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의 시 보다는 권 말미에 실린 이상의 수필과 소설이 내게 더욱 깊이 와닿았다. <날개> 같은 경우 수험공부를 하면서 많이 봤던 작품이지만 전문을 다 읽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부분만 읽었었고, 더군다나 내가 좋아 즐겨 읽은 것이 아니라 수험을 위해 억지로 읽은 것이었다보니 당시에는 감흥이 없었는데 이제와 읽어보니 좋은 문장들이 너무나 많다.
그때보다 나이를 먹어서 더욱 와닿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십대 시절에도 전문을 읽었다면 이상을 좀 더 좋아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어쩌면 매춘을 하는 아내 곁에 기둥서방 노릇하며 붙어있는 화자의 삶을 그린 것이라 교과서에 실리기엔 부적합 해보이기도 한다.
일부러 져 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최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 상태가 되어 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사세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인간이욕이 다시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면해야 한다. 권태를 인식하는 신경마저 버리고 완전히 허탈해 버려야 한다. - '권태' 중
그들에게는 흥분이 없다. 벌판에 벼락이 떨어져도 그것은 뇌성 끝에 가끔 있는 다반사에 지나지 않는다. 촌동이 범에게 물려가도 그것은 맹수가 사는 산촌에 가끔 있는 신벌에 지나지 않는다. … 그들에게 희망이 있던가? 가을에 곡식이 익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희망이 아니다. 본능이다. 내일. 내일도 오늘 하던 계속의 일을 해야지. 이 끝없는 권태의 내일은 왜 그렇게 끝없이 있나?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간혹 그런 의혹이 전광과 같이 그들의 뇌리를 스치는 일이 있어도 다음 순간 하루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잠이 오고 만다. 그러니 농민은 참 불행하도다. 그럼, 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된가. - '권태' 중
이상의 글들을 읽으면 일관되게 흐르는 감정들이 보인다. 권태, 무력감, 절망, 방황, 수치심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는데 사회인으로서 내가 맡아야 할 역할은 찾을 길이 없고, 당시로선 치료할 수 없던 극심한 폐병으로 인해 시한부 인생을 살며 그가 느꼈을 좌절감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다른 사람들은 별 문제 없이 큰 고통 없이 그럭저럭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는 것 같은데 나 혼자만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채 제자리에 주춤주춤 머물러 있는 것만 같고 무엇을 해야 좋을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막막한 심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 역시 느껴본 일 있다. 그런 절망감과 무력감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그의 글에 빠져들었다. 하물며 이상은 삭막한 일제강점기 속에 끔찍한 가난을 겪으며 살았고 건강 조차 좋지 않았으니 오죽했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