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정여울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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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연장 신청을 하러 구청에 가던 길이었다. 바빠서 택시를 탔다. 오전 10시 30분쯤이었다. 라디오에서 미드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나 역시 미드의 열렬한 팬이므로 귀를 쫑긋하며 들었다. 게스트는 특히 CSI를 집중적으로 얘기하며, CSI야말로 테러리스트를, 테러리즘을, 범죄를 모두 때려잡을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라고 말했다. 알고 보면 과학의 이름으로, 미국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세계 최고의 범죄 백화점인 미국의 각종 범죄사건을 해결하는 CSI는 그렇게 전지전능하지도, 무소불위의 영웅적 집단도 아니라는 것. 낄낄 웃음이 나왔다. 한 마디 해 주고 싶었다. 저러다 CSI 팬들에게 테러 당하지. 테러 당할만한 말을 한 게스트는 예전에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를 쓴 문학(화)평론가 정여울이었다.

겁이 없거나, 당돌한 이 아가씨가 이번엔 문학 평론집을 출간했다. 본업이 문학평론이니 당연한 일이다. 서문을 보니 또 당돌한 말을 했다. “문학이 아침저녁으로 받아들어야 할 신줏단지라면, 문학이 혁명의 무기이기‘만’ 하다면, 그 고결함 주위로 나 같은 ‘행인 3’은 다가갈 수 없었을 것이다.”(6면)

‘순수하게’ 문학을 위해 ‘몰빵’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함할 일이다. 문학 그 자체를 자신의 운명 혹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들이 아기씨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내 눈에는 자꾸 ‘행인 3’이라는 말이 밟혔다. 물론 이건 순수하게 내 억측일 수 있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의 제1부 첫 글의 제목은 [평론가의 멜랑콜리, 철학의 아포리아]인데, 이 글은 일본의 전방위 문학(예)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글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아가씨의 말대로 그동안 한국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슈퍼에고’로 기능해 온 사람이다. 그런데 재밌게도 가라타니 고진의 이름을 한자로 쓰면, ‘柄谷行人’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필명이다. 그의 본명은 가라타니 요시오(柄谷善男)다. 그의 필명인 ‘고진(行人)’은 일본 최고의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행인>에서 따온 것이다.

아가씨가 ‘행인 3’이란 말을 썼을 때, 자꾸 가라타니 ‘고진’과 나쓰메 소세키의 ‘고진’이 겹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라타니 ‘고진’도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도 아가씨가 쓴 ‘행인 3’의 행인도 모두 근대의 심연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수반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표현이 아닐까. ‘행인 3’의 시선은 어쩌면 주인공이 가질 수 없는 엑스트라만의 특권이다. 주인공의 시선은 중심에 머물지만 엑스트라의 시선은 모든 사물의 사방을 응시하면서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중심을 파고든다. 그것이 엑스트라의 험난한 운명이다.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글에서도 아가씨의 엑스트라적 정체성이 도드라진다. “문학이라 불리는 견고한 베이스캠프가 없이도”(30면) 문학을 향유하고 사랑하겠다는 아가씨, “베이스캠프의 튼실함”(31면)에 안주하려는 자신의 욕망과 철저하게 싸우는 아가씨의 철저한 방황이 이 책의 곳곳에 스며있다. 그리하여 아가씨의 이번 평론집은 ‘현실-미디어-텍스트’를 가로지르는, 아가씨의 말처럼 “삼인칭적 일인칭 혹은 일인칭적 삼인칭”(350면)이 혼합된 새로운 문학평론이다. 부디 아가씨의 글(평론)이 “누군가의 엑스트라인 내가, 타인의 삶을 완전히 움켜쥘 순 없지만 인생의 커브길에서 한 순간 어엿하게 반짝일 수 있는, 소중한 기억의 한켠이기를.”(잡지 <드라마틱>(2007년 9월호)에 썼던 아가씨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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