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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박재동 외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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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란 말은 아주 쉽게 설명해서 인간의 권리이다. 조금 더 풀자면 인간이기에 당연하게 누려야 하는 권리이고 또 모든 인간들이 여러 재반조건에 따라 차별받지 않고 누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7살이 되었을 무렵. 나는 친척집에 가서 꺅꺅 대다가 '기지배가 어디서 떠드냐' 는 소리를 들었다. 그 친척분의 말씀은 시끄러우니 떠들지 말라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앞에 붙은 지지배라는 말이 참 기분나빴었다. 왜냐면 같이 떠든 사촌은 사내아이였고 만약 시끄러운게 문제였다면 우리 모두에게 떠들지마라는 말을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저건 아주 작은 예에 불과하다. 이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유린 사태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는 표현조차 과대할 만큼 말이다.

처음에는 좀 의아했었다. 왜 만화가들이 인권에 대해 얘기할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들이 목소리를 낸 것은 만화가라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만화의 형태를 빌어 어렵지 않게, 그리고 그림 혹은 만화라는 특성상 바로 와 닿았다. 어떤 글귀보다도 더 강하게 말이다. 10명의 만화가들이 모여서 만든 인권에 관한 이야기. 그들은 사회에서 상대적 약자인 여자 (남자에 비해), 가난한 사람 (부자나 중산층에 비해), 블루칼라 노동자들 (화이트 칼라 노동자에 비해), 장애우들 (비장애우에 비해) 에서 이 모두를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하나가 더 추가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그건 꽤나 아프게 와서 박힌다. 설사 내가 저들을 박대하지 않았어도 이 사회가 그들을 박대하고 멸시하는것은 물론 그저 살아남아 숨 쉬는것 조차 힘들게 만드는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사실 나도 저 중에서 두 가지는 해당사항이 있으니 사회적으로 완전한 강자는 아닌 셈이다.)

어느 프로그램인지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외국인 노동자를 소재로한 코메디 꽁트가 있다. 제목이 블랑카입니다 인데. 그 프로에는 한 남자가 등장해서 외국인 노동자들 특유의 어눌한 한국말을 흉내내면서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상황에 대해 얘기한다. 요즘은 이 코너에 등장하는 얘기들이 전부 한국인들의 나쁜 습성이나 이해하기 힘든 관습같은걸 다루지만 초기에만 해도 외국인 노동자인 블랑카 자신이 뭘 잘못하고 그걸 한국인 사장님이 벌하는 (때리는) 얘기가 등장했었다. 방청객들은 그 코메디언이 너무도 절묘하게 외국인 노동자의 말투를 흉내내는것에 즐거워했지만 나는 아연질색했다. 한국인 노동자 같으면 그런 잘못을 했을때 야단 정도나 맞던가 아니면 주의를 듣고 말 것을 외국인 노동자는 그걸로 두들겨 맞았다는데 그게 웃기다니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물론 그 코메디언의 취지는 그러지 말자는 것이었겠지만. 과연 그 프로그램을 본,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한국인 사장님들이 '아 저러면 안되겠구나' 하고 깨닳을 수 있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방청객들의 웃음소리에 뭍혀서 그런 생각은 들지 않을것이라 생각했다.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는지 그런 사장님들이 그 코메디언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고 한다. 아무튼 취지는 좋았겠지만. 나는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에 관한 문제를 저렇게 웃음꺼리로 밖에는 다루지 못할까 싶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만화속의 인물들은 가난하다. 가난하니 힘이 없고, 힘이 없으니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살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조차 받지 못한다. 아니, 배려는 커녕 방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가사와 육아를, 심지어 거기다 돈벌이까지 해야하는게 당연시되고, 장애우라고 해서 일반인들이 있는 곳이 아닌 특수한시설로 가서 눈에띄지 않게, 걸그적거리지 않게 살기를 강요당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형편없는 임금에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온갖 위험하고 더러운 일들을 하게 하는것도 모자라서 그나마 쥐꼬리같은 월급도 제때 주질 않는다. 남자로 태어나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다니면서 잘생긴 외모까지 지니고 있다면 일단은 사회적으로 강자이다. 그는 곧 좋은 직장에서 남보다 많은 월급을 보장받을 것이며 그것은 곧 이 사회 최대의 강자인 부자로 가는 지름길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저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어떤가. 사람들은 단지 게을러서 혹은 능력이 부족해서 가난한건 아니다. 거기에는 온갖 이유들이 존재하며 그 이유의 태반은 태어날때 부터 달라붙어있는 것이거나 혹은 본인의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래야 벗어날수가 없는 경우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을 마치 여름날 탱탱 놀다가 겨울에 얼어죽게 생긴 배짱이 취급을 한다. 모두가 다 잘 살면 좋겠지만. 그건 알다시피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떤 계층에 속하건 간에 최소한 인간으로써의 대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는 바탕은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당장 지금 내가 운좋게 태어나서 좋은 학벌과 좋은 외모를 가지고 가난하지 않게 살고 있다고 해서 저런 운이 따라주지 않은 사람은 어찌 살던가 상관없는건 아니지 않는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부자는 가난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어차피 모두가 다 잘살고 행복할 수 없다면 조금 더 가진 사람들이 자신을 가진자가 되도록 해 준 덜 가진 자들에게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간만에 참으로 좋은 책을 만난것 같다. 내가 책에서 추구하는 것은 오직 재미라고 매번 말을 하지만. 이런 책을 만날때면 그 재미라는 것을 잠시 부끄러워진다. 이 책을 읽고 한번이라도 인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10명의 만화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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