 경제적 변모

David Harvey,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an enquiry into the origins of cultural change(1989)

2.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정치 경제적 변모

2.1 도입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기본법칙이 계속하여 역사적 지리적 발전을 이루는 변함 없는 동력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157)

즉 이윤 추구. 그럼 이윤율의 하락이나 대공황 같은 맑스가 예견했던 자본주의의 필연성은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아님 ‘땜질’ 되고 있는 것인가? (마치 정치 경제학적 맑스주의가 ‘땜질’되고 있듯이? 이를 현실과 이론의 변증법적 발전이라고 하면 할말 없지만...) 이러한 ‘땜질’ 중 하나가 ‘조절학파’(regulation school)의 ‘조절이론’(regulation theory)이다. 조절이론은 Regimes of Accumulation(축적체제: ROA) 과 Modes of Regulation (사회 정치적 조절양식: MOR)이라는 개념으로 역사적 변화를 설명한다. ROA는 특정 기간 동안 자본이 조직되고 팽창되는 특정한 형태로 일정한 형태의 안정성을 획득하고 있다. ROA의 핵심 예는 “포디즘”이라 조절이론가들이 지칭하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MOR는 법, 관습, 국가 등, ROA의 작동의 맥락을 제공하는 제도적 실행이다. MOR은 ROA에게 도움이 되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조한다. 그러나 가끔은 둘 사이에 긴장이 있게 되고, 이 둘 중 하나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이런 양방향성이 고전적 맑스주의에서 토대-상부구조와 다른 점일까? 그 외의 차이는? 자본주의 내에서 일정기간의 안정성을 설명할 수 있는 것? 패러다임 교체처럼 세련화된 형태?) 포디즘으로의, 포디즘에서의 변화가 조절 학파에서 이러한 개념으로 설명된바 있다. (이하 http://en.wikipedia.org/wiki/Regulation_school 에서 내 맘대로 편역. 여기서 조절학파의 대표적 인물로 데이비드 하비를 꼽고 있다. *은 내 생각)

하비가 조절이론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다’고 한 부분을 살펴보면

축적체제란 ‘총생산량을 소비와 축적 사이에서 장기간에 걸쳐 할당하는 안정된 상태를 일컫는다. 이는 생산조건과 임금수입자들의 재생산조건 양자의 변모 사이에 어떤 일치점이 생겨남을 뜻한다.’ ‘그 재생산 표식이 상응하기 때문에(? 국역에는 응집력을 갖추고 있기에로 번역되었는데 원어는 coherent.. schema를 ’표식‘이라는 알 수없는 단어로 번역했는데 도식정도로 번역하면 되는 것 아닐까?)’ 특정 축적체제가 존재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여러 유형의 개인들-자본가, 노동자, 국가관료, 금융업자, 그리고 다른 정치 경제의 담당자들-의 행태를 결합하여 축적체제의 기능을 원활하게 유지시킬 구도로 만들어내는 데서 발생한다. 따라서 ‘규범이나 습관, 법률, 조절 네트워크 따위의 형태를 띠는 구체적인 축적체제가 작동하여 그러한 과정의 통일성, 즉 개인적 행태들을 재생산 표식에 적절하게 일치시키는 것을 보증해주어야만 한다. 이같이 내재화된 규칙과 사회적 과정을 조절양식이라 부른다.’

이러한 유형의 언어는 우선 발견적 장치로서 쓸모가 있다. 이 이론틀에 따르자면 우리는 복잡한 상관관계와 관습, 정치행위, 문화형태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이에 따라 역동적인 (따라서 불안정한) 자본주의 체제는 적어도 특정기간 동안이나마 적절하게 기능할 만큼의 충분한 질서를 지니게 된다. (157-158)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려면 성공적으로 해결해야만 할 광범위한 영역의 체제 내적 어려움이 두 가지 존재한다. 그 하나는 시장가격기구의 무정부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력의 배치방식을 충분히 통제하여 생산에서의 가치 증가를 보장해줄, 즉 가능한 한 많은 자본가들에게 이윤을 보장해줄 필요에서 비롯되는 어려움이다. (158)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포디즘이고, 이후 ‘유연적 축적체제’ (flexible accumulation)인 것.

