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

모더니티(근대성)에 관한 책들을 다시 모아서 읽어보려고 하는데, 마침 염두에 두고 있는 책들 중 한 권에 대한 상세한 리뷰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시울, 2006)에 대한 이재원 그린비 편집장의 리뷰이다(지난번에 라쿠-라바르트에 관한 리뷰를 옮겨온 적이 있다). 국역본이 출간되고 나서 이 책의 영역본은 도서관에 주문하여 부분적으로 복사해놓기도 했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앙리 르페브르와 보드리야르, 그리고 리포베츠키의 책들을 모아서 읽는 김에 바네겜과 기 드보르 등 상황주의자들의 책들도 정리해둘 생각인데, 좋은 길잡이가 될 만한 리뷰이다. 일상의 심미화 경향에 대해서는 따로 읽고 있는 책들이 있어서 조만간 정리해둘 예정이다.

컬처뉴스(07. 03. 26)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

예술과 정치의 관계, 혹은 정치의 예술화(그도 아니면 예술의 정치화)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지만, 흔히 언급되지 않는 인물들이 있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은 오늘날 국내에서도 전설이 된 프랑스 68년혁명의 ‘숨은 원동력’으로 평가받지만, 이들 중 국내에 소개된 인물은 기 드보르(1931~1994),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라울 바네겜(1934~  )밖에 없다. 이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아직 국내에서 국제상황주의자들은 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프랑스 68년혁명이 혁명 개념에 가져온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아직 폭넓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침 내년은 68년혁명의 40주기가 되는 해이다. 그런데 내년 5월에도 내게 이런 글을 쓸 기회가 생길지 알 수 없기에 미리 몇 자 적을 요량이다. 따라서 이 글은 68년혁명 40주기를 기념하는 때 이른 축사이기도 하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은 ‘20세기 최후의 아방가르드’이다. 1909년 2월 20일 이탈리아의 시인 필립포 마리네티가 「미래주의 창립선언」을 발표하며 화려하게 막을 연 20세기의 아방가르드운동은 국제상황주의자들이 해산을 발표한 1972년 3월 23일 공식적으로 끝난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주요 특징은 삶과 예술의 통합을 주장했다는 데 있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의 구호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선배들의 주장을 “삶이 예술작품이 되게 하라!”라는 구호로 되받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구호가 똑같다고 해서 그 함의까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국제상황주의자들의 주장을 다시 경청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만 들라면 바로 이 점, 그 ‘다른 함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의 구호가 다른 함의를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활동하던 시대 자체가 예전과 달랐기 때문이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활동했다. 스펙터클의 사회란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이는 것’(une chose vue/a thing seen), 즉 우리가 능동적으로 보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어떤 외양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오해를 무릅쓰고 더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구경꾼이 되는 사회이다.

바네겜에 따르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인간은 삶을 볼지언정 살지는 않는다. 혹은 완전무결한 그 무엇인양 제시되는 ‘보여지는 것’(예컨대 ‘좋은 삶의 표본’)을 모방하면서 살 뿐이다. 또한 이처럼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 단순히 따라야 할 그 무엇으로 제시되는 것을 넘어 소비되는 상품(소비재)이 된다는 점에서 스펙터클의 사회는 소비사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제시된 삶을 소비하지 우리의 삶을 살지 않는다. 또한 이렇듯 적극성이 제거된 삶은 권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스펙터클의 사회는 ‘권태로움의 사회’이기도 하다. 『일생생활의 혁명』(도서출판 시울, 2006)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고 제안하는 책이다.(이 책의 원제 자체가 “젊은 세대를 위한 삶의 지침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인가? 바네겜은 구경꾼이기를 그치고 참여자가 되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시의 예술가’가 되라고 권유한다. 이때 바네겜이 말하는 시(posie)는 어원 그대로의 시이다. 즉, 시작품(pome) 또는 시작품을 쓰는 기술이 아니라 ‘만들다’(poiein)라는 그리스어 동사에서 파생된 ‘만드는 기술[포이에티케]’(poitik)이다. 따라서 시의 예술가가 되라는 바네겜의 말은 ‘만들어내는 사람[포이에테스]’(poits)이 되라는 말과 같다. 자신의 삶을 직접 만드는 예술가.

