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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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랑이 점점 긍정화되고 부정성은 희귀해져 간다. 사람들(나르시시즘적 주체ㅇ 자기애x)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타자에게서 자신의 동일성을 찾으려 한다.

사랑은 나의 동일성을 버리고 타자 속에서 죽어가는 과정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타자 속에 죽고 타자로 부터 화해로운 귀환을 맛보지만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타자에게서 자신의 동일성을 찾는다.

나와 타자의 경계가 모호한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그림자에 타자를 대입시킨다. 그 그림자 속에서 어떠한 결론도 맺지 못한 채 우울증에 걸리는게 현대의 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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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라는 헛소리 - 욕심이 만들어낸 괴물, 유사과학 과학이라는 헛소리 1
박재용 지음 / Mid(엠아이디)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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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파도 속에서 옳고 그름를 판별할만큼 모두가 과학도일 수는 없다. 그러나 과학을 접함에 있어 최소 합리적 의심을 해 볼 필요는 있다. 이러한 자세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를 제고시키기 때문이다.

저자가 책을 쓰면서도 몇번이고 답답함을 토로하는게 너무 웃겼다ㅋㅋㅋㅋㅋㅋㅋ 저자맘=내맘
이런 책이 사실 속시원하진 않는데 그 이유는 유사과학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책을 볼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온 예시 중 가장 이해안가는건 혈액형별 성격을 왜 믿을까 싶다. 아니 당단백질이 왜 성격을 판가름 하겠냐고요...!!(답답) 심지어 초중학교 과학시간에 배우는 내용을 왜 왜곡하려는건지..?
이처럼 잘못된 지식을 가진 사람이 확고한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는게 ‘안아키’나 사이비 종교집단이 아닐까 싶다...

어떠한 명제도 그냥 믿지 말 것. 모든 명제에 대해 회의적 시선을 거두지 말 것. 언제나 반증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을 받아들이는 ‘합리적 회의주의‘, 혹은 ‘과학적 회의주의‘는 삶의 자세로서 대단히 유용하고 또 가치 있는 일입니다. 오랜 과학의 역사가 증명하는 과학적 회의주의‘를 생각의 틀로 만들어나가면, 스스로에게도 의미 있고,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일이 될 것입니다.
권위를 맹신하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에 객관적이 되고자 노력하는 자세는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이기도 합니다.

May the scientific scepticism b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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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을 읽다 - 고전을 원전으로 읽기 위한 첫걸음 유유 고전강의 1
양자오 지음, 류방승 옮김 / 유유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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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다윈주의’라는 사람 치고 ‘종의 기원’을 제대로 읽어 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진화와 진보를 동일선상에 두는 사회진화론이나 다윈주의 만큼 오용과 남용이 판을 치는 것도 드물지 않을까
인간은 자연계를 넘어 사회 도덕적 생물이 되었다. 본능을 운운하며 사회의 범죄를 ‘무의식적으로’ 옹호하거나 2차 가해를 하는 것들(인간이라 하기도 싫음)을 보면 극혐스럽기 짝이 없다. 이처럼 잘못된 진화론 개념을 가진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다윈의 ‘자연 선택’은 종간의 경쟁이며 고등한 종이 자손을 끊임없이 번식하고 하등한 종은 도태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면 당장 이 책을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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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주의자 - 사피엔스에서 인공지능까지
최정규 외 지음 / 사회평론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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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주의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종종 단순히 그것을 종교적 차원 혹은 봉사적 차원의 천사와 같은 행동으로 치부해버리곤 한다. 인류의 진화에 있어 이기적인 유전자를 지닌 개체가 집단 내에서 자신의 유전자를 대대 손손 남길 것이라고 짐작해보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이타주의란 단순히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할 줄 아는 것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인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하고 이에 있어 이 책은 이타주의가 인류의 진화와 함께 진화해 왔으며 익명의 타자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되는지에 대한 사회적, 과학적 사례들을 말해주고 있다.

