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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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한국을 휩쓸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들.

<개미>, <나무>, <타나토노트> 등 그의 소설은 쉽게 읽히면서도 위트를 담고 있어 나도 무척 좋아했었다.

이번에 출간된 <심판>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두 번째 희곡 작품이다.

희곡은 손이 영 가질 않아 고등학교 교과서나 수능 지문에 담긴 것 외에는 내가 찾아서 읽어본 일이 없는데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작품이라고 하니 관심이 생겨 읽어보게 되었다.

표지의 삽화는 그가 직접 그린 것이라하고, 제본도 양장으로 고급스럽게 잘 빠져서 소장욕구를 자극하는 책이다.

※ 소설의 줄거리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태어나는 형벌을 받겠지. 무-조건.

이야기는 폐암 수술 중 사망한 아나톨이 천국에 있는 법정에서

그간 살아온 삶을 심판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처음 표지를 보고 대강의 줄거리를 들었을 때는 흔한 이야기구나 생각했는데

심판이 시작되기도 전 '태어나는 형벌을 받겠지.' 라는 대목부터 신선함을 느꼈다.

보통 저승의 심판대에 올라선 이야기라함은 그동안의 살아온 삶을 토대로

불구덩이 끔찍한 지옥에 떨어지느냐, 천국의 낙원으로 들어가느냐 하는 내용이거나

또는 동양적 세계관이라면 좋은 덕을 쌓아 인간으로 환생하느냐, 더럽고 추악한 미물로 환생하느냐의 내용인데

여기서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 형벌이란다.


존재의 완벽한 시나리오를 포기했어요... 순응주의에 빠져서!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만 했죠. 당신에게 특별한 운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며 베풀면 훌륭한 삶을 살아낸 것일까?

<심판>에서는 이 또한 부정한다.

천국의 판관들의 눈에 지상의 인간사에서 이타적으로 살았는지 이기적으로 살았는지는 가치있는 삶의 판단기준이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교감하고 살았느냐보다는

'스스로의 삶에 얼마나 충실했느냐'를 더욱 중요시 여기고 있다.

배우자를 배신하지않고 상대에게 충실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최선의 배우자를 찾았느냐가 중요하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갖느냐가 아니라, 내 재능을 가장 꽃피울 수 있는 직업을 찾았느냐가 중요하다.

안락해보이는 현실에 순응해서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하는 것 보다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는지를 더욱 가치있게 보는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그려낸 천국의 재판관들과는 달리 나는 현세의 인간일 뿐이기에

책을 읽으며 현실에 순응하는 삶이 어째서 비난받을 것으로 치부되는가하는 반발심이 들긴 했다.

공무원이 꿈이라는 청년을 한 대 때렸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한비야의 인터뷰에 불쾌했던 그런 기분이랄까.

하지만 현실은 팍팍하더라도 <심판>의 재판관들 처럼 창작물 속에서나마 이상을 논하는 건 꼭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책 덕에 내 재능을 낭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냈느냐 자문하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다 좋지만은 않았는데, 카롤린과 베르트랑이 어떤 성별로 환생할 것인가를 추천하는 일로 옥신각신 댈 때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그대로 뱉어내는 부분이 조금 거슬렸다.

남자는 힘이 세고 거칠고 이성적이고 지저분하고, 여자는 예민하고 모성을 가지고 가정을 돌보며 변덕스럽다... 등

프랑스에서 살다 죽은지 오래된, 말 그대로 '옛날 사람'이라는 설정의 두 인물이기에 저 대화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굳이 그들의 입을 통해 저런 고정관념을 재확인하는 유머코드를 넣을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판>은 만성적인 프랑스의 의료계 인력부족이나 바칼로레아 입시제도의 문제점 등을 건드리고 있다.

최근에 <지극히 사적인 프랑스>라는 책에서 읽었던 프랑스 이야기들과 매치되는 부분을 발견할 때 마다 재미있었다.

희곡 속에서는 '도쿠가와 다카시'라고 변형된 이름을 사용했지만 실제 프랑스에 유학해서 사람의 인육을 먹었던 일본인 '사가와 잇세이' 에피소드도

프랑스 법조계의 부패를 꼬집고 있다.

나에게는 다소 낯선 '희곡'이라는 장르였지만 소설을 읽는 듯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삶과 죽음, 삶의 의미나 가치 같은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들을 가지고도

위트를 섞어 가볍게 가공해내는 기술이 좋은 것 같다.

끊임없이 인간의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해 환기시켜주는 이 희곡의 끝에서

주인공 아나톨이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리는가에 대한 반전도 이 책의 매력 요소이다.

아주 오래간만에 만난 작가라 더욱 반가웠고, 그동안 놓쳤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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