바네겜이 그냥 예술가가 아니라 시의 예술가가 되라고 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네겜에 따르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는 예술조차 소비재로 축소된다. 그래서 “불행히도 예술가는 스스로를 창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관객들 앞에서 자세를 잡고 볼거리를 제공한다.” 결국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볼거리로 만든 예술작품을 관조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 옛 창조자에게 돌멩이를 던지게 됐다는 것이 바네겜의 진단이다. 그러나 누굴 탓할 것인가? “이 태도는 예술가가 유발한 것이다.”

 

 

 

 

 

 

 

 

 

  

따라서 바네겜은 “이제 더 이상 예술가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모두가 예술가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전적 의미에서의 예술작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열정적으로 삶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예술작품이 될 것이며, “사람들이 만드는 현실과 사건 속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매우 잘 된 일이다.”

얼핏 보면 이런 바네겜(그리고 국제상황주의자들)의 주장은 삶과 예술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그 이전의 역사적 아방가르드들이 제시했던 주장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 함의는 상당히 다르다. 이 점을 살펴보려면 다시 포이에티케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포이에티케는 미메시스를 전제로 한다. 즉, 흔히 ‘모방’으로 번역되는 미메시스를 통해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미메시스할 것인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미메시스란 무엇인가에 있다.

첫 번째로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실제 예술작품을 미메시스하는 방법이 있다. 낭만주의에서 유미주의에 이르는 전통에 발 딛고 있는 아방가르드, 특히 “사람은 스스로 예술작품이 되든지 예술작품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의 오스카 와일드가 이런 방법을 택했다. 즉,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예술작품처럼 자신을 만드는 것, 막말로 하면 폼 나게 사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비루한 현세의 삶을 초월한 가상의 이상화된 존재를 미메시스하는 방법이 있다. 예컨대 히틀러를 곧 도래할 ‘민족으로서의 존재’(un être-peuple), 풍전등화에 처한 유럽 문명 앞에서 비극적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영웅’, 새로운 장래를 약속하는 ‘지도자’와 동일시해 이 총통을 미메시스한 나치가 이런 방법을 택했다. ‘도래할 인민(민중)’을 말하는 구 사회주의권식 예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삶의 심미화’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두 가지 방법 역시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이 심미화하려고 하는 삶의 지향 자체가 기존의 질서(전자의 경우는 부르주아 문화, 후자의 경우는 기존의 강대국에 종속된 후발 산업국가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바네겜이 제시하는 방법은 이와 다르다. 그가 미메시스하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 타자가 아니라 현실의 타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과 다를 바 없이 피와 살을 가진 인간 동료이다. 그는 자신의 인간 동료를 미메시스함으로써 나 아닌 타자와 진정한 소통을 나누고,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안의 타자, 즉 지금과는 다르게 살 수 있는 또 다른 나의 잠재성을 발현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자신의 현존을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바네겜의 말은 바로 이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네겜이 말하는 미메시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모방’이 아니라 프랑스의 철학자 필립 라쿠-라바르트가 말하는 미메시스와 비슷하다. 라쿠-라바르트의 미메시스는 이미 주어진 어떤 이상적 주체를 모방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타자를 모방함으로써 기존에 ‘자기’ 혹은 ‘나’라고 간주되었던 것들을 자기 안에서 제거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기 안의 타자(고유성)를 끄집어내는 기술이다. 즉, 이는 타자에게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타자와 자기 자신을 모두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바네겜이 기존 질서를 전복하려는 “급진적 주체성은 재발견된 동일성의 공동전선”이라는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이렇게 보면 68년혁명의 적자로 흔히 여성운동과 동성애운동이 꼽히는 것도 당연하다). 