1장. 우리는 왜 타인의 고통에 아파할까?
우리는 왜 일면식도 없는 낯선 이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는 안타까운 마음을 지니게 되는 걸까?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무뎌지는 것이 경쟁에 있어 유리함을 알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이타적 행위를 하도록 진화해왔다. 이 진화에 대해 최정규 선생님은 경제적 상황의 기저에는 이타적 행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목했다. 경제적 현실과 이타적 행위가 서로 대체제가 아닌 상호 보완적이라는 말로, 이타주의는 인간이 지켜야 하는 도덕적 가치가 아닌 활용해야 할 경제적 자원임을 암시한다. 즉, 이타주의는 우리가 '해야하는' 도덕적 행위가 아닌 실증의 문제이고 낡은 본성이 아닌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행동 양태인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이타주의 없이도 작동 가능한 시스템임을 보이려 했으나 그러한 시장이란 허구적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냈다. 책에서는 노동력 거래를 예시로 뽑았다. 노동력 거래에는 노동의 시간은 계약이 가능하지만 단위 시간동안 얼마의 노동력을 지출할 것인지에 대한 사안은 계약이 불가능하다. 이 경우 서로가 이타적임이 아닌 이기적으로 자신의 이익만 바라보고 대면한다면 노동력을 사는 사람은 적은 임금으로 더 많은 노동력을 요구할 것이고, 노동력을 파는 사람은 적은 노동으로 많은 임금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래에 이타적 행위가 기저에 깔려 있어 고용주는 자신이 손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 더 임금을 높여 제대로 된 노동자를 구하려 하고 이러한 태도에 노동자는 호혜적으로 반응하여 노동력을 올리게 된다. 이 형태의 교환이 현실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양측 모두에게 더 나은 경제적 결과를 가져다 준다. 어느 사회든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고 개인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시장은 대규모 협력체계로서 우리 사회의 주된 조정 메커니즘이 된 오늘날조차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여전히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시장의 기저에는 이타주의가 여전히 수행하고 있고 그 역할이 남아 있으며 시장과 이타주의가 대체적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2장. 나와 타인의 경계는 무엇일까?
극단적인 이기적 행위는 자신에 대한 평판을 하락시키고 타인의 비난을 불러 오히려 자신의 이득에 해가 되는 행위가 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이타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평판을 상승시킴으로써 이로운 행동이 되기도 한다. 어디까지가 이기적 행위이고 어디까지가 이타적 행위인지 분명히 경계를 긋기는 힘들다. 이에 대해 이 장에서는 공자와 노자, 장자, 묵자, 양주와 같이 고대 동아시아 사상가들이 '나'와 '타인'의 경계를 넘어 어떤 행위가 이타적 행위인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3장. 내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지만 도움을 주지 않은 경우도 있고 동정심을 느끼진 않지만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이를 돕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 이진우 선생님은 동정심이 아닌 이성에 기반한 이타주의를 소개함으로써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원칙과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이성적 판단을 통해서도 타인을 위한 이타적 행위를 이행할 수 있다고 소개한다. 나는 감성적 이타주의보다 이성적 이타주의가 우리 사회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감성적 이타주의는 동정심과 같은 도덕적 감정이 타인을 위한 행위를 야기하지만 이성적 이타주의는 공감능력이 이타적 행위를 가져올 수는 있으나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이행하고 있는 이성적 이타주의는 효용성을 따진다. 자선단체에 기부할 때, 이러한 사람들은 그 자선단체의 정서적 호소에 반응해서 기부한다기 보다 비용 효과적으로 생명을 살리고 고통을 줄인다고 검증된 단체에 기부한다. 타인을 돕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결정하기 위해 이성과 증거를 사용하기 때문에 효율적 이타주의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효율적 이타주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동정심보다 그 결과를 중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리주의적 이타주의라고도 볼 수 있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우리가 타인의 생명과 고통이 자신의 것과 동등한 수준의 가치를 지닌다는 인식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때, 세상에 더 많은 '선'이 실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장. 이타주의는 인간만의 윤리일까?
개인적으로 이 장에 대해서 많은 깨닳음과 가치관을 좀 더 확립할 수 있었던 부분이었다. 이과생이기 때문에 조금 더 쉽게 다가오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 장에서는 인간은 하나의 유기체로써 그저 한 물질로 이해하길 권했다. 열린계인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과 부단히 상호반응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자연으로 분해된다. 내가 인간 사회에서 이타주의가 필요하다고 더욱 명확시 할 수 있었던 부분은 미생물 시간에 배운 공생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미생물의 혼합배양시 길항작용, 공생작용 등 4가지 정도의 상호반응이 있다. 그 중 가장 서로에게 이득이 되었던 관계는 공생 관계였다. Streptococcus thermopilus와 Lactobacillus bulgaricus를 우유배지에 혼합배양하면 Lac.가 St의 활성인자인 두가지 아미노산(글리신,,?이었나,,)을 생성한다. St는 이 아미노산을 활성인자로 삼아 다른 생성물을 만들어내고 그 생성물은 Lac의 활성인자가 되어 pH가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발효유 배양시 두가지 미생물을 혼합배양하여 효율적으로 pH를 낮춰 발효유 가공시 사용되는 방법이다. 평소 미생물의 관계가 인간 사회의 모습과 별 다를바 없다고 생각했었기에 더욱 와 닿았다. 토지에서 여러 종의 식물체가 살 수록 토지의 유용한 유기물들이 존재하듯이 인간 세상도 서로 공생할 수록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갈 수 있음을 암시했다. 인간을 바라볼 때 공생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받아들여야하는 숙명과도 같다. 공생은 생명의 옵션이 아닌 생명이 살아가야 하는 객관적 배경인 것이다. 생명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의 공존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생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생명을 인정한다면 인간의 이타주의는 자선이나 특별한 미덕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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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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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걸 잊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한다.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이런 말은 지금 대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체가 될 것을, 심지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말이다.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
- 본문 내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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