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하이드 > [추천]2005년 사랑타령, 외로움 타령들...



책을 추천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중에서도 올해 제가 읽은 책은 얼마 안 되기에 더욱 어렵습니다.
더구나 2005년에 출시된 책이라고 하니,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문장들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던 책들 몇권 추천합니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 카슨 매컬러스 
 

카슨 매컬러스의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슬픈 까페의 노래' 가 먼저 소개되었고,
이 책이 나왔습니다.

 지금 제 서재 이름이기도 한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the heart is lonely hunter는
그 제목만큼이나 외로움이 절절한 책입니다.

분명 '희망' 보다는 조절 안되는 마음. 그에 따른 악순환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래도 그렇게 살아진다는 것에 책을 덮고 나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Van gogh 'sorrow '

 

 
 슬픈 까페의 노래 - 카슨 매컬러스

지금 보니 표지도 너무 맘에 듭니다.
세명의 기이한 남녀가 등장합니다.

 그들의 엇갈린 사랑은 당사자들의 몸과 마음을 재로 소진시키지만, 
 기이해 보이는 그들의 마음을 온통 휘젓는 그 감정은 시공을 초월하는 그것입니다.
지금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익숙할 수 있는 '그것' 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기이한 주인공들, 초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남부의 어느 시골마을, 모든게 헝클어져버린 결말따위가 젠장맞게 당연해 보입니다.


Edward hopper ' soir bleu '

 

 통역사 - 수키 김

 '오전 9시의 담배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11월, 비. 6호선 지하철 사우스브롱크스 역 앞의 붐비는 맥도널드, 이런 아침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흔치 않은 일이다.'

 그녀의 데뷔작은 멋집니다.
 그녀가 외로운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젊고, 아름다운건 분명합니다.)
 

그녀 외로움의 대부부은 '소속의 부재' 에서 옵니다. 미국에도 한국에도, 가족에도 애인에도, 사랑에도 미움에도 속하지 못하는 그녀의 외로움을 표현하는 방식은 날 좋은 날 반짝거리는 물결과도 같습니다. 눈이 시리
고, 텅 비고, 그러나 차분하고, 아름답습니다.

Hiroshi Goto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아흔 살이 되는 날, 나는 풋풋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람의 밤을 나 자신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헤 - 마르께스의 책은 다시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절로 뿌듯한 미소가 납니다.
이 책은 줄거리에서 보는 '아흔살이 된 글쟁이 할배가 열몇살 미성년 여자를 돈 주고 사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아니 맞습니다. 근데, 아닙니다.

여든살인 마르께스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 아이'는 잠을 잡니다. 피곤하고, 창피하고, 두렵고, 그래서 잠을 잡니다. '나' 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상상하고, 아끼고, 보듬습니다. 아주우- 외로운 아흔살 먹은 할아버지가 이제 '사랑의 경이'를 봅니다.
어찌보면 순진하고, 어찌보면 영악합니다. 둘 중 어느 것이래도 마르께스는 무조건 좋습니다.


gauguin 'spirit dead watching'

 
 로맨틱 무브먼트 - 알랭 드 보통

 위의 책들과는 좀 많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서는 사랑도 외로움도 노래로 부르기 보다는
 분석하려는 헛짓 하고 있으니깐요.

 

하지만, 가끔은 나도 사랑과 외로움에 허우젹 대기만 하지 말고, '헛짓'을 분석하고 싶으니깐요.
그리고 그 분석을 알랭드 보통만큼 맛깔나게 할 사람 그리 많지 않으니깐요.




 




 


 

 


 

 

 

 

 

 

 

 

 

 

 

 

 

 

 

 

 

 

    Tadahiro Uesu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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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느티나무 > 잘 노는 아이가 건강해!

 잘 노는 아이가 건강해!




                    느티나무




놀이와 수업 중에서 무엇을?