과연 우리는 바네겜의 말처럼 타인과 진정한 소통을 나눌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각자의 잠재성을 끄집어내고, 기존의 삶을 바꿀 동력을 얻을 수 있을까? 바네겜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권력의 억압에 맞서 기존의 삶을 바꾸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자기실현의 원천, 즉 “창조의 열정, 사랑의 열정 그리고 유희의 열정”은 “자기 양육의 욕구, 자기 보호의 욕구”와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 가지 원천은 모든 존재에 내재해 있다. 그도 아니라면 그것 없이 존재는 더 이상 존재이기를 그친다. 따라서 문제는 다시 실천, 아니 바네겜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인-되기’이다. 안타깝게도 이 요구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일상생활의 혁명』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바로 이런 각성이다.(이재원 _ 그린비 편집장)

07. 03. 26. 

P.S. 우리에게 예술가가 되기를 강권한다는 점에서 바네겜과 같은 편에 서는 사상가는 '프랑스의 니체주의자' 미셸 푸코이다. 그 또한 우리의 삶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 것을 권유했다. 내가 읽은 바로는 앨런 메길의 <극단의 예언자들>(새물결, 1996)이 유익한 안내서이다. 니체의 삶-예술론에 대해서는 네하마스의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책세상, 1994)이 유명하다. 오래전 책이지만 아직 절판되지 않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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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늘재 > '자긍심'에 관한 좋은 책
나를 존중하는 삶 - 삶의 활력.자기 존중감
나사니엘 브랜든 지음, 강승규 옮김 / 학지사 / 1994년 7월
평점 :
절판


  얇은 책자이지만, 자기 존중감(self-esteem) 분야의 권위자인 브랜든 박사가 일련의 연구에서 다룬 자기 존중감 그 자체의 정의와 개념에 관해 충실하게 써 놓은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기 존중감이란 상호 연관성이 있는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살아가며 우리가 부딪치는 현실에서 그 내용을 이루는 실상들을 이해하고, 자신의 사고 능력으로 그 사실들을 판단, 선택, 결정하는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자신감, 곧 본인의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한  자기 신뢰이며, 이것을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이라고 부르고 있다. 경험에 근거하여 '나는 할 수 있다'고 내 안에서 차오르는 자신감을 일컫는다고 하겠다.     

  또 하나는, 내가 사람이기에 천부적으로 누릴 수 있는 인간다운 모습의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 곧  자신의 생각과 바램을 편안한 마음으로 남에게 표현하고 자연스럽게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권리에 대한 긍정과 확신이며, 이것을 자기 존경감(self-respect)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는 사람이므로 귀하고 가치있다'고 느껴지는 자기 긍정감을 일컫는다고 보겠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자기 존중감을 갖고 살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현실의 실상들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서 그것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 존중감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가짐과 의식의 훈련을 통해 얻게되는 것이라고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예로 나와있는 것이, 빈번하게 부모들의 모순된 행동을 보며 당혹스러워 하고 혼란을 겪으며 자라는 가정의 아이가 그 현실에서 눈을 돌리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 우리 어머니가 모든 여성은 아니야.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모든 남성은 아니다. 우리 가정의 모습이 사람에게 가능한 인간 관계의 모든 가능성을 얘기하는게 아니다.'하는 생각을 갖는 태도이다.

  저자는, 이런 태도가 사람에게 눈 앞에 있는 현실의 역경들이 일시적일 순 있지만, 영구적일 순 없도록 해 주고, 또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존중감을 잃지 않게 해주는 길임을 얘기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1990년 여름 노르웨이에서 이 주제에 관해 국제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세 편의 글 - 1)자기 존중감이란 무엇인가? 2)우리는 왜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 3)자기 존중감과 성취 -  과 4)자기 존중감의 원천에 관한 고찰, 5)일터에서의 자기 존중감의 힘 이란 다섯 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엔 더 깊은 공부를 위한 제시가 따로 나와 있다.

