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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루거 총을 든 할머니》, 사실 표지나 책 제목을 봤을 때 그렇게 끌렸던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간단한 줄거리와, 인용된 해외언론들의 추천사와 책 소개 문구를 보고는 너무 궁금해서 집어들 수 밖에 없었다.

이야기는 도피 중인 두 연인이 탈출 할 시간을 벌기 위해

옆집 남자의 엉덩이에 총알을 박아넣고 체포된 할머니(베르트)의 자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이미 100세를 넘긴 나이로, 경찰은 형식적 심문 후 서둘러 다음 타겟(도망자들)으로 수사를 옮겨갈 생각이었지만

할머니의 지하실에서 백골이 발견되며 오랫동안 묻혀있던 그녀의 과거가 함께 드러난다.

솔직히 번역(장소미 옮김)이 썩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수준이어서 초반부는 책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원작이 가진 매력 자체가 워낙 대단해서 어느덧 앞 뒤 안맞는 엉터리 번역 문장은 신경쓰이지 않게 됐다.

할머니의 집에서 발견 된 7구의 사체에 얽힌 비밀에 빠져든건 그녀를 취조하던 벤투라 수사반장만이 아니었다.

벤투라가 귀가도 늦춘 채 하루를 꼬박 그녀를 취조하는데 매달리는 동안

나 역시 책장을 펼치고 하루를 꼬박새워가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인생은 20세기의 역사, 그리고 육체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이 걸어온 단계들과 일치한다.' 라는 이 추천사는

이 소설을 아주 잘 요약한 한 마디가 아닌가 싶다.

세계 1차대전과 세계 2차대전 등 굵직한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존중받기 위해 총을 들어야만 했던 할머니의 역사.

베르트는 부당함을 참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마냥 통쾌한 사이다 썰로 다가오진 않는다.

그건 아마 그녀를 몰아붙였던 상황이 너무나 참혹했던 동시에 리얼리티 있기 때문일 것이다.

'루거 총을 든 할머니'를 스릴러 소설로 분류하긴 어렵지만, 어떤 의미로는 그 어떤 스릴러보다 공포스럽지 않나 생각됐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 그었던 문장 몇 개 -

 

베르트는 당대를 뒤흔드는, 최소한 대화 상대를 뒤흔드는 현대적인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뤼시엥은 설득력 있는 반대 논리를 펼치는 대신, 보다 충격적인 논리를 선택했다. 즉 베르트의 따귀를 갈겼다. 부족한 지성을 크게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여자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선조들의 방식이었다.

오래오래 천천히 죽이는 건 살인으로 치지들 않지. 아내를 때리고, 고문하고, 파괴하는 남편은 법으로 처벌받지 않아…….

(남자가 여자를 때려죽였을 때는 우발적 살인으로 치부되어 감형 사유가 되지만,

오랜 고통에 시달린 여자가 남자를 죽였을 때는 계획된 범죄이기때문에 형량이 세게 때려진다는 사실을 아는가.)

 

베르트는 이 페미니즘 작품들 속에 파묻혀 캉탈 구석의 작은 시골집에서 더 이상 고립감을 느끼지 않았고, 여자일 수 있고 동시에 존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보부아르까지 읽지 않더라도 여성의 지위에 문제가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일상적으로 겪은 거니까. 다만 책을 읽으면 덜 혼자라는 기분이 들고, 내가 느끼는 걸 보부아르가 명확하고 지적인 말로 정리해주니까 좋은 거지."

 

"그래, 맞아. 하지만 존중은 폭력으로 관철시켜서는 안 돼, 절대. …… 넌 폭력을 자랑스러워하니까, 꼬마야."

베르트가 싸워온 100년 동안,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변화해 여성의 지위도 회복되는 중이고

인종차별 역시 금기시 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베르트가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유치장 안에서 만났던 이는 매춘부와 흑인 소년.

그들이 어떤 경로로 유치장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소설에서는 상세히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작가가 감금되어있던 인물로 하필 매춘부와 흑인 소년을 설정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떠올려본다.

지금 시대는 더 이상 베르트를 사회안전망 밖으로 밀어내는 세상이 아니라고 우리는 과연 단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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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2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2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뚜히 2019-09-03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ㅎㅎㅎ댓글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꾸벅)
 
비하인드 도어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운증후군 동생인 밀리의 어색한 말투가 좀 거슬렸던 것 외에는

번역된 문장도 매끄럽고 스토리도 빠르게 쭉쭉 읽히는 편이라

손에 잡자마자 단숨에 읽어내렸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중간 부분은 그레이스가 아무리 탈출을 시도해도

계속 원점으로 돌아가고 당하기만 하는 내용이라 답답하고 속터지는 편.