나는 노동통제 관행이나 기술상태, 소비행태, 정치 경제적 권력구도들의 특정한 조합 위에서 전후의 장기호황(1945~1973년)이 일어났으며, 이런 양상이 ‘포디즘-케인즈주의’라고 불릴 법하다는 주장을 전반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1973년 이후 이런 체제가 붕괴되면서 급속한 변화와 변동, 그리고 불확실성의 시기가 닥치게 되었다. 새로운 생산 및 마케팅 체제는 더욱 유연한 노동과정과 시장들을 그 특징으로 하며, 지리적 이동성이 드높아지고, 소비관행이 급격하게 뒤바뀌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체제가 ‘새로운 축적체제’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지 어떤지,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불러일으킨 문화적 전환과 짝을 이루는 기업가주의 및 신보수주의의 부흥이 ‘새로운 조절양식’인지 어떤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장기적인 정치 경제의 전개양상을 두고 볼 때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을 보다 근본적인 변화와 혼동할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 경제적 실태와 2차대전 후 과거 활황기 사이의 대조점들은 너무나 강력한 것이어서, 포디즘에서 ‘유연적’ 축적체제라 불릴 만한 것으로 넘어갔다는 가설은 최근의 역사를 특징짓는 이야기 방식으로 채택될 만하다. (160)

2.2 포디즘

포드가 특별히 기여한 점은, (그리고 궁극적으로 포디즘을 테일러주의와 구별짓는 것은), 대량생산이 대량소비, 새로운 노동력 재생산 체계, 새로운 노동통제와 관리의 정치학, 새로운 미학과 심리학, 요컨대 ‘새로운 유형의 합리적 모던 대중적 민주사회’를 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한 그의 안목이었다. (161-162)

결국 조절이론이 ‘포디즘’을 하나의 시기로서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새로운 유형의 합리적 모던 대중적 민주사회’를 의미하기 때문.

전후 포디즘은 단순한 대량생산 체계라기보다는 총체적 생활방식으로 여겨져야 한다. 대량생산은 대량소비뿐만 아니라 제품의 표준화를 뜻했다. 이는 또한 다니엘 벨과 같은 많은 신보수주의자들이 훗날 노동윤리 및 기타 자본주의적 덕목들의 보존에 해로운 것으로 여겼던 완전히 새로운 미학과 문화의 상품화를 의미했다. 포디즘은 또한 매우 뚜렷하게 모더니즘 미학에 -특히 모더니즘의 기능성이나 효율성 선호에-바탕하여 세워졌으며 그것에 기여하였다. 국가 개입의 형태들(관료적 기술적 합리성 원칙에 따라 운영됨)과 그 시세틈에 결속력을 부여하는 정치세력들의 판도는 특수 이익 집단들의 균형을 통해 서로 묶여진 대규모 경제 민주주의 개념에 바탕하고 있었다. (173)

결국 조절이론이 고전 맑시즘적 정치경제학 (자본론)에 가한 변형은 토대-상부구조가 아니라 ROA, MOR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 전체로서의 ‘자본주의’의 특정 기간의 ‘regulation'을 밝혀, 그것이 어떻게 특정 기간 안정감 있게 지속되는 가를 설명하는데에 있는 것 같다. (해당 관련서를 몇권 챙겨서 읽어두어야 하겠다. 조금 읽어보니 권현정, <미셀 아글리에타의 자본주의 조절이론에 대한 연구>, 서울대 석사논문, 1993이 시작으로 유용할 듯.)

포디즘의 성과를 모두에게 널리 베푸는 능력, 그리고 적당한 보건 주택 교육 서비스들을 대규모로 또한 인간적이고도 세심하게 제공할 능력, 이 두 가지가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가늠하는 기준으로서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76)

국가는 분명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지만, 어느 정도의 ‘조절’이 필수고 때문에 종종 부르주아 계급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맑스의 <자본론>에서도 공장법에 대해서 설명할 때,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이익과 부르주아들의 이익 사이를 구분하는 대목이 있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를 안 망하게 하는 것이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임으로, 국가의 ‘조절’이 필수적이다. 이 국가 조절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도화된다면, 결국 자본주의 체제 붕괴의 필연성 내지는 과학적 원리는 국가라는 ‘주체’를 과소평가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닐까?

