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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대담 시리즈 3
임지현.사카이 나오키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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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전 국회의원 유시민의 발언이 떠오른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군사파시즘과 일제의 잔재다'. 유시민의 이 발언은 일파만파가 되어 세간에 회자되었다.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상의 위치 때문에 유시민의 발언은 언제나 정치적 발언이다. 그의 의도가 어땠건 간에 유시민의 한 마디는 곧 정치적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시민이 한 말이 그리 충격적이었다거나 아니면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얘기한 건 아니다. 단지 잠시 기억 속에서 망각되었을 따름이다.

또한 유시민의 저돌적인 목소리가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강한 거부감을 갖게 한 것은 '잊고 싶었던' '과거'를 되살려 냈기 때문이다. '국기=애국=민족'이라는 지고지선한 상징의 기원이 우리가 그토록 욕을 퍼부었던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의 산물이라는 유시민의 발언을 그냥 보아 넘길 사람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비록 유시민을 감정적 민족주의를 동원해 비판할 수 있을 지라도, 그가 말한 '역사적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휴머니스트에서 출간된 <오만과 편견>은 자꾸 유시민의 발언과 겹쳐지며 내 마음을 술렁거리게 한다. 물론 이 책은 나같은 평범한 독자에게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책의 소주제가 '민족, 인종, 국가, 성, 계급'의 다섯 항목인데, 사실 이 항목들 각자가 독립된 책으로 묶일 수 있을 정도다. 이 커다란 주제들을 한 책에서 다루자니 독자들은 '소화불량'에 걸리기 십상이다. 더욱이 임지현과 사카이 나오키가 구사하는 용어들과 그들의 발랄한 '수다' 속에 드리워진 의미를 파악해 내기엔 버겁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매우 자의적으로 읽어 갔다. 어려운 용어와 논의는 나중의 문제로 남겨 놓고, 이해 할 수 있는 부분만을 생각하기로.

<오만과 편견>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을 파헤쳐 보면 어쩌면 매우 단순한 구도 속에서 전개된다. 바로, 역사 서술의 기억과 망각 그리고 배제와 포섭의 논리이다.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당위적 목표가 일상의 많은 부분들을 은폐하고 조작했다는 것이다. 이 구도를 통해 민족, 인종, 국가, 성, 계급의 문제들이 종횡무진하게 펼쳐진다.

특히, 저자들은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 정책을 통해서 식민지국가의 정체성을 말살·조작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획득해 나갔다는 논지를 펼친다. 제국주의 국가 혹은 문명국이 존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식민지가 그리고 야만국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들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화 정책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지금, 우리'를 길들여 냈는가를 세밀하게 밝혀낸다.

이 책에서 더욱 섬뜩하게 다가오는 부분은, 우리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대다수의 것들이 '만들어지고' '상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역사적 사실의 대부분이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 이는 내가 배워왔던 역사적 사실들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의 앎'과 '그들의 앎' 사이의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은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저자들로부터 배운 점은, 다시 역사 서술의 문제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 신체의 세포 하나 하나에 각인되어 있는 '만들어진 근대'의 허상을 떨쳐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 서술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거나 배제되고 망각된 타자들의 역사를 새롭게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식민주의적 무의식의 잔재들이 우리의 일상을 재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 말의 행간에는 식민주의적 무의식으로 굳게 잠긴 사슬을 끊어야 한다는 저자들의 처절한 외침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저자들의 외침 속에 '지금-여기'의 실천의 장으로 적극적으로 침투하려는 '용기'가 감지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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