그렇게 '완벽' 그자체로 그레이스를 옭아매던 잭이

마지막에 수면제를 먹고 지하실에 갇히는 장면은 어쩐지 허술해서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쌓아온 잭의 이미지와 잘 매치되지 않아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잭을 지하실에 가둔 뒤 그레이스가 태국으로 가서

잭이 죽었다는 소식을 기다리며 알리바이를 쌓아가는 장면은 또 어찌나 구구절절한지..

이미 독자는 그가 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시간 단위로 그녀의 행적을 묘사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김이 빠져나갈 무렵,

마지막 장면을 읽고선 나는 이 소설이 좋아졌다.

이 마지막 한 장면을 위해 그렇게 달려왔구나.

나는 멍하니 에스터를 쳐다본다. "그럼 왜?"

에스터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밀리의 방 색깔이 뭐였지, 그레이스?"

나는 잠시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빨간색." 목소리가 갈라진다. "밀리의 방은 빨간색이었어."

"그럴 거라 생각했어." 에스터가 조용히 대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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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지음, 강승희 옮김 / 천문장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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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야 나야, 언니?"

"아율라…."

"평생 그렇게 양다리를 걸치고 살 순 없어." - 『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中

처음 접해본 나이지리아의 소설 『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는 짧은 여러개의 챕터로 이루어져있었고,

문장 하나 하나의 호흡도 짧은 편이라 속도감이 있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데 진도가 영 더디다고 느껴졌다면

그건 아마도 등장인물 중에 애정이 가는 사람이 통 없었던 탓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소설의 화자인 코레데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겠지.

코레데도, 그녀의 여동생 아율라도 비밀을 터 놓을 수 있는 친구는 서로가 유일하다.

가장 가까운 가족일 엄마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으며

병원의 청소부들은 항상 악취를 풍기는 사람들로,

동료 간호사인 잉카와 분미는 나태하면서 가벼운 사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아키베 박사는 말많은 꼰대로 그려진다.

그나마 코레데가 가장 애정을 주었던 젊고 잘생긴 의사 오투무 타데 역시 여동생 아율라랑 얽히고 난 뒤로는

코레데의 실망감과 함께 미묘하게 답답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캐릭터로 변해서

독자인 나 역시 도무지 그들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코레데는 그녀 자신 스스로도 사랑하질 못한다.

반쯤 죽어있어 의식이 없는(없다고 믿어졌던) 무흐타르 정도가

그나마 그녀가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상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 속에서 내가 조금이나마 매력을 느꼈던 인물은

작중 내내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빠뜨리며 상황을 막장으로 치닫게 몰아갔던 아욜라였는데,

책의 마지막에서 결국 사랑했던 오투무를 저버리고 아욜라의 편에 서는 코레데를 보면서

내내 아욜라에 대해 불평했지만 코레데가 가장 사랑하고 지키고 싶었던건 실은 아욜라였기에

그녀의 시선으로 그려진 소설을 읽는 나 역시 영향을 받았던거였구나 싶었다.

코레데는 아름다운 외모 하나만으로 모두에게 사랑받고 멋대로 구는 아욜라를 보며

내면은 보지않고 미모만을 따르고 칭송하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겼지만

사실 코레데야말로 누구보다 미모를 숭배하는 사람이었다.

인성까지 완벽하다 생각했던 아름다운 의사 오투무가

아욜라의 말대로 예쁜 얼굴만 원하는 한심한 남자인 걸 알게되어도 그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질 못했고

아욜라가 살해한 많은 피해자 중 잘생기고 훤칠한 외모를 가진 청년 페미에게만 연민과 의구심을 느꼈다.

나머지 더러워보이고, 배가 나오고 나이든 아저씨 등 매력적이지 못한 외모를 가진 피해자 사건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여동생의 증언만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또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피부가 얼마나 검은지,

(흑인 비율이 더 높은 나이지리아도 희고 밝은 피부를 선호하는 모양이다.)

몸매는 늘씬한지 살집이 있는지, 코가 크고 퍼졌는지 곧고 얄쌍한지 등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스스로 외모지상주의의 피해자라 여기면서 누구보다 남의 외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180이 넘는 키에 부두교 인형을 닮았다고 스스로를 묘사하는 코레데는 결국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대신 아름다운 아욜라의 손에 피가 묻지않도록 그녀를 지키며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아마 앞으로도 코레데는 케힌데(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따르고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던

타이우 고모와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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