포디즘이라는 일종의 패러다임이 선진 자본주의의 생산성 향상과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을 높인 것은 사실이나, ‘모든 사람’이 포디즘의 덕을 본 것은 아니었다. 노동시장은 독점부문과 더욱 다양한 경쟁부문으로 양분되는 경향을 보았고, 포디즘은 전자에만 해당되었다. 결과적으로 불평등에 따라 버림받게 된 쪽에서 심각한 사회적 갈등과 강력한 사회적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민족이나 성, 인종에 따라서 누가 고용에 있어서 특혜를 받는가, 못받는가’가 결정되기도 하는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시민권운동은 도심불량주거지역을 뒤흔든 혁명적 분노로 발전하고, 저임금 직종에 여성이 몰려듦에 따라 그만큼 격렬한 여성운동도 함께 일어났다. 늘어가는 부유함 속에서도 처절한 가난이 존재함을 깨달으며 포디즘에 기대했던 혜택에 대한 불만이 강력한 저항운동으로 솟구치게 되었다. (175 정리)

여기서 하비는 맑스의 논법을 빌어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포디즘의 절정에서, 포디즘을 붕괴시킬 것이 나타났다고.

1973년의 경기 퇴조가 포디즘의 틀을 급작스럽게 뒤흔들게 되자, 비로소 축적체제의 급속한(하지만 아직 명확히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변화과정이 시작되었다. (177)

 

2.3 포디즘에서 유연적 축적으로

유연적 축적(flexible accumulation)은 포디즘의 경직성에 정면 대응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노동과정이나 노동시장, 제품, 소비패턴의 유연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전혀 새로운 생산부문의 출현, 금융서비스 공급의 새로운 방식, 새로운 시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업적 기술적 조직적 혁신의 엄청난 강화 등이 그 특징을 이룬다. (...) 또한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의 새로운 ‘시공간 압축’국면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시공간 압축’이란 개인적 의사결정 및 공공 의사결정에 드는 시간 지평이 축소되는 한편, 위성통신과 운송비용의 하락을 말미암아 그러한 의사결정이 훨씬 멀리 있는 여러 지역으로 즉시 전파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186)

하비의 ‘유연적 축적’은 바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신자유주의’이며 남한에서는 이데올로기와 이로 인한 자본형식의 변화를 통틀어 ‘신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조절체제’의 변화와 포스트모던 문화 사이는 어떠한 관련성이 있을까?

새로운 생산 기술(자동화, 로봇)이 도입되고 새로운 조직형태-생산의 흐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고를 크게 감소시키는 적시 배달체계 같은-가 전개됨에 따라 회전시간(자본주의적 수익성의 핵심을 이루는 한 요소)은 엄청나게 짧아졌다. 그러나 소비의 회전시간이 짧아지지 않는다면 생산의 회전시간이 아무리 빨라져도 소용 없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포디스트 제품의 반감기는 5년에서 7년 정도였지만 유연적 축적에서는 섬유나 의류산업 같은 부문에서 이것을 절반 이상 단축시킨 한편 다른 부문-소위 ‘두뇌’ 산업(예를 들면 비디오 게임 및 컴퓨터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에선 그 반감기가 18개월 미만으로 뚝 떨어진다. 따라서 재빠른 패션 변화, 필요 유발 기술의 동원 및 문화적 변화에 큰 관심을 둠으로써 유연적 축적은 소비 측면에서도 보조를 맞추게 되었다. 포디스트 모더니즘의 상대적으로 안정된 미학은 흥분과 불안, 그리고 유동적인 성질을 보이는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에 자리를 빼앗겼다.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은 문화적 형태들에 있어 차별성이나 순간성, 스펙터클과 패션, 그리고 문화의 상품화를 예찬한다. (193)

소비에 있어서의 회전시간 단축을 위해 상품(그 대부분은 나이프나 포크처럼 긴 주기를 가진 것들)의 생산으로부터 이벤트(거의 순간적인 회전시간을 갖는 스펙터클 따위)의 생산쪽으로 강조점이 옮겨진다. (195)

1970년 이래 규범과 습관, 정치적 문화적 태도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그리고 그러한 변동이 포디즘에서 유연적 축적으로의 이행과 어느 정도까지 결합되는 것인가(...) 보다 유연한 자본운동은 포디즘 아래에서 길러진 한층 경직된 가치들이 아닌 것들, 즉 모던한 생활의 새로운 것, 유동적인 것, 순간적인 것, 일시적인 것, 그리고 우연적인 것들을 강조한다. 그에 따라 집단적 행동이 더더욱 어렵게 되며(사실상 이것이 노동 통제 강화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엄청난 개인주의가 포디즘에서 유연적 축적으로의 이행에 있어 필요조건으로(비록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기능한다. 결국 새로운 기업형태 및 혁신, 기업가주의 등을 통하여 새로운 생산체계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 이제부터 해야 할 당면 임무는 자본주의의 지배적 축적체제 속에서 그와 같은 주요한 이행들의 뿌리에 대한 해석을 개관하는 일이다.

ps.