(참고) 읽다가 내용이 다소 불분명하여 원서를 대조해 보고 번역을 나름대로 수정해 보았습니다. (아래 참조)

 113쪽 맨 아래:

 "내가 무엇하는 사람인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 자신의 경험을 고찰할 때 '승인할 것이냐 부정할 것이냐' 하는 (양자 택일의) 개념이 적합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접근할 것을 요구한다."  (Accepting what I am requires that I approach the contemplation of my own experience with an attitude that makes the concepts of approval or disapproval irrelevant.)

  127쪽 맨 위:

 "혁신가나 선도자" (innovators or visionaries) - 어떤 새로운 이론이나 기술, 기법 등이 움트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그것 자체에 흥미와 애착을 갖고 추구하는 사람을 innovator라 하며, 바로 그 다음 차례로 남보다 앞서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적용해 보는 사람들을 visionary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선 '몽상가'라기 보다는 '선도자'라는 말로 visionaries를 번역해 주는 것이 더 타당할 듯 싶습니다.

  132쪽 아래에서 세 번째 문장:

  "예측할 수 없는 어떤 변화가 새로운 무언가를 배워야 하게끔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실력(현재 알고 있거나 갖고 있는 것)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학습의 과정(계속 학습할 수 있는 능력) 측면에서 생각 해야만 한다." (Any unpredictable change can force the need to learn something new and a person should think in terms of his or her own processes, not skills per se.)

  133쪽 아래에서 두 번째 문장:

  ".... 믿지 않는다면, 만약 그렇게 믿었을 때 당신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이란 것을 먼저 생각하라." (...,think about how you would act if you did believe it.)

  134쪽 맨 위와 그 다음:

  "다른(아랫) 사람에게 일을 넘겨줄 때 (권한 위임을 할 때)" (...,when delegating work,...) 

  "이미 약속된 일에 대해서는" (about what has been promi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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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세 유아들에게는 이런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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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ㅇㅇㅇ 되는 게 필요허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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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드무비 > '도박묵시록 카이지'와 詩 '56억 7천만 년의 고독'

언제든지 사람은, 그 마음은,  고립되어 있다.
마음은 이해받지 못하고 전해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때로는 전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만 이쪽에서 멋대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한 것처럼 상상할 뿐이지,
사실은 결국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리가 없다.
그것은 부모든, 친구, 교사, 누구든 예외없이 마찬가지다.
마음은 알 길이 없다.
(...)
아무도 타인의 마음의 핵심에 접근할 수가 없다.
세계에 57억의 인구가 있다면,  57억의 고독이 있고, 
그리고 그 모두가 치유되지 못한 채 죽는다.

                          --후쿠모토 노부유키 <도박묵시록 카이지> 8권 중에서

 

스토리와 그림 연결없이 저렇게 옮겨 적고 보니 좀 썰렁하지만......
만화 <도박묵시록 카이지>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빚 때문에 어딘가로 끌려가 별 괴상망측한 짓들을 수행해야 하는 불쌍한 카이지.
이번에는 도심의 마천루, 지상에서 75미터 높이의 빌딩 사이에 걸친 외줄타기이다.
앞사람의 등을 밀어버려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전번  게임보다, 
각자 알아서 혼자 기어야 하는 이번 게임이 더 무시무시하다.

'57억의 고독'이라는 저 부분에서 뜬금없이 시인 함성호의 시집 제목을 떠올려 버렸다.
 <56억 7천만 년의 고독>,  내가 무지 좋아하는 시집. 잠시 보던 만화를 덮고, 시집을 꺼내 펼쳤다.


(......)
나도 뜨겁거나 차지 않은 것들은 모두
내 입 밖으로 뱉아버리겠습니다
당신의 그 지루한 기다림만큼
아무것도 제시할 수 없는 이 위증의 세계에서
나도 그댈 겁나게 기다립니다
당신은 오래 꽃과 비의 정원에서 서 계세요.
나는 넘치는 술잔을 들고 삼독번뇌의 바람을 기다리지요

                            
--함성호 詩  '56억 7천만 년의 고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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