  학교 밖에서 열심히 일하는 선생님들을 만나다 보니 주변에 정말 대단한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물론,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기 마련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재능이나 관심을 가진 선생님들을 볼 때의 부러움은 아주 큽니다. 그 중에서 내가 아주 부러워하는 분들은 아이들과 잘 놀거나, 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생님들입니다. 조금씩 놀이의 힘을 새롭게 깨달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들께 한 시간의 수업과 한 시간의 놀이 중에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대부분이 수업을 선택하지 않으실까요? 흔하게는 우리에게 놓인 입시 환경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기말고사가 끝난 다음시간이라든가 소풍을 가서도 학생들과 잘 놀아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학생들과 노는 것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아이들과 노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닌지요?




  저는 짧은 교직 경험과 공부방 교사 활동을 통해서 아이들과 잘 놀고자 하는 마음과 아이들과 잘 놀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잘 노는 것이 교사-학생의 관계를 좋게 하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놀이가 교사-학생의 관계를 의미 있고,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벼운 상처를 다스릴 수 있는 ‘가정상비약’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실에 놀이를 허하라!


  수업 상황이나 학급 행사에 실제로 쓰일 수 있는 놀이의 형태는 매우 다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양한 놀이의 방법과 형태는 정작 우리의 교실 문턱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마도, 교사들이 아이들에 대해 <노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까닭 때문에 놀이를 하찮은 것, 필요 없는 것, 심하게는 없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부할 때의 마음과 놀이할 때의 마음은 다릅니다. 공부할 때는 서로를 경쟁의 상대로 여겨야 하지만 모둠과 함께 하는 놀이는 옆 자리에 앉은 친구와 마음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서로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업에 집중해야 할 딱 그 시간만 아니라면 놀이는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학급 담임으로서 학급행사를 열었을 때나, 학교 체육대회 때나, 수업 시간에 교과담당 교사로서 짬짬이 놀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방법은 교사마다 다양할 수 있습니다. 교사마다 자신이 잘 하고 좋아하는 방법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그 중에 아이들과 함께 <논다>는 것은 이 각박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의 현실을 뚫고 교사와 아이들이, 또는 아이들끼리 격의 없이, 환하게 웃으면서 어우러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통로입니다. <놀이>야말로 노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되찾게 해주는 아름다운 수단이라고 믿습니다.




좋은 관계의 출발점


  저는 올해 계발활동으로 도서부를 맡았습니다. 구성원들이 2학년 남학생과 1학년 여학생이라 서로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어색함은 아마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만나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 느낀 마음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저는 그 어색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좀 느긋하게 출석을 부르고, 계발활동은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리를 피하거나 이것저것 학생들의 신상에 관해서 물어보는 것으로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올해 도서부 아이들과 함께 도서실 운영을 멋지게 해 보고 싶은 마음을 먹었는데, 정작 아이들은 경계의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서실 운영에 대한 어떤 의논도 힘들겠다 싶어서 지난 1학기는 계발활동을 할 때마다 15-20분 정도는 꼭 놀이를 했습니다.(2학기에는 서로가 어느 정도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15-20분 정도 생활나누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도서부 학생들이 스스로 도서실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도서실 운영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대단합니다. 이제는 도서실 운영에 대한 적절한 노하우까지 생겨서 저녁시간엔 학생들이 알아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제가 도서부 아이들에게 한 학기 동안 가르친 것이라고는 장작 놀이 방법 밖에 없는데 신기한 일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학생들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이들과 저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서로를 향해 열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놀이는 서로의 마음을 여는 필수적인 수단입니다. 아무리 낯선 사이라도 놀이에 몰두하는 동안 서먹서먹한 감정이 많이 사라지고 놀이 과정에서 환한 웃음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즉 놀이를 통해 낯선 상황에 대한 긴장감과 경계심이 풀어져서 편안한 상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되어야 다른 구체적인 활동이 들어갈 자리가 생길 것입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얻어야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이것은 우리 선생님들이 늘 부딪치는 ‘학교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떠올려 보시면 금방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아이들의 변화는 교사의 깊은 인내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놀이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놀이는 서로의 마음을 열고 다가서는 변화의 첫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의 글은 전 양산 개운중학교 박계해 선생님께서 쓰신 놀이예찬론의 일부입니다. 서로의 고민이 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님들께 소개해 드립니다.