국민국가와 초국적자본 사이의 갈등은 포디즘 시대의 전형이었던 대규모 자본과 대규모 정부 사이의 편안한 조화를 깨뜨리면서 활짝 펼쳐졌다. 이제 국가는 훨씬 더 확실치 않은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국가는 국가적 이해를 따져 기업자본의 활동을 규제해야 하는가 하면, 그와 동시에 똑같은 명목 아래 초국적자본 및 세계 금융자본에 대한 미끼로 작용하는 ‘양호한 경영 여건’을 만들어 내야 하고, 더욱 좋은 환경 조건으로 그리고 보다 많은 이윤을 낼 수 있는 지역으로의 자본 도피를 저지해야 한다(환관리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208)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일국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반자본적인, 적어도 비자본적인 움직임이 ‘국가’라는 형태 또는 매개로 자신을 표출 할 수 있을까?

2.4 이행의 이론화

이 장의 내용은 결국 이행을 이론화 해야 한다는 것; 세 사람의 이론가가 포디즘과 유연적 축적 사이의 비교한 것을 소개하고 있는데, 상식적인 수준.

주목할 것은, 자본주의에서의 필연적인 과잉축적의 흡수는 시공간적 이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 결국 우주로 나가는 것이나, 효용성이 없다고 되풀이 주장되는 MD체제! 우주로만 나가면, 역시 자본주의는 끝나지 않을 수 있다? 적당한 조절체계만 갖추면.

2.5 유연적 축적: 견고한 전환인가 아니면 일시적 해결인가?

생산이나 노동시장, 소비의 유연성이 전혀 새로운 방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자본주의 위기 경향에 대해 금융적 해결책들을 모색한 결과라고 본다. 이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례 없는 일로서, 금융체계가 실제 생산으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하였음을 뜻한다. 또한 이로 인해 자본주의는 유례 없는 금융위기의 시대를 맞게 된다. (232)

첫째 현재의 상황 속에서 (‘통상적 자본주의’와는 반대되는) 뚜렷한 그 어떤 것을 찾고자 할 때,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자본주의 조직의 금융적 측면과 신용의 역할이다. 둘째로 만약 현재의 축적체제에 어떤 매개적인 안정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시간적 공간적 해결의 새로운 국면과 형태들로 나타날 것이다. 간단히 말해 3세계를 비롯한 기타 부채의 상환을 예컨대 21세기까지 유예시킴으로써 “위기를 미루는 것「시간적인 위기 땜질」”이 가능하며,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다양한 노동통제 체계들이 국제적 분업체계 안에서 새로운 생산물이나 생산양상과 더불어 확산되는 “공간적 판도의 철저한 재구성”「공간적인 위기 땜질」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 전체적인 자본축적 논리 속에서 주로 낡은 요소들을 끌어 모아 특수하고도 새로운 조합으로 자리잡게 한 것이 바로 유연적 축적이란 점은 강조되어 마땅하다. (...) 이러한 시공간적 위기의 형태를 살펴봄으로써 포스트모던한 문화적 실천과 철학적 담론으로의 충동적인 전환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와 같은 시공간 경험의 변화에 토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34~235)

이로서 2부의 역할이 끝났다. 어찌보면 ‘유연성’을 너무 강조하는 것이 아닌지, 예전에도 자본의 움직임은 이 ‘유연성’을 추구한 것이 아닌지가 의문이 드는데 이에 대해 하비는 ‘탈산업화나 공장 이전, 보다 유연한 인사행위와 노동시장, 자동화와 제품 혁신과 같은 사실들을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스럽다’라고 주장하며 결국 ‘포디즘에서 유연적 축적으로의 이행’기라는 것이다. 20년 전에 이랬으니 지금은?

어찌됬든 이러한 변화를 강조함으로써, 이를 통해 포스트모던 문화 현상을 토대와 연관지어 설명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 매개로서의 ‘시공간 경험의 변화’를 설정하기 때문에, 하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강조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맑스주의적 시각으로 어떻게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상을 설명하겠는가? 물론 이의 전제는 ‘포스트모던’적 현상이 ‘포스트’모던하다는 것. 자본의 작동방식도 ‘크게’ 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포스트모던’ 현상도 ‘모던’현상에서 크게 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해야하는, 또 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그룹이 내가 알기로는 예전 IS그룹, 현재 트로츠키주의자 아닌가? 일방적 단순화겠지만... ) 잘 모르겠다.... 무엇이 변하고 또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지. 그러니 공부하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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