 한 현장교사의  놀이 예찬


  5월 15일 스승의 날, 오랫동안 담임을 해 온 탓에 많은 아이들의 전화와 방문을 받는 호사를 누렸다. 학교는‘배움의 터’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우리들 중 누구도 열심히 공부했던 일에 대해 얘기하지는 않았다. 함께 여행을 갔던 일, 소풍이나 야유회, 학교축제에 관한 기억 등 그 모든 얘깃거리는 <놀았던> 일에 닿아있었다. 그 모든 행사에 놀이계획을 잘 세우고 꼼꼼히 준비해 간 경우에는 인솔하는 나 역시 기대감과 설렘으로 즐겁게 행사를 맞이할 수 있었고 결과도 늘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잘 놀고 난 후의 만족감으로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아이들의 두 뺨을 볼 때는 내가 선생인 것이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남들이 들으면‘선생이 무슨 애들 놀리는 사람이냐?’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잘 자라는’아이들은‘잘 노는’아이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교사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니 이제는 더 이상 아이들과‘놀’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진 것도 한 원인이 된 것 같다. 그것도 내가 바빠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바빠서……




  요즘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 일과가 끝나면 곧바로 학원에 가야 한다. 그것도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경우보다 부모님의 선택에 의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 예전처럼 방과 후에 생일잔치를 하거나 모둠별 연극경연대회 같은걸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어렵게 그런 행사를 한다고 해도 학급회의 시간을 쪼개거나 점심시간을 이용하는 등 아이들의 눈치를 봐야한다. 사실 자신이 더 배우고 싶은 열망이 너무 커서 그런 것이라면 난들 왜 속이 상할 것인가- 문제는 그렇지 못하다는데 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상술과 잘못된 교육열에 보조를 맞추면서 자신의 배움을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게다가 그런 억눌린 배움으로 인한 긴장을 푸는 데는 컴퓨터가 한 몫을 하고 있다. 밤이 깊도록 채팅을 하거나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느라 아침에는 하품을 입에 달고 등교를 하는 학생들이 많다. 이 아이들에게 조례시간이나 종례시간에 교사가 애써 전달하는 말이나 가르침은 지루한 잔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교사는 더욱 절망하게 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나의 경우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조/종례를 통한 <놀이>활동이다. 조례 때는 빙고나 퀴즈, 혹은 동작이 작은 게임들을 하거나 책 읽어주기, 가사가 아름다운 노랫말 익히기 등 다른 반에 피해가 가지 않는 내용으로 운영한다. 그리고 종례 때는 시디나 테이프를 이용해서 노래뿐 아니라 신나는 율동을 함께 배운다. 3월초에는 종례만 끝나면 빨리 보내달라고 아우성이던 아이들이 지금은 종례 시간을 기다리고 즐기는 모습을 보며 기쁨과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배움의 기쁨에 충만한 아이들이라면 <놀이>에서 위로 받을 필요가 없겠지만 배울수록 자신에게 절망한 아이들이기에 지친 마음을 위로 받을 수 있는 <놀이>의 치유효과가 더욱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고민은 언제나 <오늘은 어떻게 놀지?>하는 것이다.




짧은 글을 마치며……


  먼 훗날 우리 아이들에게 남을 학교에 대한 기억은 무엇일까요? 제가 매일 해대는 잔소리, 열심히 공부하라는 격려, 늘 엄격하고 딱딱한 모습……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기억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기억되지는 않을 겁니다. 막연히 ‘이런 선생님이었지’ 이 정도 아닐까요? 아이들에게 가장 구체적으로 남을 기억들은 자기와 함께 한 선생님의 모습일 겁니다. 이런 기억은 어쩌면 우리 아이들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마음의 고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기억되는 모든 게 행복했던 어린 시절처럼.




  저는 그렇기 때문에 학급에서의 놀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급 놀이(행사)를 잘 계획하고 진행하면, 아이들은 함께 한 친구, 교사의 모습을 오랫동안 구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겠지요. 물론 그 기억 자체로는 의미 있는 건 아니지만, 그 기억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저는 아이들과 함께 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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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니 2005-01-07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페이퍼의 제왕이랄 수 있는 느티나무님의 글. 공감가는 내용이라 퍼옴. 내년의 우리 아이들도 올해처럼만 건강하게 몸으로도 잘 노는 아이들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